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2)
nbsp;
<베드로 전서 4장 7-11절>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저희들이 살펴보았습니다만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 우주적인 종말과 동시에 저와 여러분의 개인적인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는 이때에 우리 성도들이 지녀야 할 자세는
첫째로 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7절을 보시면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8절입니다,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요? 죄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럼으로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오래 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기도를 함으로서 어떻게 사랑을 할수 있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하고 오래 한다 할지라도 나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 기도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올 때 피하라 도망가라 싸워라 라고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도하며 살아라 사랑하며 살아라 이렇게 평상시처럼 행동하며 살아갈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올 때 성도가 지녀야 할 자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대접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역시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신앙생활입니다.
9절입니다.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그런데 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고 나서 대접하라는 말씀을 합니까? 그것은 남을 대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삶의 구체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대접한다는 의미는 헬라어로 ‘필로 세노이‘ 입니다. 이 필로 세노이는 사랑 이라고 하는 ’필로스‘ 와 나그네 라고 하는 ’크세노스‘ 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이 바로 ’대접하는 것’ 의 원래 의미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그 당시는 로마 네로황제의 핍박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당시에 핍박을 피해서 다니는 성도들을 대접하고 또 복음 전도자들을 대접하는 일은 너무나 귀중하고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바로 나를 대접하는 일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 입니다.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이렇게 성경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아주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감독을 선출 할때도 그 선택기준의 하나가 바로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3장 2절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사람이 교회 목회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감독은 오늘날 목사를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은사 테스트를 하다보면 대접을 하는 은사를 가진 성도님들이 계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참 귀한 은사라 할수 있는데 평생동안 주어진 은사를 잘 사용할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13절입니다.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손 대접은 손님 대접의 준말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입니다.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손님 대접을 하다가 천사를 대접한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롯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가 천사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내년 이맘때에 너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 도시에 가는데 롯이 마침 성문에 앉아있다가 이 나그네를 대접 합니다. 그때 이 천사가 롯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될 것을 알려줍니다. 이 두 장면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을 대접하는 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 입니다. 특별히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와 여러분은 이 미국땅에서 나그네의 신분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국은 그동안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나그네 신분으로 이나라에 온 사람들을 잘 대접해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미국에 유학을 온 학생들 중에서 적지않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베풀어주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사실 적지않은 액수의 장학금 혜택을 받아서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될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 미국이 이렇게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나그네를 귀하게 대접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거주하고 있는 중국 조선족과 베트남 필리핀 몽골계통의 동남 아시아인들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너무 차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당하게 임금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쳐다볼 때 아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일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람들 끼리도 못배우거나 없거나 하면 무시하기 일쑤인데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대할때는 더 무시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은 나그네 사랑할 것을 말씀합니다. 성경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모두가 다 나그네 신분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에 있지 이땅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나그네 신분으로서 서로 대접하며 살아가기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다시보시면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원망없이 하고’ 대접하다보면 원망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한 두번 대접은 누구나가 다 잘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접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게되면 원망 불평이 나올수가 있게 됩니다.
몇년전에 이곳 샬롯 지역의 몇몇 교회에서 윤형주 장로님을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교회에 감사헌금을 했는데 4개의 봉투에 넣어서 드렸답니다. 각각의 봉투에 50불씩 넣어서 총 200불을 감사헌금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목사님이 권사님께 물어보셨답니다. “권사님 감사할일이 4가지나 있으신가 봅니다” 그러자 권사님이 대답하시기를 “예 목사님, 손자 손녀 4명이 저희 집에 놀러왔습니다. 그래서 감사해서 한 아이당 50불씩 감사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4개의 봉투에 각각 100불씩 넣어서 권사님이 감사헌금을 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또 궁금해서 권사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권사님 이번에는 감사할일이 더 많으신가 보죠” 그러자 권사님이 대답하시길 “예 목사님 손자 손녀가 마침내 떠났습니다”
아무리 귀여운 손자 손녀라 할지라도 오면 반갑지만 가면 더 반가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말도 있지 않습니까? ‘가는 손님 뒷 꼭지가 아름답다’ 이렇게 계속 대접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하지만 원망하면서 대접을 할바에는 차라리 대접하는 일을 잠시 쉬는 것이 낫습니다. 원망을 하는 순간 대접받는 사람도 대접하는 사람도 모두에게 축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접을 하되 원망은 없이 하면서 이 만물의 마지막때를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올때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4.봉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도 역시 평범한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10절입니다.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편안하게 주일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은 봉사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와 가정과 사회의 생활이 평화롭고 안전한 것 입니다. 저희 교회는 남 침례교단 소속입니다. 그리고 이 유니온 카운티에 위치한 유니온 뱁티스트 어소시에이션에서 무료로 대여를 해준 빌딩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저희들이 관리하지만 큰 나무를 자르거나 지붕이나 에어컨을 고쳐야 하는 전문가의 손이 필요한 일에는 유니온 뱁티스트 어소시에이션 소속 교회에 출석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와서 도와줍니다. 이러한 일은 저희 교회 뿐만 아니라 이 유니온 뱁티스트 어소시에이션에 소속된 교회들 마다 도움이 필요하면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힘을 합쳐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도와줄 일이 생길때는 어소시에이션 디렉터가 주로 이메일을 통해 요청합니다. 그런데 매번 자원봉사자가 너무 많아서 책임자가 미리 인원조정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실제적인 생활속에서 성경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이나라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봉사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을 벗어나서 남을 위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희생의 삶이 봉사입니다. 그럼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봉사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땅에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외려 섬기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 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인생은 섬김의 인생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선한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선한일을 하기 위해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입니다. 너무 너무 중요하니까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목적은 선한일을 위해서 인 것 입니다. 봉사의 일을 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선한일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성경을 잘알지 못했던 저는 대학생 시절을 낮에는 종이를 줍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가난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가르치는 야간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누구보다도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이 천국에 못가면 대부분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갈 것이다 라고 이런 교만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내 죄값을 치루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받게 됩니다. 구원을 위해 선한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된 자가 해야할일은 선한 일을 위해서‘ 라고 말씀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위해서 선한일을 한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봉사의 삶을 살 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것입니까?
1.은사를 따라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 해야 합니다.10절입니다.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얼굴을 각각 다르게 지으신 것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은사, 능력 행함과 방언과 예언의 은사 치유와 찬양의 은사 이렇게 사람들에게는 각기 다양한 은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하고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은사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는 모두가 다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가졌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은사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그냥 땅에 묻혀놓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앞에 갔을 때 책망을 더 많이 듣게 될 뿐 입니다. 얼마나 충성되게 사용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내게 맡겨진 것이지 내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주인이 내게 맡겼다라는 청지기의 자세로 은사 사용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자세 둘째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봉사해야합니다.
11절 전반부입니다.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설교와 가르침 예언 방언 치유 이런 사역들은 모두가 다 입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으로 봉사하는 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해야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전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생각과 내 철학을 말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들을 보면 준비를 별로 하지 않고 대강 요점만 적어서 강단에 올라가 30-40분 설교하시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다가 보면 자유로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철학이 전달되어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입술로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내 철학, 내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지 않도록 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고에 매이는 설교를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라고 하면서 맨날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처럼 봉사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봉사의 자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11절 중간입니다. “11.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해야 지치거나 시험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봉사의 목적이 11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왜 우리가 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11. ....이는(봉사를 하는 것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봉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봉사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믿으십니까? 봉사하는 목적은 내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대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인내하고 예수님 때문에 경배 찬양을 하고 예수님 때문에 헌금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한 모든 봉사와 일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을 나에게 보상이 되고 축복이 되어집니다. 바라옵기는 이 임목사 때문에 권사님, 장로님 때문에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봉사를 할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보람과 행복은 내가 얼마나 멋진 집에서 살았는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보람과 행복은 내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내가 얼마나 섬기고 베풀며 살아왔느냐에 달려있습니다.
1912년 엘리제 쉐핑 간호사가 우리나라 조선 선교사로 파견이 되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에서 20 여년동안 나병환자들 거지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다가 1934년 굶주림과 질병에 의해 하나님 품으로 안겼습니다. 한국 이름은 서서평 선교사이신데 자신의 시신마저도 병원에 기증한 이분에 관한 동영상을 잠시 보시겠습니다.(영상시청)
서서평 선교사가 조선에 온지 17년째가 되던 1929년에 안식년을 맞아 잠시 미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이 서서평 선교사는 자기가 1살 때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이 서서평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너무 기가차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의 모습이 완전 거지와 같구나.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우니 내앞에서 썩 꺼지라" 그래서 서서평 선교사는 집에서 쫓겨납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한 살때 할머니손에 자랐고 그리고 안식년때 만난 어머니로부터 찬 대접을 받았습니다. 평생동안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려 왔던 이 서서평 선교사 자신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입양해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선교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시겠습니까? ‘얘야, 네가 얼마나 멋진집에서 살다가 왔느냐? 네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모으고 살다 왔느냐? 네가 얼마나 많이 배워가지고 왔느냐?’ 아닙니다. ‘내가 준 그 은사 그 건강 그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다가 왔느냐?’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멋진 집과 멋진 차와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눈에서의 성공 일뿐입니다. 서서평 선교사가 메모지에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라는 내용은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만이 고백할수 있는 말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섬김' 에 있습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베풀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 눈에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멋지게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