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Author
kgmcc
Date
2021-09-11 23:26
Views
247
본문 : 요한복음 4장 46-53절

날짜 : 2021년 4장 46-53절

 

<요한복음 446-53>

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46절을 보시겠습니다.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께서 다시 길랄리 가나에 이르시니’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나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가나와 약 40 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일로는 25마일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콩코드 밀 몰 정도의 거리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왕의 신하의 이 간절한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조금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48절입니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이 왕의 신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그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 할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표적을 구하는 성향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기드온을 들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실 때 그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기드온이 어떤 표적을 구했습니까? ‘하나님, 양털 한뭉치를 타작 마당에 둘 테니까 밤사이에 양털에만 이슬이 젖게 하시고 주변의 땅은 마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사사로 세우신줄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드온이 한번 더 표적을 구합니다. ‘하나님,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 뭉치를 마르게 하시고 주변 땅을 이슬에 젖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정말 믿겠습니다.’ 이렇게 표적을 한번 더 보고난 이 후에야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사로 세우신 줄을 믿고 사사가 됩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2절입니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렇게 그당시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표적을 구하는 왕의 신하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또 다시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절입니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믿겨지지 않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왕의 신하는 믿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왕의 신하가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자기 집에서 일하는 종을 만나 자기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종에게 자기 아들이 낫기 시작한 지가 언제인지 묻고는 아들의 병이 나은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인줄 왕의 신하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왕의 신하는 물론 그 온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본문은 끝이 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처럼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가라’ 고 해서 그냥 돌아가는 믿음을 가진 사람보다는 ‘주님 그냥 빈손으로 못 돌아갑니다. 같이 가십시다’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먼저 왕의 신하가 가진 배경을 잠시 살펴보고 난 후에 왕의 신하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해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으로 문제 해결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왕의 신하 배경

어떤 주석가들은 이 왕의 신하는 당시 가버나움을 다스리는 헤롯왕 다음순위에 위치할 만큼 아주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인지는 알수 없지만 어느정도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이 그당시 서른 살이 된 유명하지도 않은 한 청년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습니까?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의 문제가 아니면 이 왕의 신하는 젊은 청년인 예수를 찾아서 만나게 될 일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난 곳마다 찾아갔지만 자기 아들의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아들은 점점 죽어 갑니다. 이제는 거의 다 죽게 되어서 시간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정이 급하게 되니까 체면이나 신분을 따질 것도 없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이 병이들어 죽게 되었다 라고 하는 사실은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신분이 높은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비극처럼 보이는 사건을 사용하셔서 축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 앞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 앞에 오게 된 동기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소문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헤롯왕의 신하는 이전에 예수님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문둥병자도 고치고 열병 환자도 고치고 맹인의 눈도 뜨게 한다더라- 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어. 언제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것이 없는 법이야.“ 라고 생각하고 말았다면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문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대부분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생 라합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거나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소문을 들었던 것 뿐 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고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셨다. 그리고 뒤를 쫓아오는 바로왕 군사들을 몰살시키셨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40년 동안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 그리고 만나로서 먹이시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족속들을 모두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셨다-.

이러한 소문을 이 기생 라합이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여리고성에 들어온 두 정탐꾼을 극진히 섬겼던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 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라 눈으로 볼수가 없습니다. 귀로 듣을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맹인 바디매오가 가진 믿음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귀로 듣으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로 소문을 듣고 믿어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대부분 소문을 듣고 믿어서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갑돌이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더니만 병이 나았다네. 가난하게 살던 홍길동이 부자가 되었다네, 백수 건달 철수가 요즘 사람이 변했다네.’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자기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기회가 생길때 교회에 나가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는 그 사람들이 그냥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사람이 나올수 밖에 없는 환경이 주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관계의 문제나 혹은 건강의 문제 들로 인해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렇게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믿고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그 환경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사람에게 질병이나 경제 상황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 가족들을 통해 그사람을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주님 앞에 나아오게 되면 극복해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왕의 신하가 가진 믿음은 바로 이 단계를 극복해여 했던 믿음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왕의 신하가 극복해야 했던 내용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어떤 문제를 가지고 주님앞에 갔을 때 만날 수 있는 그 단계를 극복하심으로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 번째로 이 왕의 신하가 극복해야 했던 내용은 시간과 공간적인 한계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역사하는 능력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왕의 신하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소문은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소문은 내 경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본 것입니다. 나는 보지도 못했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꼭 보아야 되고 내가 경험해야 된다고 고집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표적과 기사를 믿는 믿음’ 이라는 것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믿는 믿음 인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고 확신할수 있는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표적을 믿는 믿음’ 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면 먼저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해나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보아야 되고 내가 손으로 만져야 되고 그리고 내가 온전하게 이해를 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갈수 없습니다. 왜요? 천국은 내가 죽어봐야 있는지 없는지 알수 있으니까요. 내가 가보지 않고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을 초월하고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시간과 공간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믿음은 아무나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시간 과 공간적인 한계를 극복 할수 있게 되는 사건을 만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왕의 신하는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 과 공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은 아직 없었습니다. 본문 49절입니다.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 내 아들이 죽기전에 같이 빨리 집에 가십시다’ 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절 전반부입니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가라, 네아들이 살아있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 라는 말씀은 참으로 감사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가라‘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님, 가면 같이 가야지 왜 나혼자 가는 것입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생각이 먼저 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실제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왕의 신하는 믿고 혼자 집으로 갑니다. 50절 후반부입니다. 50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자, 왕의 신하가 혼자 집으로 갔나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함께 갔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 아들이 살아있다’ 는 말씀입니다. 이 왕의 신하는 자기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자기 마음속에 담아두고 갔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은 바로 이 왕의 신하의 모습과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천국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동안 본문에 나오는 이 왕의 신하처럼 주님이 주신 말씀을 내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왕의 신하가 집으로 가는 동안 염려과 불안감이 생길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심이 생길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혼자 집에 갔다가 아들이 낫지 않고 죽어있는 장면을 보게 되면 난 어떻게 하냐.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서 같이 가자고 간청을 해볼까?‘ 이렇게 별별 생각이 다 들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 와 불안감이 생길때마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고 계속 길을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지금 내손에 리모트 컨트롤(remote control)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텔레비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텔레비전을 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렇게 리모트 컨트롤의 능력은 믿으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어떻게 리모트 컨트롤 보다도 못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나의 이 주변 환경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염려가 생길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나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내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주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이 왕의 신하가 극복해야 했던 내용은 인격적인 한계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자존심을 극복해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왕의 신하는 귀족 출신입니다. 헤롯왕의 직속 신하인 아주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이 그당시 별다른 신분이 없고, 이름이 없는 서른살 된 청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본문에 비쳐지고 있는 왕의 신하의 모습은 그냥 엎드려 간청하는 지극히 평범한 한 아버지입니다. 사실 사정이 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왕의 신하라는 신분에 이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신분에 맞게 조금은 권위 있는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요청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네가 지금 내 집에 가서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면 내가 자네에게 섭섭하지 않게 보답해주겠네’ 이런 식으로 말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그렇게 적당하게 자신의 체면을 차리면서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은 쉬운데 처음에는 그렇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왕의 신하도 처음엔 체면을 생각하고 말을 했을지도 모를일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처음에는 이와 비슷한 행동을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가서 부탁합니다. “얘야, 지금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단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켜 보아라‘ 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마리아는 어머니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아들인 예수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부탁이나 요청의 마음도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로서 명령하는 성격도 담겨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여자여 아직 내때가 아니니이다‘. 이렇게 거절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우리가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순서가 바뀌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말하고 예수님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 기분이 상해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마리아는 그 즉시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가 무슨 말을 하시든지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들어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왕의 신하가 순종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가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가서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계획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 왕의 신하가 정말 잘한 일은 바로 믿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50절입니다. 50.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사실 성경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제 3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냥 이해하고 쉽게 넘어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직접 그 당사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냥 돌아갑니까? 바로 내 눈앞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리고 지금 집에서는 내 아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네 예수님 잘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냥 돌아설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와 같이 가십시다. 그래서 제 아들 머리에 손을 얹고 한번만 기도해주십시요" 이렇게 말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기가 처한 입장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과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이성과 경험을 다 놓아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만 붙잡고 순종한 것입니다. "가라." 그러자 왕의 신하는 갔습니다. 그런데 그냥 혼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예수님이 하신 한마디 하신 말씀 그 말씀만 믿고 갔습니다. ‘네 아들이 살아있다’ 그 말씀과 함께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감상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듣고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 행동으로 옮길 때 생기는 것입니다. 믿고 요단강을 건너 갈 때에 강물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그때 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동으로 가라는 건지 서로 가라는 건지 몰랐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동안 살았던 고향을 떠났습니다. 고향을 떠나 긴 여행을 하다가 마침내 가나안땅 세겜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었을 때 믿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 우선 순위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극복해야 할 내용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51절입니다.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이 장면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 생활해나갈 때 영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는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의 길을 갈 때 주님의 천사가 응답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것이 내 신분과 내 인격과 내 자존심에 상처가 되고 심지어는 방해가 된다 할지라도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만나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힘들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처럼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한 실패한 사람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외롭고 자존심이 상한 길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왕의 신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갔다는 것에 있습니다. 기적을 구하는 믿음에서 기적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살아갈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갈때 그 믿음은 주변의 환경을 초월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극복해 나갈수 있는 소망과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동행할 때 그것이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왕의 신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공간적인 한계와 자존심의 한계를 극복하는 참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도 이 왕의 신하처럼 주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