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격리된 여인의 회복

Author
kgmcc
Date
2021-05-22 23:27
Views
24
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날짜 : 2021년 5월 23일

 

<마가복음 5장 25-34절>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지난 주부터 회복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같이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 베드로의 회복에 이어 오늘은 격리된 여인의 회복에 관해 같이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혈루증이란 영어로 subject to bleeding 으로서 말 그대로 피가 흐르는 병을 말합니다. 일종의 부인병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데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하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사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이기 때문에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악성 빈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올라서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고 또 머리카락이 빠져서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더 늙어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12년 동안이나 노력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힘들게 한 것은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이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육신의 고통 보다도 마음의 아픔과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혼자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과 고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감이었던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을 보면 율법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병을 부정한 병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혈루증을 가진 여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그사람이 닿았던 모든 것들도 역시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사람이 만진 사람뿐만이 아니라 누웠던 자리, 앉은 자리, 모든 물건까지 다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그당시 유대 사회에서 격리되어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회당이나 성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에게 남편이 있었다면 당시 풍습으로 보아 이혼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그 누구도 그와 함께 있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당시 물이 너무 귀한 시대라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언제나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러니 이여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더 고립되어 혼자 살아가야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사람들이 자기 곁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면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라고 외쳐서 자신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금 사람들이 일년이 넘게 저마다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이제 백신으로 인해 이 미국사회가 점차 회복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영적인 백신인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영적으로 회복을 할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혈루증 가진 여인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고독하고 외롭고 절망적인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자기들끼리 외딴 곳에 따로 모여서 생활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혼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세상과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여자였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만큼 마음 아프고 서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할수도 없는 저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자로서의 매력도 잃어버렸고 재산도 다 잃어버리고 소망도 잃어버린채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게 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딸아’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로 보면 여자는 ‘귀네’ 이고 딸은 ‘뒤가테르’ 인데 이 ‘뒤가테르’ 라는 단어를 예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뒤가테르’ 는 바로 야이로 회당장이 자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에게 말할 때 그때 사용되어졌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은 모두 여자를 표현하는 ‘귀네’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간다는 얘기를 듣고 야이로와 함께 그딸을 고치러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12년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중간에 불쑥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고쳐주시고 ‘딸아‘ 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실 본문 앞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젊은 예수앞에 나아가 엎드리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회당장이 자신의 신분과 자존심을 버리면서 까지 행동한 것은 죽어가는 자기 딸을 살리겠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년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도중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 ‘딸아’ 라고 불러주십니다. 남편도 가족도 그리고 세상 사람들도 자신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딸아’ 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자신처럼 세상에서 부정한 사람으로 버림을 받고 살아가는 자도 주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딸아’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여인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아마 이 여인의 눈에는 감사와 감사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통곡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도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던 그 순간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지난날 실패한 그 일을 회상시키지 말씀을 하지 않고 다만 ‘네가 나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하실 때 자신을 배려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 변한 사람들은 이렇게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날 때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당시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변한 사람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 뿐이었고 그리고 베드로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육체적인 질병만 치료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의 축복까지 주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까지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부정한 존재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따돌림 당하며 살아아가는 동안 생긴 마음의 아픔과 상처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12년 세월의 마음의 아픔과 고독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딸이 이렇게 고침을 받게 된 것이 바로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혈루증 여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이 여인을 구원한 것입니다. 믿음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고 믿음이 이 여인을 자유하게 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흘러 오는 통로와 같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할지라도 그 믿음의 통로가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로 흘러 들어올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당시 예수님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겠습니까? 그 중에는 환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옷 자락에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여인이 가진 믿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는 동안에 고립되고 격리된 생활에서부터 회복되고 자유함을 얻고 신앙생활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여인이 가진 믿음은

1.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후 갖는 믿음

본문 26절입니다.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그러니까 이 여인은 12년 동안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하였고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괴로움을 받았다는 것은 그당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혈루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내용이 탈무드에 기록되어있는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타조 알을 태워서 재를 베 조각에 싸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 낫는다‘ 또 다른 치료방법으로는 ’흰 암나귀 대변 속에서 발견된 보리를 먹으면 효험이 있다."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치료 방법들이 있는데 이여인도 시도해보았을 거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무엇인가에 부딪혀서 제 머리에 피가 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동네 할머니가 된장을 가져와서 제 머리에 발라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손에 피가 나면 흙을 발라주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과학적인 방법이 아닌 이런 식의 민간 치료방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많은 주술사들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미신적인 행위도 했을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무당이나 점장이들이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따라 환자들은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잡는다’ 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속담은 의술에 서툰 사람이 치료해준다고 하다가 사람을 고생시키고 죽이기까지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치료할 능력이 없는 많은 의사와 주술사를 만나서 숱한 괴로움만을 받았고 가진 재산을 더 허비했지만 병은 더욱 깊어 갔던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이 여인은 누구보다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러중 우리인간은, 나의 한계안에서만 소망을 가질수 있습니다. 나의 한계 안에 있을때만 사람을 사랑할수도 있고 신뢰할수도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내게 돈이 있고 그리고 그 돈으로 나를 치료해줄수 있다고 자신하는 의사들이나 주술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을수 있다는 소망으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지만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많은 괴로움만 받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돈은 다 떨어졌고 병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때 진정한 믿음의 시작이 되는 것을 성경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날에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에 갇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외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 그때가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여인은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 상황에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복음을 듣고 믿는 믿음

본문 27절 전반부입니다.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복음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음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교회에 다니십시오’ 라는 말대신에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라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0 여년전에 고구마 전도왕으로 유명했던 김기동 집사님이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전도하시는 방법은 네가지 종류의 말이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으십니까?’ 입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듣은 사람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 두 번째 말을 합니다.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 사람을 또 만나게 되면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하면 된답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네마디의 말로 익은 고구마를 분별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익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익게 하실 때 까지 기다릴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김기동 목사님이 가장 강조하시는 것은 ‘교회’ 가 아니라 ‘예수’ 가 복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올려고 하는 데 그거보다는 예수를 믿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말하면 그다음에는 예수님이 하실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아서 구원할자를 구원하시고 내버려두실 자는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었습니다. 복음을 듣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시작은 듣으면서 나는 것이지 보면서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자가 낫게 되는 것을 보면서 생기는 믿음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병자가 나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생기는 믿음이 참 믿음인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가 낫거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쁨과 감사가 생기게 되는 것이 성경적인 참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복음 즉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난이후 어떻게 반응 했습니까? 28절입니다.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참믿음을 가진 사람은 입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함일러라’ 를 헬라 원어로 보게 되면 '엘레겐'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엘레겐은 계속 반복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자신의 입으로 계속 중얼거리면서 혼자말을 하듯이 ‘나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받을수 있어’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는 고침을 받을수 있어’ 이렇게 계속 입으로 중얼거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입니다.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이심을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살아가면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행위를 베풀거나 도움을 주었을 때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맙다고 얘기를 할 때 그때 내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냥 겸손해 하는 것 보다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행동하게 되었음을 입으로 고백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입으로 시인하는 행위이고 그래야 주변사람들과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참 믿음을 가진 자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임은 자녀들에게 그 잘못을 시인하도록 고백시킵니다. 그런데 어떤 자녀는 자기 잘못을 알고는 있지만 죽어도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 고 고백하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부모는 강압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시간을 가짐으로서 그 아이가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게 분위기를 만듭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마침내 울면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것과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참믿음인가 참믿음을 가진체 하는가 구별하게 될 만큼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기회가 생길 때 예수님을 구세주를 믿고 살아간다는 말을 내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끝까지 주님을 만나고자 행하는 믿음

본문 27절입니다.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기도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행동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씩 행하다가도 어떤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이나 자신의 소망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무엇이 자신의 야망이고 무엇이 믿음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포기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야망과 소망에서 시작한 것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한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나아가는 길에는 두 개의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누구와도 접촉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여인의 모습을 잘못 적용 시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이름하에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열심히 법에 순종하고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입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무엇입니까?)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법을 폐하시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이십니다. 다시말해서 율법으로서는 그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 한계를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 하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우리 믿는 성도는 평상시에 생활해나가는 동안에 법을 굳게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단지 이 법에 대해 저와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이법이 나를 구원해주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은 이 법의 한계를 넘어서서 구원을 해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평상시에 율법을 무시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법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율법이 할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서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예수님에 옷에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밤중에 이웃사람들이 자고 있는데 크게 찬송가를 부르거나 통성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무례하고 뻔뻔스럽게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은 예수님에게만 있다고 하는 믿음 때문에 율법을 벗어난 행동을 조심스럽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장애물은 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31절입니다.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본문 앞 30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는데 그때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 여기 많은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서로 밀고 밀리다가 보니 예수님 몸에 부딪친 것 같습니다.’ 제자가 이렇게 말할만큼 무리들이 많이 몰려있는 상황인 것을 우리는 추측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사람도 사람들이 많아서 밀려서 잘못하면 넘어질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이여인은 12년동안 하혈을 했기 때문에 얼굴엔 핏기 하나 없고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입장인데 그 몸으로 예수님에게로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편에서 예수님의 옷에 자신의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그 옷을 붙잡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 겉옷 가장자리에 손을 댄 것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혈루의 근원이 말랐습니다. 29절입니다.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이 여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불이 자기에게 임하면서 자기의 몸이 시원하게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흐르던 피가 멈춘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12년 동안 앓아온 혈루병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컴퓨터나 스마트 폰 스크린에 터치만 우리는 기사를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손가락으로 터치만 하면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터치만 하면 우리는 아마존이나 이베이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터치의 시대에 살고 잇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우리들은 밤새도록 소나무를 붇잡고 뿌리가 뽑혀질때까지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메시지를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능력은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주님이 행하신다라' 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터치를 하는 것에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열고 기사를 볼 때 우리는 가볍게 터치를 하지 스마트 폰이 깨질 듯이 두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볍게 터치를 해도 얼마든지 내가 필요한 것을 가질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코로나 팬데믹 기간동안 이 여인처럼 오랫동안 고립되고 격리된 생활로 인해 영적인 침체가운데 있다면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 예수님에게 가고자 하는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포기 하지 않고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손을 대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내 눈물과 내 아픔과 내 소망을 아십니다. 다만 저와 여러분에겐 예수님께 나가 예수님을 타치 하는 믿음이 필요할뿐 입니다. 그 믿음이 겨자씨 한알만한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능력은 저와 여러분을 충분히 회복시키시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이제 영적인 백신인 주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지나간 코로나 팬데믹 기간동안 가졌던 영적인 침쳬에서 벗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