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숙곳 과 세겜의 인생

Author
kgmcc
Date
2021-08-07 23:55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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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33장 12-20절

날짜 : 2021년 8월 8일

<창 33장 12-20절>

12.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을 경험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장 삭개오의 인생 터닝 포인터는 자신이 돌무화과 나무위에 있을때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멈추어 서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라 할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질문 할 때 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각자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처절하게 기도를 하고 난 이후에 야곱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그 첫 번째 변화는 당당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를 향하여 모든 사람들 보다 앞서서 당당하게 나아간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겸손함이었습니다. 자기 아내와 자식들과 종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자신의 몸을 일곱 번이나 굽히며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변화는 지난 주에 살펴 보지 않았지만 야곱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 에게 하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3장 8절 후반부 입니다. 8.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10절 중간부입니다. 10.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그리고 11절 전반부입니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 후반부입니다. 15. ...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야곱이 20년 만에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라는 말이었습니다. 네 번이나 ‘은혜’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형님을 만나뵐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입니다’ 이렇게 얍복강 나루터 사건이후 야곱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사건을 은혜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남을 속이고 사기 치면서 살았던 야곱은 이제 믿기 어려울 만큼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 관한 인생 스토리가 여기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야곱이 사기꾼 같은 외삼촌 라반 집에 맨몸 하나만 가지고 들어가서 힘들게 객지생활을 하다가 20년 만에 두 아내와 열한 아들과 많은 종과 가축을 거느리는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20년 동안 등 돌리고 살았던 형 에서를 만나 서로 끌어안고 눈물 속에 화해를 하였다.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또다시 야곱의 죄성이 드러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야곱의 좋지 않았던 그 옛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또다시 옛날 야곱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또다시 넘어질수 있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20년 만에 만난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2.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우리가 함께 떠나자’ 형 에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수 있는 말입니다. 이 지역은 형에서가 더 잘알고 있으니까 야곱이 형과 같이 동행하면 더 안전한 여행길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에서는 20년 만에 만난 동생 야곱을 생각해서 진심으로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형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13절, 14절입니다.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야곱은 형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형님, 그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만 아직 제 자식들은 어리고, 또 제게 있는 가축들 중에는 어린 새끼들도 있어서 형님의 일행과 함께 걸음을 맞추어서 갈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형님이 먼저 가시면 제가 나중에 도착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야곱이 형의 제안을 정중하게나마 거절 한 것을 보면 이제 야곱이 형에 대한 두려움에서 부터는 해방되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형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이 정중하게 거절을 하자 형 에서가 또 다른 제안을 내놓습니다. 15절 전반부입니다. 15.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형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 네가 나를 찾아오다가 길을 잃어버릴수도 있고 또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수도 있을테니까 내가 내 종 몇사람을 너에게 남겨두고 가겠다. 그러니까 내종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오도록 해라’ 이것을 보면 에서는 형의 입장에서 동생 야곱에게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두 번째 형의 제안도 거절합니다, 15절 중간이하 입니다. 15.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괜찮다는 뜻이죠. 이렇게 해서 야곱은 형의 첫 번째 제안과 두 번째 제안을 모두 거절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이렇게 형의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했습니까? 그것은 서로가 가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이미 믿음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해서 이방문화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는 가나안땅이 아닌 세일에 살고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닌 세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목적지는 세일이 아니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떠나올 때 야곱의 목적지는 세일이 아니라 벧엘이었습니다. 목적지가 달랐던 것입니다. 목적지가 다르니까 가야할 방향도 당연히 달랐던 것입니다. 세일로 간 에서는 이후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훗날 아버지 이삭이 죽었을때에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두 형제가 잠깐 만났다는 기록만 있을뿐 인간의 구속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에서는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요. 인생에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사실 형 에서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인생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방향인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으면 함께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을 헤쳐나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환경과 재능이 있다 할지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면 그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힘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형에서는 세일로 가야 했고 야곱은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의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곱이 벧엘로 가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17절입니다.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숙곳으로 간 것입니다. 물론 장거리 여행으로 인해 야곱의 일행이 지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숙곳에 머물렀다면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잠시 쉬기 위한 행동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또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던 것’ 입니다. ‘우릿간 은 소나 양이 어느정도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도록 터가 넓은 외양간’ 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지은 것은 잠시 휴식을 취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착을 하기 위해서 숙곳에 머물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왜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숙곳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야곱에게 제일 시급한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날 때 가졌던 가장 큰 문제는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 형에서를 만날 생각만 하면 자기 마음이 심히 떨리고 답답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형을 만나서 화해를 하게 되어습니다. 걱정했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다시 예전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울면서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그냥은 보내드리지 못합니다’ 라고 그 몸부림 치면서 간절히 기도했던 그마음이 봄날에 눈녹듯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야할 목적과 방향을 잊어버리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눌러 앉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방심입니다. 사람이 언제 무너집니까? 고난의 때 어려울 때 무너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난 이후 방심하면서 많은 사람이 무너집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전쟁할 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다닐 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고 나라가 부강해져서 이제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되었을때에 무너졌습니다. 한가하게 옥상에서 거닐고 살아갈때 무너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당한 첫 패배는 크고 견고한 여리고 성을 만났을때가 아닙니다. 여리고성을 무너트리고 난 이후 작은 아이성을 만났을때 이였습니다. 여리고 성에 비해 아주 작은 성이었던 아이성이라 방심하고 군사 일부만 보냈는데 패배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큰 적은 환난이나 어려움이 아니라 방심에 있습니다. 방심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바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에 대해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까지 지었던 것’ 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집을 짓고 가축 우리를 지었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지도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17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야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기도하고 난 다음날 아침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그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은혜’ 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형이 무슨말을 해도 ‘형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말했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나니까 방심하고는 숙곳에 머물러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간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여러번 고백을 했던 ‘하나님의 은혜’ 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화장실 가야 할때와 화장실을 나올때가 달랐던 야곱이었습니다. 약간은 어려운 의미이지만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화장실안에 있는 사람이 사색을 하는 동안 화장실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이 하는 사색은 ‘생각할 ’사’ 에 찾을 ‘색’ 이고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죽을 사’ 자에 색깔 ‘색‘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화장실안에 있는 사람은 느긋하게 생각에 잠겨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화장실 밖에 있는 사람은 얼굴이 죽어가는 색이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요. 형 에서를 만나고 난 이후의 야곱은 이제 마음이 느긋해졌습니다. 형 에서의 문제가 해결된 이상 야곱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곳에 오랫동안 머물기로 한 것입니다. 이 야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집과 내 자녀와 내 직장과 내 사업을 위해서 모든 정성과 시간을 다바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전 15장 10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는 고백입니다.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모든 사도보더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정도로 수고하였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더많이 수고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만으로 만족을 하고 살아갈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만 좋아하고 그리고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해선 많은 일을 하지만 진작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년수 와 신앙의 직분과 상관이 없이 숙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입니다.

숙곳에 정착하면서 오랫동안 살고 있었던 야곱은 세겜이 더 좋다는 소식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세겜으로 옮겨갑니다. 18절입니다. 18.야곱이 밧단 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성경에 나오는 ‘밧단 아람’ 과 ‘하란’ 은 다 같은 지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경상도 대신에 영남 그리고 전라도 대신에 호남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란에서 떠났던 야곱은 숙곳에 머물고 있었다가 또 시간이 지나 이제 세겜으로 옯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세겜에 있는 밭을 백 크시타를 주고 삽니다. 19절입니다.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백 크시타에 샀으며’ 그당시 한 크시타 는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양 백마리를 주고 땅을 샀으니까 상당히 넓은 면적의 땅을 샀던 것입니다. 자, 이 세겜은 어떤 곳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러니까 야곱의 할아버지가 되죠)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장막을 짓고 단을 쌓았던 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던 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땅의 일부를 샀고 그리고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20절입니다.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세겜에서 아브라함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을 보면 신앙이 굉장히 성숙한 자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아니하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35장 1절 입니다.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 쌓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숙곳에 머물고 있다가 한참후에 세겜에 와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숙곳도 아니고 세겜도 아닌 벧엘에 올라와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것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세겜에서 드리는 이 예배를 받으셨다면 굳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야곱이 세겜에서 드리는 그 예배를 왜 안받으시는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이 한 자기 서원과는 다른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20년전에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받고 난이후에 야곱이 감격하여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창 28장 20-22절입니다.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것이요’ 이곳에 단을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야곱은 서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벧엘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다 지키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네가 다시 돌아올때까지 너를 지키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다 지키셨고 그래서 야곱은 많은 자녀와 가축과 함께 2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벧엘이 아니라 세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맨 처음 서원했던 벧엘에서 단을 쌓고 예배드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지난날 내가 하나님께 했던 서원 중에 잊어버린 서원이 있는가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야곱이 형식적으로 적당히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중심이 없이 적당히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2절과 3절입니다.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으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은 야곱이 가족들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난후 벧엘로 올라가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세겜에서 드린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아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제단을 쌓으면서도 이방신상과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적당하게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야곱처럼 적당하게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입이 있고 눈이 있고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은 이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입을 벌려 하늘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기 위함에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바로 예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는 사람들은 예배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배 드리고 싶지도 않는데 예배를 안 드리면 무엇인가 찝찝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는 성도님도 있던데 하나님이 보험 회사 사장입니까? 야곱이 세겜에서 드린 예배는 바로 이와 같은 예배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에서와 헤어진 다음에 벧엘로 가지 않았습니다. 숙곳에 머물고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세겜에 와서야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는데 형식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는 숙곳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복 받는 수단이나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는 세겜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녀와 내 집과 내 사업을 위해 많은 수고와 봉사를 하지만 주님을 위해 수고와 봉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숙곳과 세겜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주님의 보좌앞에 나아가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 앞에 내 마음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살아있는 삶의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여정가운데 이해될수 없는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바라옵기는 숙곳과 세겜에 머물고 있지 않고 주님이 말씀하심에 순종한 그 자리인 이 벧엘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