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한 제자의 회복

Author
kgmcc
Date
2021-05-15 21:10
Views
23
본문 : 누가복음 22장 54-62절

날짜 : 2021년 5월 16일

 

<누가복음 22장 54-62절>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지난주 목요일 5월 13일에 연방 보건당국이 1차 2차 백신 접종을 다 마친 사람들은 실내와 실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필요도 없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발표는 사실상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정상생활로 돌아가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워싱턴 포스트(WP)가 논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날부터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은 바이든 대통령과 카멜라 해리스 부통령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볼수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은 오랜 기간의 코로나 팬대믹을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특별누가 복음히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중에는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드려왔던 예배를 교회서 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신앙 상태로 침체되거나 연약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주 부터는 ‘회복’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대 제사장의 집 뜰 마당이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본문 54절입니다.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그리고 이 대제사장의 이름은 가야바라고 마태복음에서 말씀합니다. 마태 26장 57절입니다.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잡혀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밤에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 집 뜰마당에서 자기가 삼년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성지순례를 할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게 되면 그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터로 알려진 그 장소에 ‘베드로 통곡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어로는 '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 라고 합니다. ‘갈리간투’라는 말은 라틴어로 ‘닭의 울음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지인들은 갈리간투 교회 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베드로 통곡 교회 지붕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고 그 위에 닭의 모습이 세워져 있습니다. 닭의 울음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통곡을 했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은 그당시 법정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고문을 받으시고 난후에 감옥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통곡교회 지하에 내려가면 예수님께서 그당시에 갇혀 계셨던 동굴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베드로 통곡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교훈은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실패로만 끝났다면 베드로를 기념하는 교회를 그 누가 이렇게 세우겠습니까? 이렇게 베드로 통곡 교회를 만들어서 기념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고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베드로가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두가지와 회복할 수 있었던 배경 두가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코로나 팬데믹기간동안 이런 저런 모양으로 실패를 한 경험이 있다면 앞으로 회복할수 있는 길을 배울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베드로의 실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실패를 했던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을 멀찍하게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54절입니다.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멀찍이 따라가니라’ 베드로는 멀찍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가 말한 이 신앙 고백을 듣으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말한 이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조금씩 멀리 하며 지냈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는 자꾸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베드로가 원하고 소망하고 있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전혀 반대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번 말씀하시면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심을 베드로는 3년이상 따라다니면서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점점 불안감을 느끼고 그와 동시에 조금씩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날 밤에 지금 내가 예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나에게 굉장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현실적인 계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멀찍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고 그리고는 실패를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는 주님과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후 삶의 현장에서는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따라 갈수는 없고 그렇다고 주님과 같이 동행할려고 하니까 굉장한 부담이 오고 그래서 멀찍하게 떨어져서 따라 다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적지않은 성도들이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요즈음 내가 주님과 멀어지는 것 같다는 마음이 생기면 미루지 말고 주님 곁으로 가까이 가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2장을 보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 대해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일과 세상일에 대해 지혜롭게 분별하면서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대해서 주님은 칭찬하십니다(계 2:2-3)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요한 계시록 2징 4절입니다.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느니라‘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를 위해 많은 수고하고 봉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나를 향한 주님의 그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첫사랑의 마음을 늘 간직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느냐 하는 것 보다는 어떤 동기로 하고 있느냐를 살펴보십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바로 주님을 향한 그 첫사랑의 감정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늘 내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하루아침에 주님과 멀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과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다가 보니 거리가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 첫사랑을 잃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조금씩 멀어지다가 보면 결국 헤어지게 되듯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하게 따라 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실패를 했습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날마다 가까이 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가는데 실패를 했던 이유

둘째로 세상의 무리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55절 말씀입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그 가운데가 어디입니까? 불을 피운 사람들이 앉아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입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 뜰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1편 1절입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누가 복있는 사람입니까?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은 직장과 사업터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중에는 악인들도 있고 사기꾼들도 있고 그리고 오만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과는 별도로 나의 신앙의 터전은 신앙의 공동체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사자는 정글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새는 하늘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믿는 성도는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믿는 성도들끼리 모여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세상에서는 얻을수 없는 영적인 축복을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비록 내가 몸담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 교회가 남들이 보기에 작고 초라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신앙의 공동체가 내 신앙의 원동력이 되고 생명의 공급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앞에 부르짖어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베드로 눈에는 예수님이 얼마나 초라하고 연약하게 보여지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붙잡혀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무기력하게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실망을 할수 있습니다. 저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인것이 부끄럽고 힘이 빠질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때일수록 우리들은 믿는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찬송하는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모여 기도하면서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들 한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에 같이 있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신앙은 그들이 모여있는 자리에 있는 동안 점점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57절입니다.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이렇게 자기 신앙생활에 실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냥두시지 않으십니다. 한번 택한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때문에 베드로는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베푸시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베드로가 실패에서 회복 할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실패에서 회복할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시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61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  '주께서... 보시니' 주님께서 행동하실 때 그때가 곧 베드로가 회복하게 되는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이 시작하시면 회복과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항상 주님이 시작하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 그리고 우리의 직장이나 사업도 주님이 역사하시면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그 예수님의 시선은 어떤 시선이겠습니까? 그것은 한없는 자비와 긍휼의 시선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약함과 넘어짐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시선이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친 베드로는 마음에 찔림을 받고 밖에 나가서 통곡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주님은 언제나 저와 여러분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시선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시선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연약함을 아시고 내 한계를 잘아시고 나를 바라보십니다. 연약하여 넘어지는 나를 잘 아시고 바라보십니다. 사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주님을 알지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주님은 나에게서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십니다. 내가 넘어졌을때에도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사랑의 눈길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주님의 시선을 내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한번 넘어지면 잘 회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회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시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삭개오가 어디에 있을때 예수님을 보게 됩니까? 뽕나무 위에 있을 때 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뽕나무로 되어있지만 지금 우리가 가진 개역 개정판 에서는 돌 무화과 나무로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 삭개오가 왜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갔습니까? 예수님이 여리고 지역을 지나가실 때 그 예수님을 한번 볼려고 길가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도저히 볼수가 없었기 때문에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돌무화과 나무아래에서 멈추시고는 쳐다보신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쳐다보시니까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같이 쳐다보았겠죠. 그들이 쳐다보니까 세리장인 삭개오가 나무위에 있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그 삭개오를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고 조롱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삭개오는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쳐다 볼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위기에서 삭개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라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삭개오는 오직 예수님의 시선만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시선을 바라보는순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 후반부입니다. ‘5.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내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야!‘ 삭개오라는 이름의 의미는 ‘순결함‘ ‘의로움‘ 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에게 그동안 그누구도 삭개오라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정부에 빌붙어서 국민들의 세금을 받아내서 일부는 로마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배를 채우는 사람에게 ’순결하다 깨끗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는 삭개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름대신에 사람들은 아마 ’저 매국노, 저 사기꾼, 저놈, 저 난쟁이, ‘ 이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의 시선을 바라보는 순간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내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래요. 만일 이 삭개오가 예수님의 시선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바라보았다면 부끄러움과 수치감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베드로처럼, 이 삭개오처럼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에 있습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이 넘어지고 자빠져 있는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시선을 바라볼 때 회복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어떤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주님의 시선을 바라볼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실패에서 회복할수 있었던 것은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61절 후반부입니다. “61.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 '베드로가 주의 말씀... (중간 생략을 해버리고 마지막을 연결하시면) 생각 나서‘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우리 믿는 성도들이 넘어지고 타락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소홀이 여길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생각할 때 다시 회복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어떻게 한다고요? ’주의 말씀을 내마음에 두었나이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범죄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를 범죄에서 지키게 하고 또 실패한 나를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저는 아내와 함께 아침, 저녁으로 찬송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니더. 그리고 기도를 마치게 되면 달력에 인쇄되어있는 성경구절을 암송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암송해오고 있는데 한달마다 새구절이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되어집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암송하는 양이 점점 많아 지고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암송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분별하고 결정짓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저와 여러분을 유혹이나 범죄에서 벗어난 생활을 할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마음에 두면서 살아갈 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내가 회복이 되고 성장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말씀을 다시 소홀히 하게 되면 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난이후에 베드로는 또 넘어졌습니다.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 이렇게 베드로는 말을 하고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그옛날 어부생활로 다시 되돌아가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고 이른 새벽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육지로 올라올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와서 조반을(아침을) 먹으라” 그런데 이때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4절입니다.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계속 실패를 하고 있는 제자들과 그런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 아침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불속에서 구운 떡과 물고기를 받아서 먹습니다. 그리고 난후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회복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15.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이러한 질문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을 까요? 이 질문만이 베드로가 마음을 열고 대답할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시몬아 네가 이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질문만은 베드로가 그날밤 실패한 사건에 대해 상처를 받지 않고 대답할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요 그날밤 제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만은 제가 자신있게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자신이 상처를 받을까봐 배려해주시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씨를 알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이런 속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야, 사실은 네가 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날밤에 다른 제자들이 모두가 다 도망을 갔어도 너는 잡혀가는 나의 뒤를 멀리서라도 쫓아올수가 있었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지 네가 나를 저주하고 부인할때는 너의 진심이 아니었다. 다만 베드로 네가 알지 못했던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정도가 죽음의 세력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것임을 몰랐을 뿐이었다.“ 그래요. 이러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베드로는 회복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했을 때 나를 회복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채워지게 될 때 우리는 넘어졌을지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베드로는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올때마다 마음이 괴로워서 어쩔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로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릴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닭의 울음소리를 들을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속에 있다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게 하십니다. 회복하게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이제 간단히 정리합니다. 우리는 기나긴 코로나 팬대믹을 지나오고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믿는 성도로서 이런 저런 모양의 실패의 행동을 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사람인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는 나를 사랑하고 격려하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볼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구하는 이가 받을 것이요 찾는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것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인해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회복의 자리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주님이 같이 해주십니다, 주님이 책임져주십니다. 바라옵기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와 내가정과 내 교회가 회복되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