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에서가 내게 다가올 때

Author
kgmcc
Date
2021-07-31 20:57
Views
37
본문 : 창세기 33장 1-4절

날짜 : 2021년 8월 1일

 

<창세기 33장 1-4절>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우리 인류역사를 보면 크게 BC와 AD로 나누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 들에게도 BC 와 AD가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의 인생이 BC 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인생은 AD 라 할수 있겠습니다. BC 와 AD가 분명한 삶을 살았던 신약의 인물중 대표적인 한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을 들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가 너무나 달랐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BC와 AD가 분명했던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바로 야곱을 들수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타락한 죄성을 가진 우리 인간의 모습이 어떤것인지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이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타락한 죄성을 가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저렇게 변화될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야곱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야곱의 BC 와 AD를 나눌수 있게 된 사건은 바로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라 할수 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 사건 이전이 야곱의 BC 라고 한다면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 일어난 이후는 야곱의 AD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야곱의 AD 인생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시간에 우리는 야곱의 AD 인생을 보기 전에 먼저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야곱의 BC 인생을 잠시 살펴보시겠습니다.

아시다 시피 야곱은 형 에서와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죽이겠다고 분노하고 있는 형 에서를 피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가나안땅에서 하란 땅까지 거리는 약 600 KM 인데 서울과 부산 까지 거리가 300KM가 조금 넘어니까 서울과 부산 왕복거리라 할수 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야곱이 정말 먼 거리를 도망한 것이죠. 그리고 그 하란에 머문지 20년 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31장 13절입니다.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20년 전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난 장소가 벧엘이었습니다. 그당시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가다가 외롭고 고독한 인생의 들판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와 주셨던 것입니다. 앞으로 자기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을 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힘과 용기를 얻고 기쁜 마음으로 그 먼거리인 하란으로 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이후 야곱은 20년 동안 하란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내와 열한명의 아들 그리고 많은 종들과 가축을 거느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란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할아버지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은 가나안이었지 하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성숙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 거짓말하고 간사한 야곱, 이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야곱의 인생에 하란을 잠시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곱보다 훨씬 더 간사하고 훨씬 더 거짓말쟁이고 훨씬 더 사기꾼인 라반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속된 말로 임자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야곱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받았던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게 하삽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이 사용 하실수 있는 사람으로 점점 성숙하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야곱은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외삼촌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20년 전 그때처럼 도망쳐서 하란을 떠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창 32장 2절입니다. ‘‘2.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 ‘마하네’ 의 복수인데 마하네가 군대 이니까 마하나임은 군대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군대를 두진영으로 나누어서 야곱의 일행이 가고 있는 길에 앞뒤로 보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야곱은 자기 일행중에 끼어 들어온 무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군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창세기 28장 15절을 보시면 20년전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이라는 벌판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만났던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내가 너를 이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하란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은 다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20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살았지만 부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이 몰래 도망친 야곱을 혼내주기 위해서 쫓아왔을때도 보호해주십니다. 라반이 야곱을 붙잡기 하루 전날밤에 하나님은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내일 야곱을 만나거든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 따지지 말아라. 야곱을 건드리면 내가 너를 그냥 안 둘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경고하시는 바람에 라반은 야곱을 만나면 소유물을 다 빼앗고, 반항하면 죽일려고 까지 했던 계획을 포기합니다. 그대신에 야곱과 평화협정을 맺고 돌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시고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보호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야곱은 매순간 순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에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온전히 지킬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형 에서가 40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까? 창세기 32장 7절입니다.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그래요. 이것이 바로 믿음과 현실의 문제 사이에서 보여주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그리고 또한 지금 눈에 보여주고 있지만 야곱은 형에서가 40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하는 현실에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인간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자기의 가축을 두 떼로 나눕니다. 왜요? 한 떼를 공격하면 나머지 한 떼는 그 사이에 피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게 다가오는 현실의 장애물을 보면서 여전히 두려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계획을 하고 살아갈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당당하게 살아갈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는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런 수준에 머물러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현실에서 보여지는 장애물은 뛰어 넘어가라고 주어진 것 뿐 입니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마침내 얍복강 나루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야곱은 자신의 두 아내와 열한명의 아들과 수많은 종과 가축들을 떠나 보냅니다. 그리고 야곱은 홀로 남게 됩니다. 창 32장 24절 전반부 입니다.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제 얍복강을 건너게 되면 형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눈앞에 다가 온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은 바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이 구원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그누구도 함께 할수가 없습니다.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자식도 내가 가진 모든 재산도 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수가 없고 도움을 줄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되느냐에 따라 내곁을 떠난 아내와 자식과 재산들이 나와 진정한 축복속에서 관계가 지속될수도 있고 아무런 관계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사실을 야곱이 알고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야곱은 홀로 남아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라고 하는 이 표현은 야곱이 결사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문제와 씨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합니다. 기도에 먼저 승리하지 않고서는 인생문제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씨름하듯이 치열하게 기도하는 도중에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습니다. 창세기 32장 25절입니다.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이 허벅지 관절은 남자의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믿었던 것은 바로 건강한 몸이었습니다. 사실 건강한 몸만 있다면 문제가 생긴다 할지라도 도망쳐서 다시 시작할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 까지도 다 깨트려 버리신 것입니다. 왜요? 야곱은 자기가 질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우리 인간은 내가 믿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질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자기가 자신하고 믿고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건강한 자신의 몸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이길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 몸을 치신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이 의지할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립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없이는 저는 이젠 살아갈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오니 저를 도와주십시요’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시고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야곱은 그 자리를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 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2장 31절입니다.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야곱의 인생에 밝은 빛은 ‘브니엘’ 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부터 야곱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기쁨이 넘치는 마음이 되어서 형 에서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 형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형 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제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변하게 된 야곱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야곱의 AD 인생을 보여줍니다.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시간에는 변화된 야곱을 모습을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간단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는데

 

첫째로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후로 야곱이 변화된 것은

1. 당당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야곱은 압복강 나루터를 건너자 마자 4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1절 전반부입니다.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이때 야곱이 어떻게 행동 합니까? 2절입니다.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종과 그 자식들을 맨앞에 두고 그다음에는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리고 맨 마지막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그 자식들을 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새로운 축복을 받아도 우리에게 주어진 성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이러한 천성을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장면보다 더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그다음 야곱의 행동에 있습니다. 3절입니다.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야곱은 이 모든 사람들보다 앞에 나가 형 에서를 맞이합니다.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자기가 맨 뒤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살펴보다가 상황이 불리하면 도망갈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야곱은 자기가 맨 앞으로 나갔습니다. 당당해진 것입니다. 하룻밤사이에 변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황 청심환을 먹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5 hours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기 때문입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손에 다 맡긴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당당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실패할수도 있고 가난해질수도 있습니다. 약해질때도 있고 병에 걸릴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망하게 되어 집을 날리고 가게를 날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기가 죽게 만드는 이유가 될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땅을 살아가지만 이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내가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것이 무너지고 없어졌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남에게 내 보일만한 것이 내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가진 것이 하나 없었습니다. 얼마나 가진 것이 없었으면 디모데 보고 네가 내게 올 때 겉옷 한 벌하고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 고 말했겠습니까? 하지만 사도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삼을 당하고 거꾸러 짐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요. 가진 것이 있기 때문에 당당함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당당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유일하게 의지했고 자랑스러워 했던 것 마저도 없어지게 되는 사건이 생길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허벅지 관절을 부서져 버리는 사건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인생의 에서를 만나게 될때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이 허용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야곱은 당당하게 모든 사람앞에 나아갔습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내가 어떠한 상황속에 있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일어난 사건이후로 야곱이 변화된 것은

2. 겸손해졌습니다.

3절 다시 보시겠습니다.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야곱은 일곱 번 자신의 몸을 땅에 업드려 절하고 형 에서에게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당시 자식이 부모님을 만났을 때 최대의 존경의 표시로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부모가 아니라 형입니다. 그리고 형이라고 하지만 몇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입니다. 단 몇초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형에게 야곱은 자기의 두 아내와 자식들과 종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일곱 번이나 땅에 굽혀 절하면서 형에게 갔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인 것입니다. 차라리 도망가다가 잡혀서 끌려가는 것이 훨씬 더 자존심을 세울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중의 하나는 자존심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 일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은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자기의 자존심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형 에서 앞으로 나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번 엎드려 절을 했다는 것은 온전한 용서를 구했다는 의미입니다. 20년 전에 야곱이 형에게 잘못한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야곱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다운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뿐만아니라 사람앞에서도 해야 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만 회개할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했습니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 버릴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그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다면 그사람에게 용서를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낮추고 형 에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엎드렸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철저하게 낮아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형 에서가 400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 야곱이 보란 듯이 멋진옷을 입고 거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형 에서는 그 야곱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주 형편없이 헝클어진 머리와 흙탕물로 범벅이 된 옷을 입고 그리고 절뚝절뚝 거리며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자마자 일곱 번 땅에 엎드리며 절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형 에서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교만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언 16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런데 사실 위기를 만났을 때 그때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 너무 쉽습니다. 위기 상황인데 어떻게 거만하게 행동할수 있겠습니까? 교만하라고 해도 교만 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고 인정받는 자리에 있을 때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후에도 이런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나중에 야곱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을 받고 애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이 죽을때까지 17년 동안 애굽에서 살게 됩니다. 자기아들이 국무총리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야곱을 찾아와서 뇌물을 주면서 청탁을 할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야곱은 총리의 아버지로서 뇌물을 받는다거나 그 어떤 이권에도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때는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땅에 묻히게 해달라는 요청을 요셉에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권이 바뀔때마다 뇌물 청탁 문제에 걸려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면 얼마 안가서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람들이 뇌물 청탁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의 아버지의 신분이었지만 재물에는 관심이 없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한 이후에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할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야곱처럼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만나는 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4.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야곱이 일곱 번 절을 하고 일어서는 순간에 형 에서가 달려가서 동생 야곱을 끌어 안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웁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화해하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화목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용서하고 화목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부싸움 하는 것은 쉽지만 화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누와 올케가 싸우는 것은 쉽지만 화해하는 것은 개가 물구나무를 해가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 보다도 더 힘듭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20년 만에 서로 화해하였습니다.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형 에서는 동생을 복수하기 위해서 일편단심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분노와 미움이 사라지고 입맞춤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야곱이 먼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변화되니까 하나님이 그의 형 에서를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을 하시는 방식입니다. 잠언 16장 7절입니다. ‘7.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는 아름답게 해결이 됩니다. 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길은 먼저 내가 낮아지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내가 변화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에서를 변화시켜주십니다. 내 인생의 에서는 누구입니까? 내 남편일수도 있고 내 아내일수도 있고 내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내 이웃사람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에서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남편 변화시켜주세요. 내 자식 변화시켜주세요. 저 마귀같은 김 집사를 변화시켜주세요’ 가아니라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께 굴복하면 하나님은 내 인생의 에서를 굴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에서가 아무리 강하고 높다 하지라도 하나님이 무너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을 기억하십시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변화됨으로서 내 인생의 에서가 변화되어지는 축복을 누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