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
<벧전 4장 7-13절>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요즘 뉴스를 보면 겨울 폭풍에 관한 기사를 많이 볼수 있습니다. 30년만에 경험하게 되는 기록적인 추위와 폭설로 인해서 미국이 꽁꽁 얼어 붙었습니다. 미국 전체 면적의 약 73%가 한파와 폭설의 영향권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미국 본토 48개 주 가운데 눈이 내리지 않은 지역은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3개주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이번 겨울 폭풍으로 인해서 택사스 주를 비롯한 7개 주는 비상사태를 선언했고 캔사스 주는 재난 상태를 선포했습니다. 저희들이 거주하고 있는 이곳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그래도 상황이 괜찮은 편입니다만, 며칠전에는 노스 캐롤라이나 브룬스윅 카운티에서 한밤중에 시속 160마일의 강력한 토네이도가 몰아쳐서 3명이 숨지고 10 여명이 다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스크린에서 볼수 있는 것처럼 토네이도가 지나간 주택들은 거의 형체도 남지 않고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매서운 한파와 폭설 그리고 토네이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종말은 갑자기 올수 있습니다. 그날 밤 토네이도가 지나갔던 그 집에서 잠자던 사람들은 그날이 이세상의 마지막이 될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럼으로 늘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오늘 이 본문은 로마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는 말씀은 우주적인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주적인 종말과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우주적인 종말의 개념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만물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4장 29-30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날에 일어날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날 환난 후에‘ 그 앞의 나오는 내용을 보시면 이 환난은 전쟁과 전염병과 기후변화로 인해서 겪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믿는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게 되면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영적인 혼란이 매우 심하게 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요즘은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거짓선지자들과 출처도 알수 없는 이단들이 인테넷을 통해 세상 종말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 어쨌든 이러한 현상이 있은 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 이 일어난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재난과는 비교할수도 없는 천재지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는 것은 사람을 유혹했던 악한 영들이 심판을 받는 것 때문에 공포에 떠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난후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 계시록 1장 7절을 보시면 이날의 장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이 구름타고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그동안 예수님을 부인하고 기독교인들을 멸시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곡하며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땅위에는 영원함이 없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아침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이세상도 반드시 끝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이러한 우주적인 종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종말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의 시작인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주적인 종말만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개인적인 종말도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를 산다고 하는 것은 그 하루만큼 내 인생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오게 됨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 비행기가 착륙하기 약 10분 전에 이런 안내방송을 듣게 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 여러 승객님들이 타고 계신 이 비행기가 10분후에는 목적지인 인천 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지금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용하고 계신 모든 비품들을 정리하시고 착륙할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식으로 안내방송을 하면 승객들은 나름대로 내릴 준비를 하게 됩니다. 벗어놓은 신발을 신거나 벗고 있었던 겉옷을 입고, 읽고 있던 책이 있다면 가방에 집어넣고 짐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이 오게 되면 우리 믿는 성도들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자신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90편 12절을 보시면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계수’ 는 숫자를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인생이 얼마 남았는가 헤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 이 우주적인 종말을 맞이할지, 그리고 언제 내가 죽게 될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허용하신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년 새해를 보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올해 성탄절을 맞이하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덜란드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요즘에는 스피노자가 한말이 아니라 마틴 루터가 한 말이다 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누가 말했던 그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제가 질문하는 것에 정확한 대답을 할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일 내일 지구 종말이 오고 그래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도 정원에 사과나무를 심으시겠습니까?’ 이 지구에 종말이 와서 여러분이 이세상을 떠나간 뒤에도 나무가 남아있도록 사과 나무를 심으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예’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낭만적이고 여유가 있는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을 소망에서 하는 대답일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주와 다음주에 만물의 마지막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자세에 대해서 본문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때인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7절입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물론 정원에 꽃을 심고 사과 나무를 심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기도입니다.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때가 오게 되면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숨으면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에 앞서서 그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10년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것 보다 차라리 10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기도의 중요성과 그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꼭 붙잡듯이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손을 붙잡았을 때 그 부모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부모님의 마음은 자기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손은 내밀어 하나님을 붙잡을 때 그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고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그당시는 로마 네로황제로 부터 엄청난 핍박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해나가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성도들 사이에는 배도가 일어나고 있어나고 있었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절 13절입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로마 네로황제는 그당시 로마시내에 일어난 대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들이 행한 범죄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그후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표현된 ‘불 시험’ 은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 시험’ 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불 시험을 당한 자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때에 나타납니다. 그때 불 시험을 견디어낸 성도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불이 있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의 생활을 견디어 낼수가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주님 때문에 받는 어려움과 고난을 부끄러움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명의 친구들이 풀부물이나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나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뛰어 넘어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입니다. ”13.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여러분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핍박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전쟁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길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능력으로 마귀를 이기고 고난을 이겨낼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더 강하고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고난을 이기고 누가 영적인 전쟁에서 이길수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으로 생각하고 축복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불과 같은 시험과 연단을 이결낼수 있는 힘을 공급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까?
1.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정신차린다’ 는 이 단어의 원어는 ‘소프로 내오‘ 인데 '군인들이 보초를 설 때 사용하는 말' 입니다.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것처럼, 누가 침입하지 않는가 긴장하며 생활하듯이 그렇게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그날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게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여기서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 라는 부탁을 하시고 조금 떨어져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날밤에 땀이 핏방울이 되시도록 결사적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시간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는 순간에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습니다. 거기에다가 베드로는 그날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이후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모습이 나올 때 보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모습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젠 베드로는 행동을 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이제 순교를 앞두고 쓴 베드로 전서 5장 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는 마귀가 잠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삼킬자를 찾으러 다닌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잘알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날 저녁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잠에 골아 떨어졌지만 단 한사람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유다입니다. 가롯유다는 제자들이 다 잠을 자고 있었지만 혼자 깨어서 우는 사자처럼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된 저와 여러분이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것처럼 정신차리고 기도를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정신차리고 기도할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어떻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합니까?
2.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근신이란 단어는 우리 말보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셀프 컨트롤(Self control)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근신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 단어는 ‘절제‘ 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제하여 기도하라’ 는 의미입니다. 모든 일에 절제를 하고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는 것, 수다를 떠는 것, 취미 생활 하는 것, 이런 것 저런 것 하고 싶은 것 다하면 기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기도할 시간도 없지만 이것 저것 생각이 많아져서 기도할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신 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다른 일을 줄이고 절제하고 기도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좀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엔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라 단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이번 기회에 단순하게 살아가는 패턴이 우리 몸에 익힐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절제된 삶을 살아야 기도 시간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을 받을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보다 더 아름다운 손은 없습니다. 기도하는 손보다 축복 받은 손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앞에 우리 인간이 두손을 모으고 기도할 때 하늘의 신령한 능력이 내려와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 받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다른 세상일에 절제하고 근신하여 기도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올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2.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8절입니다.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마태복음 24장을 보시면 마지막때에 나타날 징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사랑이 식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의 사랑이 식어집니다. 왜요? 돈과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절 2절입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마지막때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는 사랑하면서 남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자기를 사랑할줄 아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를 먼저 강조하고 그다음에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만이 사랑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고 사랑할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구태여 ‘내가 그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사랑할수 있습니다. 내 자식은 기도하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자식이 미운짓을 하고 자식이 똥 오줌을 싸도 다 챙겨주고 그 자식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내가 기도하지 않고서는 절대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라 말씀 하기전에 먼저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이하를 보면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사실 이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내용은 이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지키기가 힘든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 5장 39-41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이렇게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오른빰을 맞았을 때 왼쪽빰도 때려달라고 빰을 내미는 것은 힘듭니다. 옛날에 한쪽빰을 맞고 난후 다른 빰도 때려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흥부입니다.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가 놀부 마누라한데 밥주걱으로 한쪽 빰을 맞고 난후에 다른쪽 빰도 때려달라고 자기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그 흥부는 자기 형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밥주걱에 붙은 밥알을 먹기 위해서 다른 쪽 빰도 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쪽 빰을 내미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속옷을 달라고 했을 때 겉옷까지 내주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이땅에서 지킬수 있는 계명이 아니라 천국에서나 지킬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킬수가 없다면 예수님께서는 지키라는 말씀을 왜 하셨겠습니까? 이 산상수훈에 있는 내용은 우리가 지킬수 없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땅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런데 지킬수 있는 비결을 예수님께서 이 산상수훈의 비밀을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가르쳐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입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기도의 능력과 기도의 응답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통해서 이렇게 살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랑과 연결되지 않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 했기 때문에 얼마나 그사람을 사랑할수 있게 되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물론 내가 하루 한시간 두시간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 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사랑은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직적인 관계인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수평적인 관계인 사랑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것 따지지 않고 있는 것 무조건 퍼주기는 잘하는데 기도는 잘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수직적인 관계인 기도와 수평적인 관계인 이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이세상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저 만치서 들리고 있는 오늘날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성도가 가져야 할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인터넷과 유튜버를 보면 세상의 종말에 대해 성경의 이곳 저곳을 편집해서 종말론을 강해하는 설교자가 너무 많습니다. 정말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온 것은 맞습니다. 종말론을 강해하는 설교자들의 해석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말론을 강해하는 설교자들의 말이 맞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럴수록 세상 종말이 가까이 왔을수록 저와 여러분은 성경에서 권면하고 있는 성도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람, 저사람이 하는 말에만 마음이 쏠리지 말고 성경에서 세상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믿는 성도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종말이 가끼이 올수록 기본적인 신앙의 자세를 지키고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라옵기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온 이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면서 그리고 그 기도의 힘으로 사랑할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