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믿음(2)
<창세기 5장 21-24절>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올 새해 들어서 첫째 주일인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자녀를 낳고 자녀를 양육하는 이러한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맞추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싫어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에녹이 살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런데 언제부터 에녹이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본문 22절입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므두셀라를 낳은 후 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를 낳기 전까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언제 므두셀라 를 낳았습니까? 본문 21절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에녹이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으니까 65세가 되기전 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다른 셋의 후손들처럼 에녹도 ‘그냥 지내며’ 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크리스쳔이지만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하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막가파처럼 함부로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에녹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므두셀라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난 이후 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므두셀라의 이름을 통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은 ‘죽다’ 라는 의미인 ‘므두‘ 와 ’보낸다’ 라는 의미인 ’셀라‘ 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의 이름이 가진 뜻은 ‘그 아이가 죽으면 (홍수) 심판을 보낸다’ 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계획을 가진 하나님의 심판을 에녹이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름을 ‘므두셀라’ 라고 지은 이 에녹은 그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 아들의 죽음 이후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을 가지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므두셀라가 죽을 때 홍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이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187세 더하기 182세 하면 되니까 369세가 됩니다. 그런데 창 7장 11-12절에 보면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369 더하기 600을 하면 969가 됩니다. 므두셀라의 나이가 바로 969세가 되던 해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죽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보내신다고 경고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렇게 에녹은 아들을 낳은후 이 아이가 죽은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며 살았습니다. 유다서 1장 14, 15절입니다. 14.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이렇게 에녹은 그당시 경건하지 않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말하면서 일상생활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저와 여러분도 우리 인간의 죽음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에녹이 아들 므두셀라의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된 이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녹은 그렇게 특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아들 딸을 낳고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이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 일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때마다 하나님에게 질문을 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며 살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할수 있는 믿음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가지 내용의 믿음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 즉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의 해야 할 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 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이심” 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상 자체가 아니라 상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본문을 “하나님은 상 주신다” 라고 해석하면, 우리는 내가 원하는 때에 그 상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시다” 라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때에 그 상을 받지 않더라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해를 좀더 쉽게 하기 위해서 저에게 아들과 딸 두명의 자식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다. 아들은 내가 주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내가 주는 선물만 받으면 그이후로 한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옛날에 받았던 그 선물이 싫증이 나게 되면 다시 내앞에 나타나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나보다도 내가 주는 선물에 관심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딸은 내가 선물을 주거나 안주거나 관계없이 언제나 시간이 날때마다 내곁에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합니다. 자 그렇다면 저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을 주는 자녀는 아들과 딸 중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은 모두 다 사랑합니다만 만일에 두 자식중에서 한명만 같이 동행해야 한다면 제가 누구오 동행하고 싶어하겠습니까?
만일에 제가 아들에게 ‘얘야 오늘 갈데가 있는데 나와 같이 갈까?’ 하면 아들은 ‘내가 따라가주면 어떤 선물을 제게 줄껀데요?’ 라고 제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딸은 아무런 조건을 내걸지 않고 나와 함께 갈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상을 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 상을 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믿음으로 동행하는 것과 ‘비록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상을 주시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게 상을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는 믿음으로 동행하는 것의 차이라 할수 있습니다. 에녹은 이러헌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을 할 때 에녹은 어떠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
1.하나님이 데려가심본문 24절입니다.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이후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습니다(롬 6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했습니다(롬 5정12절)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에녹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타고 승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에녹을 데려가셨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에녹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산책을 하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가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어째튼 어느날 갑자기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에녹을 찾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찾을수 없으니까 사고를 당해 어디에선가 죽었을것이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당시의 세상은 무법천지이었고, 그래서 라멕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났던 시대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겨졌다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 전반부입니다.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이렇게 성경은 창세기 5장 24절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말씀하시고 히브리서 11장 5절에는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시고 하나님이 에녹을 옮기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에녹을 어디로 데려가셨습니까? 천국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믿음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곳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입니다. ‘13.그가(하나님)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믿는 성도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나라는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영광스런 천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에녹을 영광스런 천국으로 옮기시고 데려가신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씀합니까?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래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수많은 죄악으로 가득차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악으로 인해 무서운 재앙과 두려운 질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온 세상이 겪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 사건은 바로 우리 인간의 탐심과 죄악으로 인해 일어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백신으로 인해 언제가 코로나가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흑암의 권세가 통치하고 있는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또다른 재앙의 사건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에녹에게 베푸신 축복을 보면서 소망을 가질수 있습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는 성도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데려가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서 천국으로 옮기주실 때 바로 우리 인생의 끝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물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녹과 같은 경우는 이젠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하여 우리인간에게 육신의 죽음이 오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법을 하나님 스스로 깨트리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녹의 사건을 통해 믿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에녹의 사건을 보면서 죽음 저편에 새로운 셰계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간이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이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우리는 에녹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그대로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7절입니다.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후에’ 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이땅에 있다면 우리도 에녹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나님이 그대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가신바 되었는가 하면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후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이땅의 성도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들림을 받을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사나 죽으나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
2.하나님을 기쁘시게 함히브리서 11장 5절 하반부입니다. ‘5.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에녹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지혜롭다든지 기술이 있다든지 용기가 있다든지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평범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삶 밖에는 내세울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큰 일을 남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위대한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너무 하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업적보다 더 위대한일도 1초만에 말씀으로 이룰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동행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재능이 없고,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학벌이 없고 물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 나도 미워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 내가 좋아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성공한후에 주님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부자가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를 바꾸고 살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미국 정치가로서 이탈리아 대사를 역임했던 클레오 루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람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누구나의 인생은 이땅을 마치는날 한 문장으로 요약될수 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만일에 에녹이 저와 여러분들처럼 이땅에서 죽음을 맛보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 에녹의 묘비에는 분명히 이렇게 쓰여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 이곳에 잠들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땅을 떠날 때 저와 여러분의 묘비에는 어떤 글이 나의 비석에 쓰여져 있겠습니까? ‘한평생 쌀만 축내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이곳에 잠들다’ ‘평생 가족들에게 상처만 주었던 사람 이곳에 잠들다’ 이런 삶을 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루스 그래함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편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한 거리 모퉁이에 ‘공사끝, 그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 (The 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 라는 공사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지판에 적힌 글을 자신의 마지막 묘비 비석에 새겨달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이 미국땅에서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인 빌리그래함을 곁에서 돕고 또 2남 3녀의 어머니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온 이 루스 그래엄 여사의 묘지에 새겨진 내용은 그 여인이 이세상에 있는 동안 얼마나 겸손한 인격을 가진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았다‘ 라는 한문장으로 나의 인생이 정리되는 삶을 살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
3.후손들이 복을 받음.에녹이 낳은 첫아들의 이름은 므두셀라입니다. 그리고 이 므두셀라 969세를 살았습니다. 이땅위에 태어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오래살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아들이 장수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조금전에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있습니다. ‘므두셀라’의 의미는 ‘그가 죽을때에 심판이 온다’ 는 뜻입니다. 그리고 므두셀라가 죽은 그해에 홍수의 심판이 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므두셀라가 인간중에서 최장수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 9절입니다.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므두셀라가 인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이유는 바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한명의 인간이라도 더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서 므두셀라는 가장 오래 살았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므두셀라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으로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들인 므두셀라가 하나님이 지니신 성품을 알게 되는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된 축복을 에녹은 누렸습니다. 그리고 또 에녹의 손자인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6장 8절입니다.
창 6장 8절입니다.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리고 6장 9절입니다.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을 사니까 그의 후손인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의 자손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것입니다.
제가 젊었을때는 몰랐는데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까 인생의 동반자에 대한 중요성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젊었을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들이 제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생을 많이 살아가다보니 가족과 가정의 중요성을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게 되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존재가 되지만 가족과 배우자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신실하게 교제를 나누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과 배우자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인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하지만 가장 축복된 인생은 우리의 진정하고 영원한 동반자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까? 그이유는 우리와 친밀하게 교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평안한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이 이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