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님의 관심

Author
kgmcc
Date
2021-01-23 19:21
Views
516
본문 : 요한복음 17장 14-19절

날짜 : 2021년 1월 24일

 

<요한복음 17장 14-19절>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억울함을 당하게 되어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했던 경험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인터넷에서 보게 된 내용입니다만 살인자라고 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윤성여 씨에 관한 기사이었습니다. 1988년 9월 16일 당시 경기도 화성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당시 13세이었던 박 모양이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후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 사건의 범인으로 윤성여 씨가 잡혔던 것입니다. 그후 끊임없이 무죄를 호소했지만 재판정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습니다. 그후에 감옥살이를 하다가 감형이 되어 감옥에 들어간지 20년이 된 2009년도에 출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2019년도에 그 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이 윤성여씨는 32년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되었다는 것이 기사 전체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20세의 나이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지금은 53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윤성여씨는 지금도 자유롭게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또 경찰이 자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넣을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어서 입니다. 일종의 트라우마 증세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진짜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도 기뻤다기 보다는 언론사들이 그냥 조용히 지나가주길 원하는 마음이 더 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으로 인해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또다시 시달리게 될까봐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사건이 그냥 지나가기를 원했겠습니까?. 제가 그 기사를 읽고는 관심이 생겨서 이 윤성여씨에 대한 기사를 좀더 찾아보았는데 그사람은 정말 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았던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이 너무 순진하고 또 초등학교만 나왔기 때문에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젊은 시절에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보니가 결혼을 할 시기도 놓쳐서 지금 혼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언론기자가 그사람과 인터뷰를 하던 도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보상금으로 최소 20억원 이상의 액수를 받게 될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계획입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0억이 아니라 100억 1000억원을 준다 해도 잃어버린 내 인생과 바꿀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기자님에게 20억원을 줄테니 감옥에서 20년 살라고 하면 당신은 20년을 감옥에서 살수 있겠습니까?’ 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 가다보면 이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인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에 억울한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입니다.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억울한 일을 당한 그 과부의 원한을 하나님이 풀어 주신다는 의미 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억울함을 풀어주는 존재가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여기서 세상이 미워하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8절입니다.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믿었사옵나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벧전 2장 19-20절입니다.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초대교회 시대 때 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한가지 때문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당시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아직 그런일은 없습니다만,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 때문에 직장이나 사회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미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똑같이 대항하라고 말씀합니까? 촛불 시위나 태극기 시위를 하라고 말씀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그냥 무조건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화가 나고 있는데 참는다는 게 어디 쉬운일 입니까? 제일 힘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분노가 막 일어나는데 참는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하다가 마침내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중의 한사람이 ‘자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라고 말하면 그말을 들은 배우자가 순종하겠습니까? 부부 싸움을 즉시로 그만두고 눈감고 기도할 배우자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 회개 기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당시에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을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참을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 라고 하는 말씀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부당하고 잘못된 상황을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나의 머리털 숫자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처해있는 상황과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마가복음 6장을 보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던 오병이어 기적이 나옵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예수님 자신은 따로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던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거친 풍랑을 만납니다. 제자들이 그 풍랑 때문에 밤새도록 고생을 하고 기진맥진해 있을때에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마가복음 6장 48절입니다.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 예수님이 언제 오셨습니까? 밤 사경입니다. 밤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의미합니다. 밤이 가장 깊은 시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왜 제자들에게 오셨나요? ‘힘겹게 노젓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그 현장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시간에 예수님은 산위에서 기도하고 계셨지만 풍랑을 만나 고통가운데서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산위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입니다. ‘34.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계셔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보시고 계십니다. 갑자기 내가 하는 사업에 풍랑이 일고 내 가정에 풍랑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계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가장으로서 어찌할줄 몰라서 힘겹게 인생의 배를 노젓고 있는 것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자녀의 앞날을 생각하며 어찌할수 없이 눈물만 흘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인간 관계의 아픔 때문에 너무 너무 힘들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참고 인내해야지, 내가 먼저 손해를 보아야지 하면서 인내하고 있는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럼으로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 고난과 슬픔을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변화 시키고자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되도록 일하고 계시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일을 행할수 있도록 그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힘쓰고 애를 써서 일을 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으시길 바랍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보고 알고 계시기 때문에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내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는 성도들을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인터넷에서 기독교 안티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그들의 소원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기독교를 이땅위에서 없애 버리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슬람 국가에 가면 훨씬 더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세상에 속한 자들이 왜 믿는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14절 후반부입니다. 14.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이세상은 엄밀하게 말하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공중 권세를 가진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공중 권세를 가진 마귀에게 소속되어 살아가는 이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속한 우리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입니다.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이세상에서 속한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자이기 때문에 이땅에 속한자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 속하였느냐 세상에 속하였느냐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느냐 교회를 다니지 않느냐에 있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예수님께 속했다라고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요?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경우에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가지고 이세상에 속하였느냐 예수님께 속하였느냐를 구별 할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으냐 담배를 피우느냐 피우지 않느냐? 카드 놀이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런 도덕적인 기준들을 가지고 ‘세상에 속한자이다 예수님께 속한자이다’ 라고 구분할때가 있습니다. 물론 맞을때도 있겠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께 속한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진리에 대해서 내가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본문 17절 후반부입니다. “17. ...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러니까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하신 일중의 하나는 이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8절 전반부입니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내 대신 죽으신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죽음 이후에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이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힙니다. 앞으로 이세상은 점점 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나마 예수님을 믿을수 있는 환경에 있을 때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입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힘든 일이 생기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내가 이땅에 속한자가 아니고 예수님에게 속한자라고 하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외국인들이 참 많이 살고 있는데 작년에 2백 5십만명이 넘었다는 통계자료를 보았습니다. 2백 5십만명 이라면 대한민국 전체인구의 약 5%에 해당되는 인구입니다. 그러니까 백명이 있으면 그중에 다섯명은 외국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사는 이 외국인들이 비로소 내가 한국인이 되었다라고 느꼈을때가 언제이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청국장을 마음껏 먹을수 있게 되었을때도 아니었고, 뜨거운 국밥을 먹고 나서 어 시원하다라는 말을 할수 있게 되었을때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비로소 한국인이 되었다라고 느꼈을때는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 사람들이 미워질 때 라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그 외국인들이 일본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그냥 미워지는 마음이 든답니다. 그럴때 ‘야 내가 진짜 한국 사람이 되었구나’ 는 생각이 든다 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은 나도 미워하고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게 되어질 때 그때서야 내가 비로소 대한민국 사람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것 우리도 좋아하게 되어있고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 우리도 싫어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왜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는데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핍박이 없는 천국으로 데려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구태여 저와 여러분을 이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게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에게 속한 자를 이세상에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주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주된 관심은 첫째로 우리가 이땅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15절입니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우리는 종종 인생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기도할때가 있습니다. ‘주님 이 세상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저를 이세상에서 그만 살아가게 해주세요.’ 사실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자신의 생명을 끝내고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시면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가 아닌 것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이세상에서 우리를 데려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많고 유혹이 심한 이세상에서 악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악은 사탄의 시험과 사탄의 올무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음란하고 죄악이 많은 이세상에서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날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가정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관심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러한 악의 세력인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적극적인 면이라 할수 있습니다. 17절입니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주님의 관심은 죄가 없는 곳에서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있고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만 이 죄많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구제를 한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거룩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갈 때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편 119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거룩하게 살아갈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만이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충만하게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어 주님께 속한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지키는 생활을 하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보냄을 받은 사명자로서 살아가는것에 있습니다.

18절입니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을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나를 위하여 대신해서 죽으시고 나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때 보혜사 성령을 내게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님께 속한자로 이세상에 있는 것은 예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이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세상에 나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생활의 현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배웁니다. 그리고 실제 싸움의 장소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요즘 종종 성도들을 보면 교회에서 싸웁니다. 교회는 배우고 휴식을 취하는 훈련 장소입니다. 싸워야 하는 전쟁터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님들은 반대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서 열심히 싸우고 세상에서는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수님이 보내셨기에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십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지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라옵기는 우리는 예수님이 보내셔서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지니시고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