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소홀히 여기기 쉬운 것

Author
kgmcc
Date
2021-07-10 23:10
Views
20
본문 : 로마서 5장 1-2절

날짜 : 2021년 7월 11일

<로마서 51-2>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오래전에 이 샬롯지역에서 전 세계 선교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선교사 초청 집회’ 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세계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 약 200명 가량이 초청을 받아 왔습니다. 당시 4박 5일 동안 열렸던 그 집회에서 선교사님들의 사역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간접으로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프리카 말리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안창호 선교사님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말리는 우리나라 남한의 열 세배정도 되는 크기의 나라이지만 약 80프로가 사하라 사막이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1992년에 한국과 말리가 수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후 2년 후인 1994년도에 말리에 선교사로 파견되셨는데 얼마전 온라인으로 검색해보니까 지금도 말리에서 사역하시고 있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그당시에 말리의 첫 선교사로서 힘들게 선교지를 개척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주 평범한 질문을 했었습니다. ‘선교사님, 말리에서 선교를 하시는 동안 여러 가지로 힘드시고 고통스러운일이 많으시죠?’ 그때 그 선교사님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을 하시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목사님, 제가 사람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들을때마다 ’힘들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은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왜요?’ 라고 물으니까 그 선교사님이 대답 하시는 말씀이 ‘사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지만 그것보다는 소망과 보람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일로 여기지 않으면서 선교사 사역을 해나가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사람들이 ‘선교사님 힘드시지요?‘ 라고 물을때 ’아니 힘들지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는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한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 힘들고 어려운일이 많으시죠?“ 라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리에 첫 번째 선교사로서 사역을 해나가는 일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고 하는 보람과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힘든일이 힘들지 않게 여겨지는 것 뿐 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땅에 첫 번째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일을 다 겪어서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땅의 첫 번째 선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기에 힘이드셨지만 그만큼 기쁨과 감사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다이루었다’ 라고 크게 외치고는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재미가 없고 나를 얽매리세 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쟁이가 되면 재미난 일을 하지 못해서 믿지 못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은 해야할 일이 많아서 안되고 나이가 들어 늙게 되면 신앙생활을 하겠다’ 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정말 이런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고 얽매이게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까? 물론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모습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용서함에 대한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을 누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쁨과 소망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과 그리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은 절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힘들게 무거운 짐을 지고 어쩔수 없이 좁은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매임이 아니라 자유이고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내가 해야 할텐데' 라고 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야할 일과 감당해야 할 사역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할 우선순서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에게 주신 것들을 누리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왜요? 누림이 없이 행하게 되면 사실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누림이 먼저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녀들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부담을 느낍니까? 그동안 내가 열 달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는데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주시는 모유도 안 먹고 나가서 내가 돈벌어 와서 부모님에게 도움이 되게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나요? 없습니다. 자녀들은 마음껏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그 품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먼저 누림으로부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봉사와 사역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신앙생활을 누림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될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도 재미가 없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분명히 좁은 길입니다. 눈물 없이는 못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위로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그길을 가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요.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무수히 얻어맞고 발에 착고를 달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할수도 있는데 오히려 큰소리로 찬송을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입니다.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을 찬송하매’ 바울과 실라가 왜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까? 육체는 매임을 당하고 몸은 맞아서 멍이 들었지만 그날 저녁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감격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견딜수가 없어 찬송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찬송을 부르며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함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먼저 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들이 이세상에서 누릴수 있는 축복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린다는 것은 즐긴다(enjoy)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평안과 화평함을 주셨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북한 탈북 여성으로서 1호 여성 목회자가 되신 김영실 목사님의 간증을 듣게 되면 ‘자신은 마음에 평안이 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안을 주신다는 말을 들을 때 완전 거짓말인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의 사람 대부분이 마음의 평안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목사님의 간증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평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것은 예수 믿기 이전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우리가 원수 되었을때에...‘ 언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까? 화목하게 되기 전까지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은즉‘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즉으시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인정하거나 하지 않거나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나는 원수의 관계이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입니다. ’3.전에는 우리도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전에는 우리도‘ 여기서 전에는 라는 말은 예수를 믿게 전에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도 불편하고 원수 된 관계가 되면 지내기가 힘들고 불편합니다. 어떤 모임에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모임에 참석하기 싫어지고 친교를 나누는것도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이러한데,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 마음에 어찌 평안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그마음에 어찌 평안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언제부터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된 관계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했을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시면 하나님과 우리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시겠습니다.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네가 먹는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아담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후로부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참 억울하죠 우리는 내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지만 어쩔수 없습니다. 그당시 아담은 이세상에 태어날 모든 인간을 대표할 사람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당사자가 범죄했기 때문에 그 언약에 속한 우리들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일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됩니다. 코로나 팬데믹 중인데도 올림픽을 열겠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집념은 대단합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선수들은 모두가 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역대 올림픽에 참가해서 올린 성적표 보니까 대부분 10위안 기록이었습니다. 일본에서도 금메달 10개 은매달 동매달 각각 10개씩해서 총 30개의 매달만 가져오면 5위에서 7위정도의 성적을 올릴수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해서 매달을 따게 되면 대한민국이 매달을 딴 것으로 기록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달을 따는 그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든지 아니면 일하고 있었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우리나라가 매달을 딴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그 선수가 경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선수가 매달을 따지 못해도 우리나라 매달을 따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내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지만 아담이 우리 온 인류를 대표로 해서 행동을 했기에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화평을 누릴수가 있습니까? 본문 1절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누가 화평을 누릴수 있습니까? 그 앞을 보시면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나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사람만이 하나님과 화평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 이 성경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면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처럼 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면 한번도 죄를 지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적인 의롭게 되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의롭다‘ 이것은 사실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장이 ’너는 의롭다‘ 라고 판결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재판장되신 하나님이 ’너는 의롭다‘ 라고 판정을 받는 사람만이 화평을 누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원수된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불어서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 1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깨끗하고 죄를 안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을 믿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의로운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성도들이 이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님들이 예수를 믿고는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에게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하면 아멘 믿습니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십니까? 그러면 벙어리가 됩니다. 심각한 표정이 됩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릴때는 그래도 평안을 누리는 것 같은데 예배를 마지고 삶의 현장속으로 뛰어들게 되면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믿음이 뜨겁고 성령충만할때는 그런 것 같은데 내 연약함과 허물이 보여질때는 그 평안이 쉽게 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그런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누리도록 평화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평안이 쉽게 깨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평안을 깨트리는 두가지 요소를 생각해볼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죄책감입니다.

최책감은 죄에 대한 가책을 의미하잖아요? 과거에 진 죄로 인하여 양심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죄책감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그죄를 다시 짓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양심을 짓누르고 괴롭힙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을 깨트릴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죄를 다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 후반부 입니다. ‘13....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 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것‘ 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 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게 될 죄까지도 우리가 예수를 믿을때에 미리 다 사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라는 단어속에는 내가 알고도 지은 죄와 모르고도 지은 죄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가책감 까지도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만 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일어나는 부끄러움과 가책까지도 다 사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저와 여러분은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누리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 평안을 깨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완전성이라 할수 있습니다. “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다 함을 받은 자녀라면 그래도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할텐데 내가 너무 쉽게 화를 내고 자주 신경질을 내는구나“. 이렇게 내가 내 자신을 보면서 평안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넘어지고 거룩하지 못한 내자신을 보면서 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실망하는 것입니다. 나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니까 당연히 평안은 사라지는 것이죠. 이런 현상을 제자신도 잘 극복해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생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야 합니까? 예배를 드릴때는 평안을 누리고 세상에 나갈때는 깨어지고 이것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탄의 참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사탄의 참소가 있고 허물이 있고 죄책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평안을 지속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누리는 평안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다시한번 보십시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화평입니다. 너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화평이 아닙니다. 너의 선한행위, 너의 신앙행위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화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평화를 누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은 내게 죄와 허물이 없어서도 아니고 내가 완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하신 분이십니까? 6절을 보십시다.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을때에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십니다. 8절입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10절에 이미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죽으신 분이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내 대신 심판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완벽한 죄인인데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벽한 죄인이 만나면 거기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면 평안을 누릴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단이 나를 참소하고 주변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방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수치와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파도가 밀려올 때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그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 평안의 축복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평안을 지속할수 있는 방법 

둘째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평화임을 알아야 합니다.

1절 하반부 다시한번 보시면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평안은 이 평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주어진 평안이기 때문에 내 느낌과 감정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릴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럼으로 이 평안은 돈이 없어도 누릴수가 있고 인생의 풍랑의 한가운데서도 누릴수가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아픔속에서도 누릴수 있는 평안입니다. 우리는 나의 연약함. 나의 상처. 나의 허물, 나의 어려움 때문에 평안이 깨어진다고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평안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이평화가 깨어집니다. 그러니까 내가 처한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내 평안이 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이 평화가 깨어집니다. 왜요? 이 평화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게 되는 평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어지고 멀어지면 이 평화를 누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재정적인 압박을 가하고, 그리고 자꾸 비교하기도 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가 크면 클수록,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크면 클수록 믿음의 주를 더욱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안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계속 해나갈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관심은 돈이 아닙니다. 출세와 성공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일지는 몰라도 주님의 관심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관심은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평안이 없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안이 없는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 29장 11절 보시겠습니다.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와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펼강이 있을 지어다‘ 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평강이 있어야 앞으로 미래에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언제나 과거 지향적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이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를 붙들고 늘어지지만 하나님은 이제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본문 2절 말씀입니다. 2.또한 그로 말미암아(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있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기쁨과 즐거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가지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 가장 먼저 주시고자 하는 것은 평강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이 평강을 저와 여러분이 누리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가 있어도 평강속에서 살아가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고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인일 때 예수님은 나를 위해 대신 생명으로 죄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는 평강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으로 이제 과거를 돌아보지 마십시다. 바라옵기는 주님이 주시는 지금 이 평안함을 누리면서 미래를 향하여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