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을 제거하라
<마가복음 11장 20-25절>
20.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21.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산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내가 빨리 목적지까지 가야하는데 내앞에 산이 있으면 그산은 나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산도 이러한 종류의 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야 하는 앞길을 가로막고 그래서 나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산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져져서 내앞에서 없어지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좋은 일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큰 장애물이 해결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산을 바다에 던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이 산을 제거 해 버릴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산을 돌아서 가거나 산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을 제거할 수가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을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 본문의 배경
우선 본문에 나오는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알수 있습니다. 20절입니다.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가면서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그리고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어떤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까? 그 전날 있었던 장면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전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배가 고프신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가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열매라도 따 먹을수가 있을까 싶어서 무화과나무 가까이에 가셨는데 그나무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 나무를 향해서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때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날 아침에 베드로가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를 보자 예수님께서 어제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저주하신 장면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 이 나무를 보세요.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 나무를 향해서 그렇게 저주를 하실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요? 13절 후반부를 보시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배가 고프셔도 참으셔야지 그렇게 저주를 하실 것 까지야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선한 포도원지기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밭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심은지 삼년이 되자 주인이 와서 그 무화과 나무를 살펴보았지만 열매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화가나서 포도원지기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을때가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구나. 안되겠다. 도끼로 이나무를 찍어버려라‘ 그때 포도원 지기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제가 땅을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면 그냥두시고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버리소서‘ 이 비유에서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은 어떻게 해서든지 열매를 맺게 할려고 하는 모습으로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때로는 포도원지기로 때로는 일꾼의 모습으로 그리고 신랑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일관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비춰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직 열매를 맺을때가 아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당연한데 그 나무에다가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평상시의 모습이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어도 변호해주시는 예수님이신데 지금은 많이 다르신 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제 곧 십자가에 매달리시게 될 예수님께서 너무 스트레스가 쌓여서 이렇게 행동하신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유월절 시기에 맺히는 ’파게‘라는 첫 열매가 있고 그 이후에 순차적으로 열리는 ’테에나‘ 라는 열매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파게‘ 라는 첫열매가 있을까 해서 찾았는데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책망하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사실 저주하시는 그 장면만 보시면 그렇게 해석할수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체 문맥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 방법입니다. 그리고 저주하신 그다음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행동하신 이유를 설명해주십니다. 본문 23절입니다.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음을 가지고 말을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저주의 말을 하니까 무화과 나무가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면 기도하고 믿음을 가지고 행하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라고 하는 교훈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문제의 산을 제거할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산을 제거할수 있는 길
첫째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22절입니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본문 23절 과 24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믿음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3절 후반분에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절 후반부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고‘. ’믿으라‘ 이렇게 지금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관용을 베푸셨지만 믿음에 대해서만은 아주 엄격하게 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와 가버나움 마을에 들어가실 때 백부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낫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집에가서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니까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직접 저희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백부장의 신분에서 말만하고 가지 않아도 일이 진행되어집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제 하인이 나을 것을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리고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하십니다. 영육간의 질병을 믿음으로 낫게 할 수가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시간과 공간과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배안에 물이 들어오고 배가 흔들려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배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막 흔들어 깨웠는데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시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까 바다가 잠잠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오는 풍랑을 믿음으로 이겨낼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처허 마태복음 9장을 보시면 네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이고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오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네명의 친구가 가진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이 좋은 사람과 사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여기에서 얻을수 있습니다.
이어서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와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당시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지만 이 여인만이 ‘내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낫게 되리라’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딸아 안심하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짐으로서 자신의 병이 낫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걸어가시는데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이렇게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그 두 맹인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너희들의 눈을 고쳐줄것을 믿느냐“ 그러자 두 맹인이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맹인들의 눈을 만져주시면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눈이 보이게 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타나는 사건만 보아도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들을때가 있습니다. “에이, 믿어도 안되던데요. 제가 믿음을 가지고 했는데도 똑같던데요” 심지어는 이런 말을 들을때도 있습니다. “아이고, 믿음을 가지고 사업을 했는데 완전히 망했습니다. 다시는 믿음이라고 하는 말에 안 속을 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말을 해도 주님이 보시기에 참 믿음이 아닐수 있습니다. 내 욕심일수가 있고 또 참 믿음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직 때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이전에 내가 아직 해결해야 할일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습니다” 라고 시작을 했다가 “아니던데요.” 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결과가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약화시킬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실패의 경험도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기 이전에 밟아야 하는 한 과정 인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이전에 많은 경우 실패를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믿음은 머리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가슴, 이 마음으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음은 머리보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시면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예수님 귀신이 이 아이를 죽일려고 이 아이를 자주 불과 물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으시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도와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일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이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가 복음 9장 24절입니다. 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내가 믿나이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다음에 고백해야 할말은요. ‘나의 믿음이 적은 것을 도와주소서’ 해야 앞뒤가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하고나서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말합니다. 이 아버지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병이 낫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마음에는 믿음이 온것입니다. “저 사람들처럼 내 아이도 나을수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생긴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머리로 한번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 가슴은 뜨겁고 그래서 믿음이 있는데 머리로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 이 아들의 귀신이 쫓아낼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와같은 행동을 보일때가 참 많습니다. 말씀을 들을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서 마음에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웬지 뜨거워 집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후 집에가서 시간이 날때 머리로 다시 생각 하면서 원 위치로 돌아갈때가 많습니다. 집에서 드라마나 세상 뉴스를 보면서 예배 시간에 내 마음에 들어온 믿음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입니다.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 하지 말라”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 네 머리를 의지하지 말라’ 라는 뜻입니다. 사실 내 마음에 들어온 이 믿음을 지키기는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이성적이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연어처럼 물살을 거꾸로 치고 올라가는 것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온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훈련과 경험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기간동안 훈련과 시험의 과정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오랜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야곱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뜨거운 믿음이 올때 머리로 계산하지말고 즉시로 행동을 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볼수 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시간의 훈련과정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입니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어 머리와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내마음에 믿음이 올때 뜨거운 가슴으로 행동을 하실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장애가 되는 산을 제거할수 있는 길
둘째로 내가 입으로 선포할 때 일어납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오면 그것을 말로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23절입니다.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을 하라’ 는 것입니다. 입으로 선포하면 그 내용이 내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생겼던 것을 말로 하게 되면 그것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교실에서 영어를 듣기만 했는데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자꾸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 자꾸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능력이 나타내 보이신 것은 말씀을 할 때 이었습니다. ‘바다야 잠잠하라. 나사로야 나오라. 소녀야 일어나라. 네 침상을 들고 가지고 가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난 이후에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할때 그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말로 선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만하고 생각만 해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을 해야 합니다. 산이 들려서 바다에 던져지게 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될수 있다고 말씀 하시고 그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믿음의 말을 하면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게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주의 말씀을 하시고 나서 그 말씀대로 무화과 나무가 마르게 되는 실물 교육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제가 잘 알고 있는 어느 여자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집사님은 그동안 힘들게 살아왔지만 교회 일에 늘 앞장을 섰습니다. 바쁜 생활 와중에도 교회 구역장과 교회 친교의 일을 맡으면서 언제나 남을 도우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의 생활을 해왔습니다. 많은 섬김과 봉사를 했지만 특별히 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한국에서 이곳 미국으로 온지 얼마되지 않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차로 운전 연습을 시켜서 그사람이 운전 면허증을 딸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집사님은 iob 이 없이 집에만 계시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당시 Two Job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섬김과 봉사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차 운전 시험에 계속 떨어지니까 시험이 까다롭지 않다고 소문이 난 다른 주에까지 데리고 가서 시험을 치루게 했습니다. 그래서 운전면허증을 따게 해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집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되면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수영장이 있는 집을 살게 될 것입니다. fire place는 두 개가 있고요 지하실도 있고 땅이 원 에이커 정도 되는 집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진 이 소망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집사님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되기가 불가능 해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두 딸이 있었는데 중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이었고 조그마한 타운 하우스에 렌트를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집사님은 집 이야기만 나오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영장이 있고요. fire place 는 두 개가 있고 그리고 지하실이 있는 집에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최소한 원 에이커 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집이 뱅크럽을 해서 싸게 집이 나왔는데 그 집이 바로 이 집사님이 그렇게 원했던 스타일의 집이었습니다. 수영장이 있고 fire place가 두 개가 있고 지하실이 있었는데 원 에이크가 되는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이 집사님을 너무 좋게 보고 있었던 어느 한분이 하루는 이 집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 여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사람이 돈 4만 불을 빌려 줄테니까 이돈으로 작은 가게를 하나 사서 형편이 낫게 되면 갚아라 고 하면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그 돈으로 가게를 보지않고 그 집을 사는데 다운 페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사고 정확하게 6개월 후에 그 집값이 두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년 만에 세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담보로 캐시 아웃해서 돈으로 가게가 딸린 집을 사는데 다운페이 했습니다. 지금은 집이 일곱 채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5년 만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중에 그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집에 관한 말을 할때마다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듣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요 믿음이 생길 때 일단 말을 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을 해야 내가 가진 질병이 물러가게 됩니다. 말을 해야 내 가정의 문제와 내 사업의 문제가 해결될 줄을 믿습니다. 그럼으로 시간이 날때마다 믿음을 가지고 말을 할 수가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산을 제거하는 길
세번째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말을 선포하지만 산이 옮겨지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때는 내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는가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혐의가 있거든’ 이라는 의미는 뒤틀어진 일이 있거든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뒤틀려 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 줄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지금 예수님은 ‘사람의 잘못’ 이라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잘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분명히 잘못한 남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자기가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짜증이 생기고 성질이 나도 그냥 묻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에서도 그 불의한 재판관은 자기가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틀어지는 것이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길은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해나갈 때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으면 내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런 비뚤어진 관계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말을 선포하며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살아갈 때 내 앞에 아무리 큰 산이 가로 막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산은 들리워 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산은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신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믿음의 선포를 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신앙생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앞길에 장애가 되는 큰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게되는 기적의 역사를 경혐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