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남은 때를 어떻게 살것인가?

Author
kgmcc
Date
2021-10-30 21:55
Views
27
본문 : 베드로 전서 4장 1-6절

날짜 : 2021년 10월 31일

 

<베드로 전서 4장 1-6절>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제가 어릴 때인 1960년대에는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60세가 채 안되었습니다. 기대 수명이란 의미는 사람이 태어난 이후부터 생존 할 것으로 기대하는 평균 수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때는 60살이 되면 장수하셨다고 해서 환갑잔치를 크게 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에 남녀평균 기대 수명은 62.3세 이었습니다. 그런데 2021년 우리나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기대 수명은 83.3년입니다. 그러니까 50여년 사이에 수명이 무려 21년이나 더 오래 살게 되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남자의 기대 수명은 80.3세이고 여자의 기대 수명은 86.3세입니다. 그러니까 60세 환갑이 되신 남자인 경우에 앞으로 더 남은 기대년수는 20년 이고 여자인 경우에 남은 기대년수는 26년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버드 의대 교수인 데이비드 싱클레어 박사는 우리 인간이 조만간 150세까지 살수 있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주장 하고 있습니다. 구글이 설립한 바이오 기업 칼리코(Calico)는 인간수명을 500세까지 연장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고 합니다. 500세까지는 아니겠지만 과학자들과 의료진들의 연구로 인해 앞으로 인간 수명이 연장 되는 속도는 더 빨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내용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사람들마다 모두 오래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오래 살아 왔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느냐 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것인가 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지나버린 삶은 내가 어떻게 할수 없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지금까지 살아온 때와 그리고 또 이제 앞으로 살아야 할 때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을 보시면 ‘지나간 때’ 라는 단어가 있고 2절을 보시면 ‘육체의 남은때’ 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2절 입니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남은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남은때’ 앞으로살아가야 할 우리 인생을 본문은 ‘육체의 남은때’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이라고 하는 존재는 영원하지만 이 육체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하지만 이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쪼그라들고 낡아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최근에 과학과 의학이 발달해서 100세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조금 더 연장되어진 것 뿐입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다 예외없이 영혼을 담고 있는 이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앞날을 ‘육체의 남은때’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과 또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온 인생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 훨씬 더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 살아온 인생보다 훨씬 더 짧으신 분이 있습니다. 올해 발표한 우리나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남자 기대 수명이 80세 정도이니까 제 경우는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훨씬 더 짧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갈수록 점점 더 심각해지는 문제를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크고 심각한 문제는 우리 인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혜자라 할지라도 자기 인생의 남은 시간을 알지는 못합니다.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아니면 한달 두달이 될지 아무도 알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끝나지 모르는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육체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육체의 남은때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예수님과 동일한 마음의 갑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갑옷을 삼으라 여기에 갑옷이란 평상시때 입는 옷은 아닙니다. 전쟁할 때 입는 옷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육체의 남은때 를 말씀하면서 갑옷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육체의 남은때가 곧 영적인 전쟁 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이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게 편안한 옷을 기준으로 해서 입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라고 하는 의미는 무장하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앞 내용을 보시면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이니까 주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주님이 가진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무장하며 육체의 남은때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가진 마음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육체의 남은때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남은 이 인생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아갈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은 여생을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수가 있을까?’ 우리는 주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마음에 무장을 하고 남은 육체의 때를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멸망시키시고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더 이상 고난이 없다고 가르치는 이단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어느곳을 보아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까? 모두가 다 고난과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자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체의 남은 때를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지내며 살아갈수 있을까 생각하며 살아가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한다면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버릴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마음의 무장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갑옷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영적인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사실 마음의 무장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무장이 잘되어 있으면 웬만한 고난이 와도 두렵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무장이 되어있지 않으면 조그마한 어려움이 와도 도망가게 됩니다. ‘한번 시도해보지 뭐’ 이렇게 시작을 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요?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무장을 하지 않고 마음의 갑옷을 입지 않으면 실패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어떠한 고통이나 아픔이 온다 할지라도 참고 버티겠다 라고 굳게 마음의 무장이 되어있는 사람에게는 웬만큼 고난이 와도 견뎌낼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권투 시합하는 선수들을 보십시오. 링에 오른 권투 선수들은 대부분 마음의 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큼 맞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권투보다 훨씬 더 거칠게 경기를 하는 격투기가 더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격투기를 하는 선수의 고백을 우연히 유투브에서 들어본적이 있었는데 격투기 시합을 하는 그당시에는 아무리 맞아도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주먹에 맞아 자기 광대뼈가 함몰되고 눈알이 빠질 정도가 되어도 그당시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강하게 마음을 먹고 경기를 하면 아무리 심하게 맞아도 경기중에는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한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마음의 무장이 중요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공생애 활동을 하시는 동안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예수님께서는 불평하거나 원망 하신적이 없습니다. 도망가거나 피하신 적도 없습니다. 왜요? 마음의 무장을 하고 마음의 갑옷을 입고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을 해나가면 고난을 받을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생활을 하면 알면서도 모른척 해야 할 때 가 있습니다. 손해를 보지만 그냥 넘어가야 할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그럼으로 이 고난은 곧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인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왔을 때 그 순간을 이길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지니신 마음으로 무장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럴 때 억울해도 참고 손해 보아도 참을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순간 순간마다 열 받아서 살수 없게 됩니다. 평상시처럼 보통의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억울하고 자존심 상해서 못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예수님이 지니신 그 마음으로 마음의 무장을 하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남은때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2절 입니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남은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묵상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 성도들 중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는 하지 않고 맨날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전서 4장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 입니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또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을 보시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두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고 두번째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1. 소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3절 입니다.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이 무엇입니까? 앞부분에 나옵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가 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복수라는 의미는 그만큼 세상에 많이 가득차있다는 것입니다. 섹스와 술취함과 우상숭배 즉 탐심은 바로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보면 얼마나 많은 섹스가 난무합니까? 지금은 코로나 로 인해 전보다는 덜하겠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만 해도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새벽에 젊은 남녀들이 모텔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쓰러져 먹은 것을 토한채 잠을 자는 사람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볼수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현대인의 대표적인 우상숭배라 할수 있는 탐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폼나고, 더 멋지게 살아갈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3절 마지막 부분을 다시한번 보시면.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말을 이렇게 적용하면 안됩니다. ’내 개인으로는 마음껏 한번 폼나게 살아보지 못해서 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족할때까지 한번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한번 살아보고 돌아서겠습니다‘. 이런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온 그때의 기간이 얼마이든지 간에 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음란하고 술취하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왔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제 끝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족하다‘ 라고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남은 인생을 허비 하지 말고 좋지 못한 옛날의 습관을 끊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옛날 과거에 대해서는 좋던 나쁘던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그때는 이방인의 뜻입니다. 정욕으로 살았던 때입니다. ‘야 그때가 좋았지. 그때가 그립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BC와 AD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고 난 후가 분명히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죄 때문에 십자가 매달리셔서 고통가운데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죄에 끌려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생활과 습관을 끊어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일이 생기게 됩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까? 아닙니다. 그반대 입니다. 세상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4절입니다. 4.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고 조롱한다는 것’ 입니다.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이 술을 끊으면 친구가 그냥 있습니까?. 빈정거리고 조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무서워 일찍 집에 들어가는 샌님’ 이라느니 이런저런 흉을 보고 놀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삶은 소극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삶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하나님은 어떤자를 심판하십니까?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그리고 탐심에 젖어서 살아온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입니다.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탐심에 젖어서 살아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이 즉 하나님이죠. 하나님앞에서 자기가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를 위하여(심판을 위하여입니다)’ 심판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을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죄값을 치루셨다고 하는 이 복음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믿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이를 위하여(심판을 위하여) 죽은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 하고 구제와 기도를 많이 하면 살아생전에 믿지 않았던 영혼이라도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냥 아주 재미있고 멋지게 놀다가 죽게 될 때 남은 재산이 얼마가 되든지간에 자녀들에게 물려주면서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헌금생활을 해다오‘ 이렇게 부탁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세상에서 마음대로 놀다가 자식들이 드리는 헌금과 기도로 인해 천국에 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해석은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본문의 해석은 역사적 배경이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을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이 다시 올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곧 오신다‘ 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지내는 동안 믿는 성도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당시 살아있는 초대교회 성도들 마음에는 예수님이 오기 이전에 내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하는 의심과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서 죽은 자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난후에 죽은 성도들이고 살아있는 자도 역시 믿는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믿은 성도들은 육체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앞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당시 생존해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5, 6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육체의 남은때에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앞에 가서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이 고해서 심판을 받게 되는 일을 피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을 보시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내가정과 내 이웃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이 내안에 들어오십니다. 이 성령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반면에 마귀는 죽이고 갈라지게 하는 영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결정해도 하나님의 사람은 살리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육체의 남은때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은 생각보다 더 빨리 오실수 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이 육체의 남아있는 시간에 마음의 무장을 단단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전쟁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갑옷을 입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뜻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죽으나 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