주일설교

믿음의 선배들이 지닌 신앙

Author
kgmcc
Date
2020-12-26 20:48
Views
61
본문 : 히브리서 11장 13-16절

날짜 : 2020년 12월 27일

 

<히브리서 1113-16>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늘은 올해 2020년 마지막 주일예배로 드립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나온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땅은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는 이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본향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지고 있었던 공통된 점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를 올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저와 여러분들도 가질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은,

1.믿음을 따라 죽음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그럼으로 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찬사이고, 최고의 명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때는 우리의 믿음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봉사를 했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일을 했는가를 보십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입금할 때 내 이름의 사인이 들어간 체크를 집어넣습니다. 그래야 돈이 내 은행계좌에 입금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뱅크에 내가 한 일들이 입력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사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디파짓이 될수 있습니다. 몇년전에 제가 은행에 첵으로 디파짓을 했는데 며칠후에 그 첵이 다시 돌아온적이 있습니다. 그이유는 제가 그 첵의 뒷면에 사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인이 없으면 입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 돈을 은행에서는 나의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벌금만 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사인이 있나 없나를 보시고 우리의 행동을 인정해주시기도 하고 반대로 인정하지 않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자선 사업가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아무리 큰 돈을 기부하고 좋은일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이라는 사인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하늘나라 은행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다보면 당연히 죽을때도 믿음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배후에 친교시간에 어떤 음식이 나올까? 참 요즘에는 코로나 때문에 친교가 없지. 빨리 코로나가 사라져야지 교회 친교도 하고 신앙생활도 재미있을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믿음이라는 사인이 있어야 인정을 하시고 접수를 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생활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모든일을 해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왜 교만하고 성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할소리 못하고 그냥 지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내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인내해라! 온유하라! 덕을 세워라!’ 라고 말씀하시고 권유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손해가 되는 일이 있어도 그냥 참고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천국에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지난주에 있었던 성탄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죄를 다 짊어지시고 내대신 생명을 바치시고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네가 세상에서 그렇게 믿는자답게 살아가면 세상일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왔을때 내가 보상해주시겠다‘ 라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와 섬김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보다는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내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니 세상을 떠나게 될 때도 믿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바라옴기는 신앙의 선배들처럼 믿음으로 사시다가 믿음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은,

2.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음.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해주심을 받기는 했지만 자기가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그 약속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완성이 아닌 아직 미완성인 것을 보면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마치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처럼 그렇게 미완성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은 미완성’ 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의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마치 ‘쓰다가 만 편지’ 처럼 인생은 그렇게 미완성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동일합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훗날에 그것을 완성으로 이루어지게 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부르시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죽은후에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생전에 본 것은 이삭 한명 뿐이었습니다. 물론 자기 아들 이삭이 낳은 쌍둥이 야곱과 에서가 있었지만 말년이었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손자인 야곱과 에서의 얼굴을 보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뜻은 ‘열국의 아버지’ 입니다. 그리고 사라는 ‘열국의 어머니’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당시에 사람들이 ‘아브라함’ 이나 ‘사라’ 라는 이름을 듣게 되면 자연히 자식이 많은 부모 인것으로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몇 명이나 되시는지 사람들이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명입니다’ 라는 대답을 듣게 되면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겉으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낳은 자녀의 이름이 ‘이삭’ 인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웃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삭’ 의 의미는 ‘웃음’ 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애 한명 있는 것 가지고 그부모의 이름은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 이고 아이의 이름은 ‘웃음’ 이니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아마 웃었을 것입니다.

이름값을 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름을 고치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변사람들로 부터 비웃음을 덜 받을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을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바다위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녀들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비록 자기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한 약속을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삭을 보면서 이 자녀를 통해서 많은 후손들이 나오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대신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손들이 많아지는 것을 멀리서 보고 기뻐하고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그래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명을 낳으면서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기초가 되는 것을 멀리 천국에서 보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들은 이땅위를 살아가는 동안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다 보지는 못하고 이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에게는 천국에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내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던 그것이 내가 있는 동안에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저 천국에서 내가 기도하고 소망했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박수를 치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하게 될줄을 믿으십시다. 저는 지금 천국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매일처럼 일어나서 성도들이 감사를 하고 기뻐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 살고 있으면서 인터넷이나 신문에서 뉴스를 보게 되면 매일같이 전쟁이나 산불 그리고 총격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마 천국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소식을 보고 듣게 될 것입니다. 다만 천국에서 보고 듣게 되는 내용은 저마다 살아생전에 믿고 소망해왔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소식들일 것입니다. 믿지 않았던 남편이나 부모가 아니면 자녀들이나 친구 친척들이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기도를 해온 것들이 이루어지는 소식을 듣으면서 환영하고 기뻐하는 날들의 연속일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세상에서 믿지 않았던 남편이나 부모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장면을 천국에서 보게 될 때 그 아내나 자녀들이 얼마나 감격하고 기뻐하겠습니까? 그들이 드리는 기도소리와 찬양을 듣게 될 때 천국에서 얼마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소식,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소식으로 인해서 천국은 매일 잔치가 벌어지게 되고 기뻐하며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을 감사하십시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은,

3.외국인과 나그네의 삶.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믿음의 사람들은 이땅위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을 보시면 야곱이 애굽나라에 들어가서 바로왕을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내 나그네의 길의 연조(세월)’ 이라고 야곱은 바로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평생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죠. 그리고 또 야곱이 고백하는 내용을 보면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라고 고백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은 나그네의 인생이었고 그리고 또 자기 조상들이 살아온 인생도 나그네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은 이땅위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년 만년 이땅위에서 살아갈것 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죽는 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살아가는 행동을 보면 영원히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이 돈과 이 재산을 영원히 가질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래전 캐나다에서 1천 2백만 달러의 로또에 당첨된 7십대 노부부가 4개월만에 그 당첨된 돈을 단 한푼도 남기지 않고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 써버린 사건이 인터넷 기사에 나왔습니다. 나이가 75세와 78세가 된 이 부부는 당첨된 돈을 타기 전에 일주일동안 이 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 계획하고 그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첨된 돈을 탄뒤에 자기들이 계획한 리스트 목록대로 다 사용했습니다. 지역 소방서와 교회, 적십자사, 구세군, 병원, 암과 당뇨병 환자를 지원하는 기관 등등 여러 단체에 골고루 다 기부한 것입니다. 어느한 기자가 그 부부를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 상금으로 탄 액수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사용했는데 그래도 남겨두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 기자의 이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원래 내돈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아쉬움은 없습니다” 사실 이 부부들은 잘사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용접공일을 해왔던 사람이었고 여자는 미용실과 초코렛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인생말년에 골치만 아플 뿐이다. 지금까지 잘살아왔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우리의 삶을 평안하게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갈 것이다. 평상시에 로또에 당첨되면 이렇게 사용하자고 계획한 것을 실천한 것뿐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래요. 우리는 나그네 신분입니다.

나그네는 가진것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낼수도 없는 환경과 신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욕심을 내고 살아간다면 나그네 신분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소파와 침대를 가지고 여행을 하는 나그네가 있습니까?. 나그네는 여행하는 동안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고 살아갑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나그네의 마음을 가지고 이세상을 살았습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나그네와 같은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모습은,

4.본향을 찾으며 사모함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본문의 내용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본향입니다. 14절에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절에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그리고 16절에는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성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본향은 자신의 육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이 태어난 고향은 좋은 곳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우리가 이런 동요를 부르면 웬지 모르게 내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떤 감수성에 젖어지게 됩니다. 고향은 어머니와 같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감성적이 되어지고 그리워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의 본향은 이러한 고향보다 더 나은 본향이라 말씀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것은 아름답고 더 멋지기 때문에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는 우리가 이땅에서 태어난 육신의 본향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본향‘(better county) 입니다. 본향보다도 더 나은 본향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육신의 고향에 온것 보다도 훨씬더 궁극적인 본향에 온 느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훨씬 이전에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매달리고 있고 그리고 영적으로 너무나 연약해있어서 그것을 느끼지 못할뿐입니다. 그런데 더 나은 본향에 도착하게 되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 그래 내가 창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곳이었지. 그때 내가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있었던 곳이야‘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본향은 ’우리가 원래에 있었던 곳’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입니다.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 성도의 시민권은 이곳 미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에서 이땅에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시민권자인 것을 명심하며 신앙생활 해나가십시다.

제가 동요가 아닌 대중가요 노래 중에서 고향에 대한 노래를 제일 처음 배웠던 곡은 고복수씨가 부른 ‘타향살이’ 이었습니다. 이곡은 저보다 열두살 위이신 형님이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때 시간이 나면 기타를 치시면서 불렀기 때문에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에 저는 피리를 가지고 시간이 날때마다 이노래를 외운 계명을 가지고 열심히 불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피리로 불었는지 아직도 그 계명을 외우고 있습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이러한 가사가 있는 이 타향살이는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그래서 그당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조선 사람들이 만주나 러시아로 흩어져 살았던 시절에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기에 담긴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1940년에 고복수 씨가 만주 하얼빈의 한 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이 타향살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만주로 도망을 와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같이 합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공연이 다끝났는데 어느 한 30대의 여인이 이 고복수씨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전쟁중에 남편을 잃어버렸는데 지금은 조국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내 다신에 고향에 있는 저희 가족들에게 이 편지를 좀 보내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편지한통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어느 한 여인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여인이 바로 그전날 자기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 한통을 건네주던 여인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고복수씨는 그때부터 이 노래를 부를때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맺힌 한을 생각 하면서 눈물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고백을 한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이 고복수씨의 ‘타향살이‘ 라고 합니다. 1991년도에 KBS 주최로 여러명의 가수들이 러시아 이전에 소련 땅인 알마아타에 가서 공연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타향살이 노래를 고복수의 아들 고영준씨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련에 살고 있던 교포 1세, 2세, 3세까지도 이 노래를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 고향보다도 더 나은 고향이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이 한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한해가 지나가고 계속해서 한해가 지나가게 되면 우리는 이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는 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머물고 살아야 할 곳은 처 천국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곳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갈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바라옵기는 저 천국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그네의 신분으로 이땅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