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Author
kgmcc
Date
2021-03-13 23:37
Views
22
본문 : 베드로 전서 1징 3-7절

날짜 : 2021년 3월 14일

 

<베드로전서 1장 3-7절>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새해가 바로 얼마전인 것 같은데 벌서 3월달 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하는 1월달에는 모든 사람들이 소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6월달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주의자가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12월달이 되면 모두가 다 허무주의자가 된다.’ 소망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을 깨닫게 되고 나중에는 허무한 감정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3월이니까 아직 소망주의 자가 있을수 있겠고 벌써 현실주의자가 되신 성도님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망주의자가 되거나 현실주의 자가 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벌써 허무주의자가 되어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허무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본문 3절 후반부입니다. ‘3.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 을 영어 성경으로 보시면 ‘Living hope’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희망’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그냥 소망이 아닙니다. 그냥 희망이 아닙니다. 살아았는 소망이요 살아있는 희망 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그 소망은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나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전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베드로 전서가 기록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당시 로마에서 일어났던 어느 한 큰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AD 64년 7월 18일 어느 한 기름 창고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초기에 진압되지 못하고 로마 온 시내로 번지게 되면서 대화제로 변하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이 로마의 대 화제를 ‘Great fire of Rome’ 이라고 부릅니다. 이 로마의 대 화재로 인해서 그당시 로마 도시의 14 구역 중에서 10 구역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화재는 그당시 네로 황제가 로마시를 다시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 일부러 방화를 했다고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네로 황제는 자기를 원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민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기독교인들이 방화를 했다 라고 하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당시 수많은 기독도인들이 잡혀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로마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 바위굴속에 들어가 피신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 이렇게 숨어 지낼 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베드로 전서 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라는 지역 이름이 나옵니다. 지도에 보시는 것처럼 모두가 다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당시는 소아시아(Asia minor) 라고 불리었지만 지금은 터키 나라입니다. 성경을 보다보면 '아시아' 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그 아시아는 우리나라가 속해있는 아시아가 아닙니다. 종종 이단들이 성경에 나오는 ‘아시아’ 가 한국이 속해있는 아시아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아시아’ 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현재 터어키 나라로 아시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 여러 지역 이름들 중에서 특별히 갑바도기아 지역을 살펴볼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 구글에서 갑바도기아라는 단어를 쳐보시면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네로 황제의 핍박을 피해서 바위굴속에서 공동생활을 했던 자료들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동굴은 20층 깊이까지 굴이 파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가면 나올수 있는 길을 몰라서 나가지 못할만큼 여러갈레의 길이 만들어져 있고 또 그만큼 깊이 들어가 있는 자료들을 볼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갑바도기아에 피신을 온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시 세상 구경을 하지 못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녀와 자녀의 자녀들도 이렇게 동굴에서 살아가다가 천국으로 가게 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햇빛을 쬐고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포기하고 두더지처럼 땅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절입니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살아있는 희망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사도 베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숨어 살고 있는 그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지금 저와 여러분은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한달, 두달 늦어도 세달이면 진정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이렇게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현재 백신이 공급되고 있지만 변이 코로나가 나오고 있어 안심할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다행이 백신이 효과가 있어서 코로나가 종식된다 할지라도 이전과 같이 정상적인 분위기로 돌아오기에는 아직도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시간 그당시 바위 굴속의 어둡고 답답한 환경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기를 원했던 산소망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들도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 있다할지라도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이유는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셨다’ 는 것은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그앞에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마암아’ 입니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영적인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영적으로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게 된 존재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때에 성령을 우리의 심령에 보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입니다. 13.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복음을 듣고 또한 믿었을 때 약속해주신 성령이 믿는 사람의 심령에 들어와서 인을 쳐주십니다.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너는 내소유이다’ 라고 하는 마크를 새긴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가 진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이 믿는 사람들의 심령에 들어와 인을 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이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을 때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은 이세상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가치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 소중합니다. 이세상이 우리를 붙잡아 놓기엔 우리의 존재 가치가 너무 소중하고 아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땅위에 어떠한 상황속에 있다 할지라도 산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힘든 상황속에서도 산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는

두 번째로 하늘나라의 기업을 우리가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문에서 경제난을 읽어보게 되면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라 그런지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바로 ‘기업‘ 입니다. ‘기업이 잘된다’ ‘기업이 망했다‘ ’기업이 합병했다‘ 이렇게 기업에 대한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특별히 최근에는 30, 40년 전에 이곳 미국으로 이민을 오셔서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셨던 재미 교포들이 이번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동안 일어났던 숱한 어려움과 힘든 상황들을 잘 견뎌왔는데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견디어내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게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입니다.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와 자신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빼앗김을 당할 때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화를 내었나요? ’기쁘게 당한 것은‘ 기쁘게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다음에 나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와 자산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들은 자기들에게 더 낫고 영원한 소유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기업(유업-inheritance)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 기업의 특성을 본문은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썩지 않고, 썩지 않는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더럽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한 기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쇠하지 않는 기업 입니다. 영원한 기업을 의미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비판 할때 주로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교회 성도들은 너무 기복 신앙생활을 한다 는 것입니다. 너무 복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비판은 너무 천국만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기복적인 싱안생활 즉 복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비판은 상당한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교인들이 지나치게 세상적인 축복에만 매달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비판은 상당한 부분은 맞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교회 성도들은 눈앞의 현실을 소홀히 하고 천국만 바라보고 살아간다고 하는 비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비판은 정확한 평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교인들이 기복 신앙에 빠진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 사실은 천국에 대한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천국을 당신은 소망합니까?’ ‘당신은 천국을 믿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모두가 다 예 라고 대답을 합니다. 천국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좋아하고 다 소망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천국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마치 이땅위에 삶이 전부인 것처럼 눈앞의 이익에 목매고 바둥바둥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정말 천국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이세상에서 조금 못 살면 어떻습니까? 이세상에서 좀 손해보며 살아가면 어떻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기복신앙에 빠지는 것은 사실은 천국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자의 밥이 될 것을 알면서도 찬양을 부르며 로마 원형 경기장안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담대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갈수 있었던 이유는 단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는 천국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천국신앙이 있을 때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게 됩니다. 지금은 좀 손해를 보아도, 지금은 좀 억울하고 원통해도, 지금은 내속에 열불이 나도 저 천국에 나를 위한 영원한 것이 준비되어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담대하게 이겨낼수 있는 것입니다.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가는길에서 만나게 되는 조그마한 어려움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다’ 그래요. 우리나라에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향으로 가기 때문에 도로가 막혀서 많은 고생들을 합니다. 그때 차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할 것 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이게 마지막이다.’ 그런데 그 다음해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또 갑니다. 왜요?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럽다해도 고향에 도착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저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지금 내가 가는 이길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 이 고통은 견딜만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믿는 성도들에게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 기업에 대한 약속 때문에 아픔과 고통이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힘든 상황속에서도 산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

세 번째로 고난은 내게 유익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이 오게되면 아픔과 손해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함도 있습니다. 그 유익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믿음이 강하게 되고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이 오면 넘어지고 망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고난은 그 사람의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이렇게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을 만나면 우리는 근심을 합니다. ‘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근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병자 이거나 아니면 하나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저는 절대로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절대로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그사람을 피하고 멀리했습니.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요 사람이라면 근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심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깐입니다. 잠깐 근심하는 것입니다.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왜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까? 7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불과 같은 시험을 견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날 그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시험과 고난이 주는 유익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을 만나게 되더라도 잠시 잠깐의 근심이 있을수 있지만 결국에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견딜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두려워 하고, 다 걱정하고, 다 염려하고 그리고 어쩔줄 몰라 하고 있는데 나만은 당당하게 살아간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그 마음자세로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통해 얼마나 영광 받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제 잠시후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과 고난을 만났기 때문에 얻을수 있는 유익함인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상급도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시련을 만나게 되거든 나는 복있는 자이구나 라는 믿음으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옛날에 농부는 쭉정이와 알곡을 나누기 위해서 키를 사용했습니다. 쭉정이와 알곡이 섞여있는 곡식을 키에 담아서 위, 아래로 흔들어서 분리시켰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쭉정이 성도와 알곡 성도를 키에 담으십니다. 그리고 키를 두 손으로 잡으시고 위, 아래로 흔드십니다. 그래서 쭉정이와 알곡이 위로 솟구치게 될 때 만나게 되는 바람으로 인해 쭉정이는 키 밖으로 떨어지고 알곡은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사랑했던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외로움과 고독한 인생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주님이 키를 드시고 위 아래로 흔드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시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럴수록 알곡인 우리는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해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픔과 고통속에서라도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과 같이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불어오는 온갖 종류의 바람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하심이 있다고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심으로 주님과 함께 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정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은 세상사람들이 가진 소망과는 다르게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산 소망입니다.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 가진 것이 산 소망인 이유는 첫째 우리는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서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신분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사람이지 이땅위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신분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이세상에서 힘든일이 있어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 받은 사람들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결코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기업을 약속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 이 시험과 이 고난이 주는 유익함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과 시험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함도 없습니다. 불과 같은 시험과 고난이 있고 그것을 견디어내었기에 주님이 내게 주시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지금까지 이런 저런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산 소망을 가지고 아땅에서 살아가시는 동안 더욱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