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배우라 그리고 얻으라

Author
kgmcc
Date
2021-03-06 21:06
Views
27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30절

날짜 : 2021년 3월 7일

 

<마태복음 11장 28-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탈무드를 보게 되면 인생에 대한 세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인가하면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탈무드를 보시게 되면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직장에서나 가게에서나 교회에서나 관계없이 지금 현재 지금 만나고 있는 한사람, 한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내 모든 것을 다바쳐 사랑할수 있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바치신 예수님은 얼마나 행복하셨겠습니까? 또한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다 바칠수 있는 저와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이세상에서 누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배울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간에,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배울려고 하는 사람 그사람이 바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배움에는 나이를 초월합니다. ‘배우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년 청춘으로 살아갈려면 언제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삶의 현장에서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 할때까지는 2000번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기자가 이렇게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전구를 발명할때까지 2000번이나 실패를 했다는데 어떻게 그 많은 실패를 극복할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에디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라니요 저는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방법을 2 천가지나 알아낸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주변에 배울것이 참 많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10장을 보시게 되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수천리 길을 걸어왔던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배움에 대한 희생과 열정이 있어야 성공의 길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배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게 배우라’ 주님은 다른 사람들한테 가서 배우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배울 때 누구한테 배우는가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도둑한테 배우면 도둑이 되는 것이고, 과학자한테 배우면 과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우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나를 배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내게 와서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왜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만이 진정한 우리의 스승이십니까? 그것은 예수님만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유일한 대답이시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게 와서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이 이땅에 오셨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쉬게 하기 위함입니다. 28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죄악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참된 쉼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참된 쉼과 안식을 주시기 전에 먼저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라고 하는 것은 소가 수레나 쟁기를 끌거나 할때에 그 목덜미에 올려놓은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이 멍에를 메는 순간 그짐승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멍에라고 하는 단어는 억압과 속박을 의미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한 마리 소가 아닌 두 마리 소가 함께 멍에를 매고 밭에서 일을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어미소와 새끼소가 함께 멍에를 매고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끼소가 어미의 멍에를 매고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라’ 라고 하는 의미는 '훈련을 받아라' 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훈련을 받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군인들이 군사 훈련을 받을 때 교실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장소에서 땀을 흘리면서 훈련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추첨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고등학교마다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문교부 행정이 바뀌어서 처음으로 추첨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학교가 알류, 이류도 아닌 삼류 학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는 첫 번째로 저희들이 추첨을 통해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저희들에게 공부만 시켰습니다. 저희 선배인 2학년 3학년은 학교 수업을 마치면 그냥 집에 보내도 우리들은 학교에 남아 밤늦게 까지 보충수업을 해야 했습니다. 삼류학교를 일류 학교로 만들겠다는 교장선생님의 야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체육시간이 되어도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운동을 하면 학생들이 지쳐서 그다음시간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었습니다. 그래서 체육시간에도 교실에 앉아서 그냥 이론으로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축구나 야구나 풋볼 같은 종목의 롤을 교실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체육시험을 이론으로 쳤습니다. 예를 들면 축구는 한팀에서 몇 명이 뛰는 종목인가? 답은 11명이죠. 야구는 몇회까지 시합을 하는가? 정답은 9회, 이런 식으로 체육시험을 봤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체육시간에 밖에 나가서 공을 한번도 차보지 못하고 교실에서 이론만 배우고 이론으로 시험을 친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한 학기는 체육시험을 이론으로 쳤습니다. 2학기 첫 번째 시간에 반전체 학생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체육시간에 뛰고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을 해야지 교실에서 이렇게 배워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다음 주부터는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운동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훈련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안다 ’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야다’ 인데 이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그아내 하와와 동침함으로 가인을 낳았는데 이렇게 동침할 정도로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대로 이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반드시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맨 자만이 나를 배울수 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멍에를 매지 않은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을 배울수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멍에를 매지 않고 예수님을 배울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론적으로는 너무 잘압니다. 제자훈련을 받고 지도자 훈련을 받았으면 정말 예수님의 모습이 삶에 나타나야 하는데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이론과 지식으로만 배워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이 영어를 학교에서 십년가까이 공부를 해왔는데 왜 미국사람과 대화를 못합니까? 교실에서 이론으로만 배워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론과 지식으로 배우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멍에는 주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생각과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뜻을 품고 따라가는 것이 바로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아 이런것이었구나’ 라는 깨닫음속에서 성장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3년동안 함께 먹고 마시고 잠을 자면서 삶의 현장속에서 실제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능력에 있는 것이야 라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 귀신도 내쫓으시고 병자도 고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70명의 전도자를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음전도를 마치고 기뻐하면서 돌아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입니다.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이 복음 전도를 마치고 기뻐하면서 돌아와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저희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귀신보고 나가라고 명령을 하니까 귀신들이 다 쫓겨 나갔습니다. 야 예수님의 이름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흥분하면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동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했더니만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순종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입니다. 그럼으로 제자훈련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주님의 멍에를 맨 사람만이 주님을 배울수 있습니다.

좀전에 잠시 언급했지만 새끼소가 어미소와 함께 멍에를 매고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끼소는 무엇을 배우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엄마와 보조를 맞추어서 같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진짜로 힘들다라고 하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멍에를 같이 메었는데 가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면 새끼소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이 새끼소는 내가 어미소와 함께 방향을 같이 하고 보조를 맞추어나가면 일이 쉽고 가볍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은 바로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멍에는 힘들고 무거운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새끼소가 멍에를 매었을 때만 배울수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주님의 멍에를 맨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첫 번째는 온유한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이 온유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사람이 온유하다고 하면 온순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백이 없고 좀 나약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 온순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반대로 힘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그 힘이 잘 조절이 되어서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모세를 온유하다라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입니다.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힘이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그 힘을 잘 컨트롤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나간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을 온유하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주었습니다. 손바닥과 채찍으로 예수님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이 침뱉을 때 예수님도 같이 침을 뱉았습니까? 그들이 비꼬고 저주할 때 같이 대들고 저주를 했습니까? 아니죠? 주님은 그들이 그렇게 욕하고 수치와 모욕을 주어도 그들과 똑같이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힘이 없어서 그냥 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능력의 창조주 하나님 아들이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온유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예수님의 온유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입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옛날에는 양털을 깍을 때 양을 두 무릅사이에 끼워 가지고 양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 가위로 털을 깎아습니다. 그런데 그당시에는 가위가 요즘처럼 그렇게 잘 드는 편이 아니라 목자가 털을 깎다가 때로는 양털이 뽑히기도 하고 또 양의 살에 상처가 나기도 했습니다. 옛날 저희들이 중, 고등학교에 다닐때는 머리를 빡빡 깍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님이 바리깡이라고 하는 이발 기구를 가지고 제 머리를 깍아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깡을 사용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제 머리가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뽑혀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날과 날 사이에 머리가 끼여서 잘라지지도 않고 뽑지도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 머리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그 오래된 바리깡으로 제머리를 깎아주실때는 저는 고문을 당하는 죄수의 심정으로 보자기를 목에 걸치고 의자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목자가 양털깎기 할 때 양도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도 양은 가만히 있는다고 합니다. 그게 양 이래요. 그런데 이런 양처럼 훗날에 이땅에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도 그럴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한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이른 아침에 짐승처럼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십자가에서 화를 내시거나 큰소리로 저주하지 않으시고 용서의 기도와 함께 죽으시고 우리가 진 죄의 값을 치루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온유한자를 찾아보기가 정말 힘듭니다. 현재 정치 지도자들이 온 나라 국민들의 본이 되어야 하는데 이곳 미국이나 한국을 보면 온유한 사람들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말이 너무 거칠고 자기 당이 아니면 죄다 원수 취급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너무 살벌합니다. 그런데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강함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이 이기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온유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입안에는 혀와 이빨이 있습니다. 혀는 부드럽고 이빨은 강합니다. 그래서 이 부드러운 혀가 평상시에는 강한 이빨 때문에 종종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밥을 먹다가 이빨에게 깨물려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을 너무 빠르게 하다가, 아니면 열 받을 때 컨트롤이 잘 안되어서 종종 이 부드러운 혀가 강한 이빨에 의해서 상처를 받을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최후의 승리는 누구입니까? 강한 이빨이 아니라 부드러운 혀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게되면 이빨은 하나씩 둘씩 다 빠집니다. 그런데 혀는 빠지지 않습니다. 혀가 빠진 사람 보셨습니까?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온유하면 손해 보는 것 같고 패배하는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은 온유한 자가 반드시 승리를 합니다. 부부 싸움을 할때도 보면 큰소리로 화를 내고 재떨이를 공중으로 날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당시는 재떨이를 날린 사람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후에 보면 그사람은 한동안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온유한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깁니다.

 

두 번째로 배워야 할 주님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29절 전반부입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겸손하니’ 이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겸손하지 않으면 멍에를 맬수 없습니다. 멍에를 맬려면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도 온유처럼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한 주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겸손과 유유하신 주님의 이 마음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이 마음은 주님의 멍에를 맬때만 우리가 배울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29절 하반부에 있습니다. ‘29.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왜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고생시키고 힘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쉼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멍에는 억압과 속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멍에와 쉬는 것이 같이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멍에를 매면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지 쉼을 얻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의 멍에는 매면 맬수록 억압과 속박이 되지만, 주님의 멍에는 매면 매는 만큼 마음의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만큼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는 것 말은 쉽지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생각과 내뜻을 내려놓고 주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잘 모르니까 순종해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갈릴리 바다가 있는 지역에서 태어나 어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 고기가 잘 잡히는지 너무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떠있는 그시간에 바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상식으로 볼때는 허탕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고 그물을 던졌던 것에 비하면, 한번 더 깊은 바다쪽으로 나가서 그물을 던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일입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주님의 멍에를 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 내 몸이 너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일은 내 경험으로 볼때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피곤한데 헛수고 하고 시간낭비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집에 가서 잠자는 것이 더 낫다고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를 메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생각해보세요.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는 것보다는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한번 던지는 것이 훨씬 더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내가 내 멍에를 지고 있었을때는 내가 아무리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 못잡았지만 주님의 멍에를 지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잡았던 것입니다. 내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갈때는 종종 손해보고 자존심 상할때가 있을수 있습니다. 주님이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시지만 현실적으로 따르기는 어려울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과 현실사이에서 갈등을 할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힘들고 무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별로 소용이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수고를 하지만 그 누구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수고와 희생이 따르기도 합니다. 손해가 되고 자존심이 상할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멍에를 매고 나를 배우고 순종하면 응답을 받고 소원 성취해주겠다‘ 가 아닙니다. ’마음이 쉼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그냥 있을수 있습니다. 환경은 여전히 나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코로나 팬데믹을 겪어오면서 그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의 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씩 교회에 오지 못하고 집에 계신 성도님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분들이 가장 소원하는 것이 마음의 쉼을 얻는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내 몸이 편안하고 내게 물질이 있다고 해서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주 두주, 한달 두달이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내마음에 쉼과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쉼이 있고 평안이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우리 마음에 쉼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내마음에 쉼을 주십니다. 먼저 내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나서 환경을 변화시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지금 제 환경을 바꾸어주세요.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그래서 제가 쉼을 얻고 평안을 가지게 해주세요.’ 주님은 내마음에 쉼이 먼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안식과 평강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그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감사에 따라서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간단히 정리합니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 어느때보다 메마르고 힘겨운 생활의 연속입니다. 이럴 때 저와 여러분은 가장 먼저 주님의 멍에를 메워야 합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따라 가다보면 주님이 지니고 계신 그 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니신 그 마음이 겸손함과 온유한 마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공부해서 알고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것입니다. 반드시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주님의 그 마음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문제가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저와 여러분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이 내가 귀찮고 내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할지라도 먼저 주님의 멍에를 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니고 계신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어떠한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쉼을 가지고 더 이상 힘들지 않고 보다 쉽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