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Author
kgmcc
Date
2020-02-02 17:40
Views
100
본문 : 요한복음14장 16-18절

날짜 : 2020년 1월 26일



 

<요한복음 1416-18>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는 고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고아가 된 사람들이 있고 또 부모가 사고를 당해 고아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파탄으로 인해서 고아가 된 사람들도 있고 천재지변과 같은 사고를 통해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는 고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는 고아라고 하는 단어가 47번이나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고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과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전에서 고아라는 의미를 찾아보면 ‘부모가 없이 홀로된 아이’ 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모가 없이 살아가는 아이가 고아인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아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18절을 다시한번 보시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버려두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고아는 ‘버려진 자’ 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버려진 존재가 바로 고아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에는 영적인 고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고아의 특징은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에도 도움을 구할수 없는 버려진 존재이니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겠습니까?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저희 학교 바로 앞에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저희 학교에 다녔는데 제가 4학년에 올라갈 때 그 고아원 출신중의 한명이 저희 반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고아원 출신인줄 알지 못했습니다만 며칠 지나면 알게 되잖아요. 고아원 출신인 것을 알고는 반 친구들이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 저와 가장 친한 친구가 그 고아 친구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저와 가장 친한 친구가 그렇게 하니까 저도 그 친구 때문에라도 그 고아 친구와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 아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두세번 고아원 출신 아이들과 한반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다 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당연할수도 있겠죠. 이렇게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고아라 할수 있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이런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런데 미국 시카고 심리학 교수인 존 카치오포 박사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존 카치오포 박사는 외로움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20년 이상을 연구해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외로움에 관한 한 전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전문가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가 50대 이상 남녀 2천명을 대상으로 6년동안 외로움이 우리 인간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를 해서 그 결과를 1년전에 발표한적이 있습니다. 이 존 카치오포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서 조기 사망하는 비율이 두배나 더 높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비만에 걸린 사람들보다도 조기에 사망할 확률이 두배 가까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존 카치오포 교수는 ‘사람들은 비만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사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은 비만이 아니라 바로 외로움이다’ 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외로움은 곧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외로움 속에서 계속 지내다 보면 절망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럼으로 절망과 외로움은 따로 구분되는 파이프 라인이 아니라 같은 선상의 라인 일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아처럼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리고 옛날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정보와 더 좋은 환경속에서 살고 있지만 이전보다 더 많은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속의 고독’ 이라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웃고 행복한척 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로움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신 다음에 아담 혼자 사는 것을 보고는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만물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혼자 외롭게 사는 것을 보시고는 좋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돕는 베필인 하와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가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살아가면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내가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고아가 되지 않게 됩니다. 외로움과 고독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습니까?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는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이후에 붙잡히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신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셔야만 했나요? 우리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가난이 왔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 인생은 눈물과 상처와 슬픔속에 살아간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왜요?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요.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실때에 ‘다 이루셨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어로는 ‘테텔레스타이’ 인데 다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죄값을 완전히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진 값을 다 지불하시고 무덤까지 내려가셔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하늘나라로 가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40일동안 이땅에 계셨다가 오백여명의 성도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주님은 떠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을 가진 몸으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보혜사로 와서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6절입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가(하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또다른 보혜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보혜사이신데 또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요? ’곁에서 돕는자‘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육신의 몸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가 다시 와서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오순절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믿는 성도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2천년전에 우리를 위해 이땅에오셔서 우리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날에는 믿는 성도인 우리안에 영으로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언제까지요? 영원까지입니다. 본문 16절 후반부입니다. 16.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23절입니다. ’23.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땅위의 모든 종교는 우리 인간이 신에게 먼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을때에 그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상의 사람들이 이러한 놀라운 신비를 알수 있겠습니까? 한번 물어보십시다. 주변에 불신자나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신비를 알고 있던가요? 절대로 알수 없습니다. 왜요? 그 이유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절입니다.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이유는 그들은 성령을 받은 적도 없고, 성령의 역사를 본적도 없고, 성령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교회도 안 다니면서 안다고 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알리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17절 하반부입니다. 17.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을 받지 못한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성령을 받은 너희들은 알것이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 놀라운 신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에는 어떤날인가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이후에 성령님께서 오시는 그날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각 사람에게 임하시는 그날에는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이렇게 연합이 되어져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을 통해서 안다는 의미가 아니고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의미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니까 이것처럼 더 확실히 아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힘이들고 어려울 때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서 기도조차도 하지 못하고 방황할때 성령님께서 말할수 없는 탄식함으로 우리를 위하여 도우십니다. 그래서 그 순간을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인 올바른 것인지 분별하게 해주십니다. 절망하고 실망한 일이 있을 때 성령님은 말할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이러한 성령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를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이 성령님을 모르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를 왔다갔다하는 껍데기만 종교인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갈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 거하는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단지 우리가 마음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접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1. 내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것은 곧 믿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른말로는 마음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문 밖에서 서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실패를 해서 살아갈 소망이 다 없어졌을 때 우리 마음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 마음이 무너질때도 우리 마음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내가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할때도 주님은 우리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불편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힘들어 할때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이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집 문앞에 와야 문을 두드릴수 있는 것 아닙니까? 멀리 있는데 어떻게 문을 두드릴수 있겠습니까? 아시분도 계시겠지만 영국의 화가 홀만 헌터씨가 그린 ‘세상의 빛’ 이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이집 문에는 담 넝쿨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 주인이 오랫동안 집문을 열지도 않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집의 손잡이가 바깥쪽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집 주인이 문을 열어야만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센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죽은자도 살리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 마음의 문만은 강압적으로나 폭력적으로 여시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줄때까지 주님은 그저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던 그밤에도 주님은 바깥에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눈이 내리고 서리가 내리던 그 추운 날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인데 영접한다는 것은 내가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의미는 둘째로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왜 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까? 요한 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서로 잡아먹자는 의미입니까? 식사를 하자는 의미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그당시 유대인들은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함께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겠다고 하는 표현은 정말 친한 친구처럼, 신랑 신부처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은 관계성에 좌우됩니다. 다시말해서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교제를 나누는가에 따라 행복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때는 내가 높은 신분이 되고 내가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환경에 살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높은자리에 앉을 때 행복할 것 같으면 왜 대통령을 지내셨던 분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까? 돈이 많을 때 행복해질 것 같으면 왜 재벌 기업 회장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풍부함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보리고개를 경험했습니다. 5-6월달이 보리고개 시기이니까 지금 이때부터 먹을것이 점점 떨어져서 6월까지 힘들어 할때입니다. 가을에 추수한 벼 곡식은 이미 다 먹었고 보리는 6월 말이 되어야 수확이 되니까 보리 수확하기 전까지 산에서 산나물을 캐서 먹든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든지 어짾튼 이시기를 넘어서야 했던 것이 보리고개 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옛날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유엔에서 발표한 2015년도 전세계 행복지수를 보면 158개국 중 우리나라는 47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자살 지수가 세계 제 1위인데 어떻게 행복지수가 47위가 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행복지수를 측정한 기초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행복 지수 등급을 매겼는가 살펴보니까 4가지 자료를 근거로 했는데 첫째는 그나라 기대치 수명, 2. 그 나라 선택의 자유 정도 3. 그 나라 사회 보장제도, 그리고 4. 그나라를 보는 세계 여론의 시각 을 근거로 해서 행복지수 등급을 매겼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진국일수록 유리한 것이지 실제로 행복지수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오래 오래 산다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입니까?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많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입니까? 저는 음식점에 가면 너무 선택할것이 많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합니다. 그냥 주면 되지 왜 그렇게 선택하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지요. 선택할것이 많은 것 하고 행복하고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나라를 바라보는 세계 여론의 시각이 그 자기나라 행복지수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주변 나라 사람들이 그나라 참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실제로 행복한 것입니까? 2015년 유엔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행복지수 47위는 별 신뢰성이 없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갤럽 여론 조사에서 3월 20일 행복의 날을 맞추어 전세계 143개나라의 행복지수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갤럽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143개국중 118위입니다. 그런데 이 갤럽 조사가 어떻게 행복지수 측정을 했는가 하면 나라별로 15세이상 1000명씩을 무작위로 선정을 해서 직접 전화나 일대일 면접 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해서 다섯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1. ‘오늘 몇 번 웃었습니까? 2.’오늘 하루 받은 피로를 잘 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3.’오늘 하루 존중을 받으며 지냈다고 생각하십니까?‘ ’ 4. 오늘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5.’오늘 하루 즐거웠다고 생가하십니까‘ 이렇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서 행복지수 등급을 매겼는데 우리나라는 143개 나라중 118위이었습니다. 저는 이 갤럽 여론 조사가 훨씬 더 합리적이고 현실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 갤럽 조사 발표에 의하면 잘살지 못하는 중남미 나라가 전부 탑 10에 들어갔습니다. 파라구아이가 1위이고 과테말라는 경제순위는 118위이지만 행복지수는 2위 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나라가 프랑스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중부 지역에 위치한 리무젱은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습니다. 리무진이 아니라 리무젱입니다. 그리고 리무젱 못지않게 아름다운 장소로 이름이 난 남부지역에 위치한 코트 다쥐르도 세계적인 아름다운 풍경과 아름다운 집 풍경을 자랑한답니다. 그런데 일년전에 프랑스에서 행복지수 등급을 매겼는데 리무젱과 코트 다쥐르가 하위이었습니다. 반면에 생드니라고 하는 지역이 프랑스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았는데 그 지역에 볼만한것이라고는 생드니 성당 하나밖에 없답니다. 그 외는 볼것이 없는 서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랍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행복지수가 높은가 조사해보니 이 생드니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비율이 전체 24퍼센트 이었던 것입니다. 4사람중에 한명이 어린 아이인 것이죠.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사람들보다 서로 서로 관계를 더 많이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행복지수가 높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행복이라는 것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라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관계에서 시작되어집니다. 관계가 깨어져 있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아도 행복해질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와 관계를 맺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서 8장 1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믿는 성도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 즉 아들의 영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외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의 영인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도우시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언제나 아들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심으로서 행복하고 복스런 신앙생활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