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Author
kgmcc
Date
2021-04-02 11:55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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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9장 23-30절

날짜 : 2021년 4월 2일

 

<요한복음 19장 23-30절>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즈음 이곳 미국에서는 총격사건이 이전 보다도 더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로서리에서 샤핑을 보다가 그리고 스파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총알을 맞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신상 소개를 뉴스를 통해 듣게 됩니다. 총격 사건으로 인해 죽은 사람과 아무관계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상이나 가족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면 마음에 아픔이 옵니다. 하지만 시간과 환경의 차이가 있을뿐 인생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전 오늘 이스라엘 골고다 언덕에서 한 분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 죽음은 불가피하게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을 한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피하고 피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할수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에 대한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영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약 2천여년 전 오늘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약 2천여년 전 이날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매달리시고 오후 세시에 운명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당시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었던 시세로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심판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는 처형이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처형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처형은 바로 사람을 서서히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두려움과 육신의 고통이 함께 어울려서 죽어가게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형벌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를 성경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이유는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받으신 저주는 우리 인간들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게서는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입니다. “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 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23절과 24절 말씀을 보시겠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님 당시에 죄인들을 사형 집행 할때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네명의 로마군인들이 한 조가 되어서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위에까지 호송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까지 집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당시 사형을 집행하는 로마군인들에게 한가지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사형당하는 자의 소지품을 나누어 가질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요즘은 사형수가 입고 있던 옷이나 신발 같은 것을 가져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옷이나 신발이 너무나 귀했기 때문에 가질수만 있다면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명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소지품 한가지씩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머리를 싼 수건(터번), 허리띠, 신발 그리고 몸을 감는 겉옷이었을 것이라고 성경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속옷이 하나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기 때문에 네 부분으로 짤라서 나누면 별로 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해서 이긴 사람이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지 한 10분에서 20분 정도이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못박힌 손과 발목 에서부터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십자가 밑에서는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을 우리는 쉽게 추측해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러한 일이 있게 될것을 이미 일천년 전에 기록된 시편 22편 18절에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28편 18절입니다.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변호해주시는 장면이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나옵니다. ”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다 벗기고 예수님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피를 흘리고 있는중에도 마지막 남은 자기 속옷을 가져갈려고 제비뽑기를 하고 잇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었을때에 주님은 성령을 우리 심령속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입니다.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사실 저와 여러분도 로마병정들처럼 내가 하나라고 더 가져가는 일에 관심이 있는데 이런 나를 위해 성령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시고 성부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러한 사실을 믿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예수님을 믿기 이후는 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내용대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관이 바뀌고 우리의 관심이 바뀌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자기가 그동안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유치하게 여겼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면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은 내가 남보다 하나 더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것 나도 좋아하고 예수님이 멀리하시는 것 나도 멀리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내가 목마르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시편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또한 이 말 한마디에 다른 모든 고통이 다 담겨져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옛날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만나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광야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속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목이 마르니까 이런 축복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를 욕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목마름의 고통앞에서는 모세도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필요 없고 만나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목마름의 고통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지옥의 형벌이 곧 목마름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여러 가지 고통중에서 가장 무섭고 괴로운 고통이 바로 목마름의 고통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시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비유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입니다. 24.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물 한모금도 아닙니다. 그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에 한방울 떨어트려 주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은 불꽃가운데 뜨거워서 당하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목이 말라서 당하는 고통이 훨씬 더 괴로운 것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이 지옥의 고통은 가상적인 세계가 아니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이 지옥의 형벌을 대신해서 받으셨습니다. 지옥에서 받아야 한 형벌을 실제로 받으셔야만 우리의 죄값이 지불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실제로 목 말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여전히 목마릅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지고, 아무리 좋은 집을 가져도 우리 인간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예인과 부자가 자살을 하고 정치인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그럼으로 주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속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목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가 자기 고향에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 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이 지고 온 물통안에 조그마한 나무토막하나가 있는 것이 보여서 성 프란시스코가 물었습니다. ‘이 물통안에 왜 이렇게 나무조각이 들어있느냐?’ 그러자 하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물통에 물을 담아서 가져올 때 나무 조각을 물위에 넣으면 물이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물이 밖으로 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나무토막을 넣지 않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는 물이 반 통 밖에 안될 때가 많습니다." 이 하인의 설명에 성 프란시스코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래 맞다. 우리 인간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절망해서 흔들리고 실패해서 흔들리고 이렇게 흔들리고 출렁거릴때 십자가라는 나무조각을 던져넣으면 흔들림을 극복할수 있을 것이다‘ 그래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름의 고통을 맛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실패와 절망속에서 두려움의 풍랑이 일어나고 있을 때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 마음의 풍랑을 잠잠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름의 고통을 맛보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흔들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그 고통을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주님의 십자가를 내 심령의 그릇안에 간직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더 이상 목마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마지막 30절입니다.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지 6시간이 될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그 영혼이 돌아가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 단어는 아시다시피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입니다. 이말의 의미는 ‘빚을 다 갚았다, 값을 다 지불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으로서 우리인간이 진 죄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마 27:50)이나 마가복음(막 15:37)을 보시면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다" 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 요한은 크게 소리 지른 내용이 바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ᅟᅵᆺ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마태와 마가 보다 요한은 십자가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당시 다른 제자들은 겁이 나서 십자가 멀리 떨어져서 몰래 보고 있었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다이루었다’ 라고 크게 외치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길은 알고서는 감히 갈수 없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도 땀이 핏방울이 되시도록 기도하시며 힘들어 하실 정도로 가기가 정말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 그길을 가신 것입니다. 왜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저 조그마하게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숨쉬기도 힘들고 곧 숨이 넘어가는 순간인데 입을 벌려 말하기가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큰소리로 외치신 것입니까?

그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숱하게 마음의 고생과 육신의 고생을 당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하나님 앞에 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이 솟구쳐 올랐던 것입니다. "다 해냈구나. 드디어 해냈구나! 이제사 인간들이 진 빚을 내가 다 갚았구나‘ ’다이루었다‘ 라는 외침 속에는 이런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기쁜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놓은 그순간은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다 이루었다’ 라는 이 말씀속에는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 계시록에 있는 성경의 모든 역사가 이순간에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전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시리라라고 예언을 했던 그순간이 바로 이순간에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루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구나가 다 하나님앞에 갈수 있도록 지성소의 천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천국의 문이 열리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그냥 도저히 지나칠수가 없어서 마지막 힘을 다해서 큰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만이 경험하게 되는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이렇게 피 흘려 죽음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인들이 이제 십자가의 능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온 인류에게 알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준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의 사랑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이세상에 없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기 손에 못을 박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직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만 박았는데 그사람은 못을 다 박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치고 기절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육신의 고통보다도 마음속에 일어나는 두려움에 대한 고통이 더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두려움을 온전한 정신으로 다 감당하셨습니다. 이러한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없는 사람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도망 가버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녀를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는 엄마처럼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십자가에서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세 개의 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데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그래요.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어놓으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왜요?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야만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확실하게 들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두명의 제자들중에서도 오직 요한만이 ‘다이루었다’ 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전해줄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가 복된 자리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을 때 지금은 눈물과 한숨이라 할지라도 소망과 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는 힘을 얻을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성 금요일 이날처럼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저와 여러분에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남은 생에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에서 생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