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쓴물
<출애굽기 15장 22-27절>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영국 출신으로서 조오지 후레드릭 왓츠 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둥근 지구를 하나 그려놓고 그 지구위에 어떤 여인이 앉아서 아주 슬픈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하아프를 연주하는 그림 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눈에는 붕대가 감겨있어서 앞을 볼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 여인이 연주하고 있는 하아프에는 줄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한 개의 줄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오직 한가닥의 남은 줄만 가지고 하아프를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희망> 입니다. 희망의 특성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하는 것을 화가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죠. 전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이 ‘희망’ 의 그림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이 그림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아프 악기의 줄은 원래는 마흔 일곱 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아프 가 개량이 되어서 스물 여덟 개의 줄로 되었다고 합니다마는 그래도 현악기 중에서는 가장 줄이 많은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하아프에 있는 많은 줄 만큼 처음에는 우리 인간에게도 희망과 꿈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꿈과 희망의 줄은 하나씩 하나씩 끊어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저마다 마지막 남은 한가닥의 줄에 희망을 걸고 연주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지구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생 인 것 입니다. 하아프에 있는 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갈 때 마다 연주하는 사람에게는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옛날 제가 전도사 시절 때 교회에서 기타를 치면서 찬양 인도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기타를 치며 찬양하던 도중에 기타줄이 끊어질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제 기타줄이 끊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열심히 찬양을 따라 부르고 계시고 저도 기타줄을 새로 갈기 위해 찬양을 멈출수는 없는 입장이라 줄이 끊어진 기타를 치면서 찬양 인도를 할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날은 기타줄 하나가 더 끊어질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기타를 치면서 찬양 인도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제 곁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찬양을 도와주었던 제 아내는 제 기타줄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피아노 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평상시보다도 더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더 뜨겁게 찬양을 따라 부르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 많았던 꿈과 희망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갈 때 마다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시련의 연속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나의 시련이 지나가면 또 다른 시련이 다가 옵니다. 한 색깔의 시련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종류의 색깔의 시련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은 누구나다 겪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시련을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시련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이 시련을 극복할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시련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시련을 만날 때 극복할수 있는 원리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과 시련이 와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 해낼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광야에서의 시련이 가지고 있는 특성 첫째는,
1. 은혜 받은 직후에 나타남본문 22절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까?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들이 추격해 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해야 할 길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 바다에 빠져 죽든지 아니면 되돌아가서 애굽 나라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아주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인간의 방법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바닷물을 좌우로 갈라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바다 한 가운데를 마치 메마른 육지처럼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진 홍해바다 사이로 뒤따라 오는 애굽 나라 군사들을 바닷물로 다시 뒤덮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군사들이 모두 바닷물에 잠겨 죽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기쁨과 감격은 굉장히 컸을 것입니다.
‘야, 이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따라가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된다!’
이러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기쁨과 감격스런 마음을 가지고 광야 생활을 한 것은 불과 사흘 동안이었습니다.
‘...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물이 없다라고 느낀 것은 사흘이 지나서입니다. 그런데 홍해바다를 건너후 광야에 물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나마 사흘은 견디어 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알수 있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마동안은 물이 없는 광야를 걷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시련을 극복해낼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사흘 동안입니다. 그래서 사흘마다 은혜를 받고 살아가야 한다고 해서 수요예배 와 주일 예배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평생동안 수요예배나 주일예배 때마다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성도님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두 번째 사실을 명심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바로 시련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난 직후에 존재한다는 것 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선지자 8백 5십 명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이방 선지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이 분노하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열왕기상 19장 2절입니다. 2.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러니까 이세벨이 엘리야 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내일 이맘때 너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에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하게 되면 신들이 나에게 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너무나 심한 분노와 저주가 담긴 이세벨이 하는 말에 엘리야 선지자가 두려움을 가지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여자의 분노는 굉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 850명을 물리치고 이겼던 엘리야도 한 여인의 분노에 찬 저주의 말에 겁을 먹고 도망을 가버렸던 것입니다. 어째든 시련과 시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이어서 온다고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교육관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그 건축이 끝나자 마자 교회에서 분열이 생기고 교회가 쪼개지는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이 다 끝나고 나면 그다음 단계로 일어나는 과정은 목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은 성도들이 얼마후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수 있습니다. 은혜는 은혜입니다. 축복은 축복입니다. 하지만 어제의 축복과 은혜가 오늘의 축복과 은혜로 계속 된다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일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개런티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은혜 뒤에 오는 시험을 조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입니다.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는 시련의 특성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난후에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시련이 가지고 있는 특성 둘째는,
2. 문제가 바뀌어 이어짐.23절입니다.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부터 삼일동안 광야에서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막 길을 가고 있는데 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고통스런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물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마실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라 시련의 모양이 바뀌어진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물은 물인데 써서 마실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라 시련의 모양만 바뀌어진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의 해결은 물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하루종일 물, 물 하면서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늦게 잠자리에 들때까지 온통 물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까? 모양이 바뀌어 졌을뿐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나긴 여정 끝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가나안땅에 마침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땅에 기근이 온 것입니다. 비가 내려야 하는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아래 남쪽에 큰 나일강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브라함이 왜 내려갔습니까? 물을 찾아 갔던 것 입니다. 물이 있어야 농사도 짓고 양과 가축을 키울수 있고 자기 가족들도 살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애굽 바로왕이 자기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가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문제의 모양이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공부만 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문제 모양만 바뀌어 졌을 뿐입니다. 대학 문제에서 취업의 문제로 문제 성격만 바뀌어 진 것입니다. 연애를 하고 있는 두 젊은 남녀는 결혼만 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반대와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해도 또 다른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양만 바뀌어 진 것 뿐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라의 쓴 물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우리 인생이 그렇게 추구해왔고 소망했던 것이 사실은 문제 해결책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쓴물을 만나게 될 때 제일 먼저 가져야 할 마음자세는 원망 불평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원망불평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 보다는 ’마라는 마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쓴 물이 있기 때문에 쓴 물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바다를 가르시고 그 갈라진 바닥을 마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그 장애물을 넘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라는 마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수 있는 기회가 되는 축복‘ 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시련은 어떠한 모양으로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는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실 시련이 가진 특성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련이나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극복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만난 이 시련을 극복해나갈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본문 25절입니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과 문제를 만날 때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는 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 하시기 위해서 시련과 문제를 허용 하실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영화관에서 영화 영사기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 내용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화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5절입니다.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그러니까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물을 만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만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문제 해결책을 말씀해 주십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르키시고 그 나무를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나무를 마라의 쓴물에 던졌더니 그 물이 마실수 있는 단물이 되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마라는 더 이상 고통의 장소가 아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던진 나무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시는 목회자도 계십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그 나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세가 순종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당시 모세는 자기가 던진 그 나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기도를 통해 응답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럴때 쓴물이 단물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마라의 쓴물이 있습니까? 기도를 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서든지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순종해 나갈 때 마라의 쓴물이 달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줄 믿습니다. 그래서 마라라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줄 믿습니다. 바라옵기는 내게 이러 저런 모양의 마라의 쓴 물이 있다 할지라도 기도하심으로서 오히려 축복이 되는 기회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내가 만난 시련을 극복해나갈수 있습니까?
둘째로 엘림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 27절입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마라에서 엘림 사이는 약 11킬로미터 입니다. 마일로 계산하면 7 마일이 조금 안됩니다. 7마일이면 저희 교회에서 한국 그로서리 가게인 G 마트 정도까지의 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 5-6분 정도 거리입니다. 그렇게 먼거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마라와 엘림 사이는 정말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걸으면 마라에서 엘림에 도착할수 있는 곳 입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마라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합니다. 물이 넘칩니다. 그래서 남이 부러워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마시지 못하는 쓴물입니다. 그러니까 마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론 끙끙 앓고 지내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있지만 다 빚좋은 개살구이고 실제는 애물단지 일수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성실한 남편이지만 실제로는 아내의 가슴 멍들게 하는 바람둥이 일수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공부 잘하고 친절한 학생지만 집안에서는 골치 덩어리인 자녀일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남보기에만 그럴싸해 보이는 마라의 쓴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훨씬 나의 속이 상하고 더 고통스러울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라 와 엘림 사이는 그렇게 먼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알려줍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실하지도 않고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면서도 백수 건달로 속만 썩이는 남편들도 많습니다. 공부도 못하고 성질도 나쁘면서 골치 덩어리인 자녀들도 많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성실한 남편이나 공부 잘하는 자녀인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약간의 생각만 바꾸고 좀더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라는 엘림 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지금 엘림이 내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신앙의 여행을 하십시다.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마라의 쓴 물 앞에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책임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을 마라의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시험입니다. 테스트 라는 말 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마라라는 쓴물이 있으면 ‘이것은 테스트이다’ 라는 생각을 할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목이 엄청 마른데 먹지 못할 물이 있으면 ‘이것은 시험이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다 아시겠지만 성경에서 보여주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시험(test)요, 둘째는 마귀의 유혹(tempta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주는 시험인 템프테이션은 우리를 넘어지게 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여 지옥으로 끌고 갈려고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성도가 시험에 들어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면 이것은 틀림없는 마귀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시험은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성도들을 보면서 갈등을 하게 되면 그것은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라의 쓴 물을 주신 것은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마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강한 바람을 사용하셔서 홍해 바다물을 가르셨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들 생명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를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홍해의 은혜와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마시지 못하는 마라의 쓴물이 있거든 이 마라와 가까운 곳에 엘림이 있다고 믿고 인내하십시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마라로 인도하십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이 마라 가까운 곳에 엘림을 준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앙생활 해나가십시다. 바라옵기는 마라를 만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믿음이 성숙한 자녀로 성숙시켜주시기 위해서 나를 마라로 인도하셨다 라고 믿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