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소식을 전한 사람들
<마가복음 16장 1-11절>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지나온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인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 신학자가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위대한 역사라 할수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 중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세상에 가장 많은 것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저와 여러분은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특별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진짜로 특별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될 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전파되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중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복된 소식중의 복된 소식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첫열매 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첫열매가 맺히게 되면 나중에 그 첫열매가 똑같은 종류의 열매가 수없이 맺히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열매로 사과가 맺히게 되면 나중에 똑같은 사과가 수없이 맺히게 되고 첫열매로 복숭아가 맺히게 되면 나중에 똑같은 복숭아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첫열매가 되셨는데 부활의 첫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처럼 똑같은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5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때에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믿는 성도들이 첫열매인 예수님처럼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이 육신이 죽게 되어도 다시 부활해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된 소식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함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인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들입니다. 아주 평범한 여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1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두었다가’ 그러니까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해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입니다,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먼저 보이시니’ 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누구에게 먼저 보이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 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었던 죄 많은 여인이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향유를 부은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학자들마다 같은 사람이다,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입니까? 성경이 대답해주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냥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정말 궁금하시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질문해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지만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9.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막달라 마리아가 고침을 받은 이후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월마트나 그로서리 가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여인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져볼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들에게 먼저 부활의 소식을 전하지 않으시고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며 따랐던 제자입니다. 도마같이 매사에 의심하고 시시비비 따지는 제자에게 부활의 소식을 먼저 전해서 이 도마 한 사람을 바꾸어 놓으면 제자들 간에 분위기가 달라질것이고 그래서 복음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전파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나 요한이나 도마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물론 베드로나 도마도 평범한 사람이지만 이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나 도마에 비하면 더더욱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맨 먼저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친구 여인들과 함께 부활의 소식을 전하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평범했지만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평범한 사람이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일꾼이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예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입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지금 예수님은 열두제자들과 함께 복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두제자들만 함께 하신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시면)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막달라 마리아가 나옵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과 열두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과 열두제자들을 자기의 소유로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2절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어떤 사람은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병 고침을 받았던 여인들입니다. 한마디로 이 여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섬기면서 주님의 일을 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댓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 예수는 말이야, 좀 이상해, 창녀를 좋아하고 사기꾼과 같은 죄인들과 가까이 하면서 사귀는 친구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당시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 과 사두개인들과 논쟁하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들의 고소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지셔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예수님께서 댓가를 지불해야 했던 그렇게 귀한 것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이 여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끝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입니다.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계속해서 그다음절 41절을 보시면 이 여인들에 대해 부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여자들도 많이 있더라’ 십자가의 현장에 끝까지 찾아왔던 사람들은 평범한 여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천국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을 종종합니다. “여자들이 참 많겠구나” 그런데 사실 천국에 가면 남자 와 여자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다 천사처럼 됩니다. 그런데 이땅에 있는 동안에 여자의 신분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남자의 신분으로 살아간 사람보다는 천국에 들어간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놔둔 곳까지 따라갑니다. 마가복음 15장 47절입니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예수님의 시체를 둔 곳을 이 여인들은 보았고 그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날은 토요일 안식일이라 쉬고, 안식일 다음날 매우 일찍이 이 여인들은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옵니다. 그때의 분위기는 잘못되면 예수와 한패라고 하는 죄목으로 잡혀서 감옥에 들어갈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입니다. 왜요?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들이 정말 값비싼 은혜에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벌이라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이튿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간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온갖 부끄러움과 조롱을 받으시다가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들처럼 저와 여러분도 자신의 생명으로 나의 죄값을 지불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은혜인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이 여인들이 왔던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지금 이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했던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쉽게 알수있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두손들고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이렇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 아무 말도하지 못하더라’ 얼마나 놀랐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겠습니까? 이 여인들 뿐만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뭐예요?) 믿지 아니하니라" "믿지 아니하니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시면 두 제자가 자기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두제자는 고향으로 가던 길을 그만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13절입니다. "13. 두 사람이 가서 (엠마로 고향마을로 가다가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입니다)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그다음 본문 14절입니다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훨씬 더 상식인 것입니다. 그래요. 부활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고 지성으로 분석이 되어져서 믿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돌아가보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그 자리에 갔고 그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부활을 믿은 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모습을 보면서 믿어서는 안됩니다. 믿는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될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들과 제자들도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믿게 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이세상의 역사는 모두 헛것이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이세상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2의 아담인 예수님을 보내기 위한 계획이 바로 의미가 있는 역사 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을 통해 그리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 만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수 있었던 것은
세 번째로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6. 청년이 이르되(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입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계속해서 청년의 모습을 가진 천사가 말합니다. 7절입니다.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기에 중요한 동사가 둘이 나오는데, 하나는 '가서'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쭉 계속해서 보시다가 마지막부분에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에서 ’하라‘ 그러니까 '말하라' 입니다. ”가서 말하라” 영어 성경을 보시면 'Go and tell…'.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가서 말하라‘. 그러니까 천사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먼저 가서 기다리실 것이니까 갈릴리로 가서 만나라. 이런 사실을 가서 전하라’ ‘가서 전하라’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먼저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게 될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는 예루살렘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까지는 걸어서 2-3일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만나실려면 그냥 예루살렘지역에서 만나시지 왜 구태여 갈릴리에 가서 만나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지역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지역은 삶의 터전입니다. 제자들이 자라고 생활하던 곳은 갈릴리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거기서 만나길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 교회에서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매일의 삶의 터전에서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가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한두 시간정도 만나고 헤어지길 원합니다. See you next sunday' 입니다. 조금 믿음이 더 있으신 성도는 ’See you this wednesday' 입니다. 그보다 더 믿음이 있는 사람은 ‘See you at 새벽기도’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 생활하는 곳에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전할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일상생활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길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라는 말을 전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삶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남이 말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이 믿지 못해도 책망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일상 생활속에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고 살아갈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고 절망가운데 있지만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고 살아갈 때 주님은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는 지금은 눈물이고 지금은 아픔이라 할지라도 그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일상생활 터전에서 만나시길 원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시는 삶을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간단히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맨처음 경험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평범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럼으로 평범한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믿고 전할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는 여인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값을 지불해주신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서 믿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활의 능력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기도나 찬양을 통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주님을 만나길 사모할 때 주님은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본분에 나오는 이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가서 만나기를 원하는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속에서 주님은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일상생활속에서 주님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시길 원하십니다. 바라옵기는 지식이나 이론이 아닌 삶의 현장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 부활의 주님을 간증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