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우리 서로 필요한 이유

Author
kgmcc
Date
2021-05-09 00:27
Views
34
본문 : 전도서 4장 9-12절

날짜 : 2021년 5월 9일

 

<전도서 4장 9-12절>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지난 수요일 설교할 때 서두에 잠시 언급을 했던 내용입니다만 몇 년전에 월스트릿 저널이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내용의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95퍼센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은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이 성공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90퍼센트이었습니다. 이 설문조사는 두가지 대답을 할수 있는 복수 설문조사 방법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대답을 하나로 정리해본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곧 성공한 인생이다’ 라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원합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인생에서 성공한 것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사실 가정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정의 행복을 원합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당신의 가정은 행복합니까?’ 라고 물으면 “예,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가정의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월스트릿 저널이 설문조사를 한 두 번째 질문에 대답이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월 스트릿 저널이 이렇게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당신은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는 사람은 20퍼센트 이었습니다.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적게 나온 숫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행복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너무 적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까? ’라는 이 첫 번째 질문에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 사람은 16% 로 6위 그리고 명예를 얻는 것이 성공입니다 라고 대답한 사람이 8%로 7위 제일 마지막 순위 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장 많은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한다 가 95%이었고 1위 순위 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 순위로는 90퍼센트가 명예를 얻기 위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가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고 싶고 원하지만 실제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그일에 시간과 희생을 하고 투자하는 시간이 적다는 것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내가 돈을 벌고, 내가 높은 신분에 도달하게 되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고 높은 신분으로 올라가기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행복은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내가 높은 신분에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하고 좋은 환경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지금 현재 3만불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1961년도에는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GNI)은 백불도 안된 93달러 이었습니다. 그리고 1977년도에 천달러 이었고 1994년도에 만달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도에 2만달러가 되었고 2018년도에 3만달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30년전에 비해서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0배가량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나가 국내 총생산(GDP) 규모는 2019년도까지 세계 12위 이었는데 작년에는 10위 그리고 올해는 9위 차지하게 될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30년 전 보다 20배 가량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경제가 성장 한만큼 행복지수가 더 높아졌습니까? 작년 3월 20일 세계 행복의 날(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를 맞이하여 유엔의 한 자문기구인 SDSN 에서 세계 153개 국가에 대한 행복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행복지수 10점 만점에 5.872점을 맞아서 6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행복은 꼭 돈이 많고 경제생활이 높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이러한 요소가 넉넉하다고 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올바른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은 가정의 행복은 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행복은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그리고 사람들과 바른관계 그리고 물질과 바른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관계, 사람들과 바른관계 그리고 물질과 바른관계' 이 세 관계가 올바르게 잘 되어 있으면 인간은 누구나 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과 행복한 교회 생활과 행복한 사회생활을 해나갈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먹을수 있었지만 선악과는 먹지 못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볼때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살아갈수 있는 피조물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 관계가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였고 이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는 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사람과의 관계

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홀로 사는 모습이 좋지 못해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때에는 모든 것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아내인 하와에게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 라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자 아담과 화와의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저 여자 때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입니다.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장 12절)

오늘날 깨어진 가정들의 특징이 뭡니까? 남편은 아내 때문이라고 말하고 남편은 아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부부의 관계가 사랑과 섬김의 관계가 되지 못하고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래된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낱말 맞추기 퀴즈 게임이 있는데 어느 한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그 게임에 참가를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설명해야 할 단어는 ‘천생연분’ 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설명을 합니다. ‘당신과 나처럼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부부를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지?’ 그러자 할머니가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원수’ 할머니의 대답에 당황을 한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니 두글자가 아니고 네 글자가 있잖아’ 할머니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합니다. ‘평생 원수’ 할머니가 원수라고 말했지만 처음부터 원수라고 생각하며 결혼 했겠습니까? 처음에는 모두가 다 좋은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서로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가 다른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고 가정 교육 형태도 완전히 다른 환경속에서 자라왔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합니다. 내가 내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내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성내지 아니하는 것’ 이라는 성경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인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가정이 가진 진정한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부부간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 관계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 물질과의 관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책망하신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물질에 대하여 즉 돈에 대하여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인이 두주인을 섬길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가 없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비웃습니다. 14절입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돈을 사랑했는지 돈을 섬기며 살았습니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돈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을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중에 하나만 하라.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수 없다 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돈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사람과 바른관계를 해나가는 수단과 도구로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 하는 결단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이 남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내 남편과 내 아내와 그리고 내 자녀와 나의 부모님과 관계가 바르게 되어있으면 가정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나 집이나 차와 같은 이러한 물질을 남에게 자랑하고 내가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해나가는 일에 필요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생활해나갈 때 내 인생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우리 인간이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올바르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첫째로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입니다.

10절입니다.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까지 한번도 넘어져 본 일이 없으신 분이 계십니까? 나는 아직 한번도 넘어져 보지 않아서 넘어졌을 때 어떤 느낌이 오는지 잘 모른다라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다 저와 같은 경험이 있으신가 봅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운동회를 할 때 400미터 릴레이 육상 경기에 선수로 뛴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달리기를 잘해서 나가게 된 것이 아니라 그때는 모든 학생들이 운동경기에 참가를 해야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뜻과 제 능력과는 아무 관계없이 400미터 릴레이 육상 경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제가 어린 마음에 잘뛰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너무 앞섰는지 뛰다가 제 한쪽발이 다른 쪽 발에 걸려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져도 그냥 슬쩍 넘어진게 아니라 아주 용감하게 땅에 처박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당시는 저는 ‘아프다’ 라고 하는 느낌 보다는 ‘부끄럽다‘ 라고 하는 마음이 가득찼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많은 힉부모님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선생님들과 특히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냥 땅에 처박혔으니 제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제가 전도사 시절 때 제가 섬기던 교회서 야외 피크닉을 갔는데 점심시간 후에 오락게임을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2-30미터 거리에 과자를 놓아두고 거기까지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기 입으로 과자를 먹고 다시 돌아오면 그다음 자기팀 선수가 이어서 달려가는 그런 팀 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당시 교회 담임 목사님이 과자를 입에 물고 되돌아서 달려 오시다가 그만 크게 넘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얼굴에 피가나고 적지 않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후 몇주동안 얼굴에 상처가 난 목사님의 얼굴을 보면서 예배를 드려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모두가 다 넘어져 본 경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넘어졌느냐 넘어지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넘어졌을때 다시 일어설수가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내가 일어서는 것을 도울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10절 후반부를 보시면 “홀로 있어 붙들어 일으킬자가 없는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넘어질 때 나의 넘어진 이 손을 붙잡아 일으킬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가 결혼 생활도 그래서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땅위에 친히 세우신 기관은 교회와 가정 뿐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땅에 가정과 교회를 친히 세우셨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다가 넘어지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인데 그때 일으켜 세우는 사람을 넘어진 사람을 곁에 두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가정과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같이 생활하다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며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일으켜 세우라고 교회와 가정을 만드셨는데 우리가 교회와 가정에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넘어졌다고 정죄하고 비난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구에게 정죄함이 없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러니까 크리스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크리스챤에게는 예수님이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믿는 성도를 정죄하고 비난하지 않는데 우리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서로 정죄하고 비난하며 살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흉보고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고 살아가는 것만큼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곁에 있는 사람이 연약하고 부족해서 넘어지더라도 상대방이 다시 일어설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자녀가 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서로 필요한 이유는

서로 격려받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11절입니다.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두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유대 팔레스틴 지역은 사막지대에 속합니다. 그래서 낮이면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입니다. 하지만 밤에는 뼈속까지 저리는 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길을 건너야 하는 사람들은 밤이 되면 서로 등을 마주 하고 밤을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사람이 한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막지대를 건너가는 유목민들은 길을 가는 동안 친구를 만드는 것이 인생의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물론 혼자 사막을 건널수도 있습니다. 못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춥고 험합니다.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두사람이 한사람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서로 함께 하고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면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영어로 격려는 encouragement인데 용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격려를 하게 되면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0.1그램의 희망‘ 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면 이상묵 서울대 교수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2006년도 7월 2일에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과 서울대학교가 공동으로 진행한 야외 지질 연구를 하던 중에 사막한 가운데서 이상묵 교수가 운전하던 차가 전복을 하게 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사고로 인해서 그당시에 같은 차를 타고 있던 제자인 이혜정양이 현장에서 사망을 하고 이상묵 교수는 목 아래 부분을 전혀 움직일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목의 윗 부분만 움직일수 있게 된 상태에서 절망을 하고 있던 이상묵 교수에게 하루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1억원 (10만불)이라는 기부금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전신 마비 장애자를 위한 특수한 휠체어를 구입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이상묵 교수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한국으로 오자 마자 이상묵교수는 자기에게 1억원을 기부해준 이건우 교수를 만나서 이렇게 첫 번째 질문을 합니다. “교수님. 혹시 저를 아십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아니오” 이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이지만 대학교 동료 교수로서 그 사고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든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자기가 그해 경암 학술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포상금이 일억이었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이상묵 교수에게 기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동료교수의 기부로 말미암아 이상묵 교수는 입김으로 조절이 되어지는 마우스로 작동되어지는 컴퓨터와 그리고 턱과 빰을 움직여서 동작을 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특수 휠체어를 구입하고는 대학교 강단에 다시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막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낮에는 너무 뜨겁고 밤에는 너무 추운 환경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이상묵 교수처럼 예기치 않는 큰 사고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저런 사고를 만나게 될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든지 어떤 가정에서든지 생활해나가다가 보면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때가 있습니다, 제곁에 여러분들이 있는 것도 그리고 여러분곁에 제가 있는 것도 서로 비난하고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서로 격려가 필요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같이 있게 해주신 것으로 믿으십시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서로 필요한 이유는

함께 승리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격려를 하게 되면 격려를 받은 사람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격려는 서로 서로 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격려 할때 그 격려를 받는 그사람이 일어나서 힘을 내는 모습을 보면 내가 더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격려는 궁극적으로 두 사람을 함께 승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비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한번 보십시요. 틀림없이 그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심는대로 거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약 30년전 까지만 해도 마케트 시장에서 경쟁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흑백의 논리이었고 아군과 적군의 논리이었습니다. 내편이 아니면 적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적이 되는 상대방을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그 상대방을 패배시켜야하는 적자생존의 논리가 마케팅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5년 전부터 기독교적인 마인드를 가진 리더쉽 이론가들로 부터 함께 승리를 할수 있는 전략이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티븐 코비나 피터 드러커가 주장한 윈윈 전략입니다. 그들은 부부관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승리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싸우면 둘다 패배 뿐이라는 것입니다. 싸우면 둘 다 지는 것이고 사이가 좋으면 둘 다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를 사회생활을 해나갈 때 경쟁자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주변에 있는 경쟁자와 경쟁을 하지 말고 협력자로 대하게 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다섯이나 열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 시너지 효과이죠. 그래서 내가 경쟁자를 이겨 둘을 가지는 것 보다는 같이 협력을 하면 모두가 다 더 많이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는 이 시너지 효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신학자들은 여기 세겹줄, 삼겹줄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두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사람 이상의 관계를 강조하기위해서 세겹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그다음 또 하나의 해석에 있습니다. 보다 은혜가 되는 해석인데 믿음을 가진 사람 두사람이 함께 하면 거기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이 삼겹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요.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고 거기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믿는 사람으로서 함께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그 가정과 그 교회와 그 직장과 그 가게는 그 누가 깨트리고 끊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간단히 정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저런 모양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넘어질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믿음을 가지고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 곁에 있다면 나는 다시 일어설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곁에 하나님께서는 어머니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어머니만큼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넘어지고 그래서 아픔의 눈물을 흘릴 때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해서 부모님을 곁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를 내 곁에 두게 하셨고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 일으켜 세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게서는 나의 행복하고 축복의 교회 생활을 위해서 목사님과 신실한 성도들을 내 곁에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먼훗날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그때 다시 일어설수가 있었던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내가 넘어지고 그래서 연약해졌을 때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셨기 때문에 그때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승리를 하는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과 축복의 교회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 서로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한줄 한줄은 연약하고 끊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두줄이 서로 연합하고 결합을 하면 강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성도들이 서로 함께하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세상에 그누구도 끊을수가 없는 세겹줄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체와 직장과 교회에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 서로서로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주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