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Author
kgmcc
Date
2020-02-02 18:01
Views
84
본문 : 이사야 43장 4절

날짜 : 2020년 2월 2일



 

<434>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내용을 공동 번역으로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4.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 그래요. 우리는 주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염둥이요 사랑스런 존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탄의 음성을 듣고 살아갑니다. “야 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 너는 실패한 인간이야.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이상한 짓을 하고 살아가니. 네가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것이라고 있니?” 이런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것입니까?

‘너는 내눈에 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이야. 너는 내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요 사랑스러운 존재야. 너는 내 사랑이야. 다른 사람들이 너를 무능하고 별볼일 없다고 해도 나에게는 귀하고 가치가 있는 보배야.’

여러분 보석은 어디에 있을지라도 보석인 것입니다. 비록 땅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고 할지라도 보석은 보석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보배이고 보석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보배요 보석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다‘ 이 속담이 가진 뜻은 남이 어떻게 보든지 간에 자기 눈에 마음이 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바로 제눈에 안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요, 부모의 눈에는 자기 아이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없습니다. 남들이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예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부모의 눈에는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귀하고 가장 예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저와 여러분이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죄성을 가진 내 눈으로 나를 바라볼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내자신이 한심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또 내안에 염려가 계속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죄를 범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줄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네가 내눈에 ....‘ 내 눈에 하나님의 눈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입니다. 우리는 내가 형편이 없고 하찮은 존재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서 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후 남 유다가 멸망하게 될 시기에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네가 내눈에’ 에서 ‘네가‘ 는 당시 배경으로 보게 되면 죄악으로 인해서 나라가 망하게 되고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에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네가‘ 는 실패한 사람이고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속에서 비참하고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속에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너는 내눈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다. 너는 내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요 내사랑이야.“ 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자식은 부모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을 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행복해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행복할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하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내 자녀를 사랑하는데 내 자녀는 얼마나 나를 사랑할까? 나는 내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은 나를 얼마나 사랑할까? 이렇게 우리는 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오래된 사건이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3년 2월 18일 우리나라 대구에서 지하철 화재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당시 정신 지체자 한사람이 방화를 하는 바람에 불이 일어나서 192명이 목숨을 잃었고 148명이 다쳤습니다. 그 사건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을때 그사건의 현장이 있는 중앙로에는 그때 사고로 인해서 슬픔을 당한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슬픈 사연을 적어서 기록들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때 기록된 사연들중에 이런 내용의 사연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침에 딸아이를 학교에 보낸 저는 집안 일로 분주하게 보내고 있엇습니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조금전에 학교로 간다고 나간 딸 아이었습니다. 그 딸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엄마 나 없이도 살수 있어?‘ 그때 저는 장난삼아서 딸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엄마는 우리 딸이 없이도 잘살수 있는데” 그러자 딸아이는 또 물었습니다. ‘엄마 날 사랑해?’ 이 물음에는 저는요 ‘아침부터 얘가 왜이래?“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엄마 날 사랑해” 라고 또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짜증나는 투로 다시 대답을 햇습니다. ‘아침부터 얘가 왜이래? 엄마는 지금 바쁘단 말이야’ 그때 이 딸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엄마 나는 엄마 없이는 못사는데... 그래서 내가 먼저 가나봐. 엄마 사랑해. ’ 그러면서 주변에서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저와 딸의 마지막 통화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그 사건현장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는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것을 가슴아파하면서 이 사연을 그 현장에 남겼던 것입니다. 딸이 죽어가면서 했던 말은 ‘엄마 날 사랑해?’ 이었습니다. 불길이 치솟고 뜨거운 열기 때문에 숨을 쉴수 없는 그 현장속에서도 그 딸아이는 전화를 걸어서 엄마 날 사랑해? 라고 묻고 엄마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를 사랑했던 그 딸은 ‘나는 엄마를 사랑하는데...‘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두 다 기억하시겠지만 9.11 테러로 인해 뉴욕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휩싸여 무너지기 직전에 그 빌딩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 전화를 걸어서 했던 말은 ’I love you, Good bye' 이었습니다.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되기 직전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남겼던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현장에 속에서도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묻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임종의 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화도 바로 사랑의 확인입니다. 떠나는 사람도 사랑했다라고 말을 하고 떠나 보내는 사람도 사랑했다고 말을 합니다. ‘여보 사랑해. 그동안 고마웠어. 얘들아 사랑한다. 행복하게 살아야 해, 아빠 엄마 사랑해요“ 이렇게 떠나고 떠나 보내는 순간에도 사랑을 확인 하고 확인 받고 싶어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주님과 믿는 성도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 비유도 있고 열처녀의 비유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신랑 신부의 관계이다 보니까 서로 서로 사랑을 확인 받고 확인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도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던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어서 사랑의 확인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를 보시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아브라함이 잠을 잘수 있었겠습니까?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난 후에 아침 일찍 아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모리아산에 도착해서 번제단을 쌓고 아들을 죽일려고 하는데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무엇을 테스트 하신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 확인 받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의 관계이니까요. 여러분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재입니다. 사랑은 실재이기 때문에 그 사랑도 반드시 확증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인간들에게 그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롬 5장 8절입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종은 울려야 종인 것이고 장작도 불에 타야 장작인 것처럼 사랑도 확증될수 있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증명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자., 우리에게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1. 내어주는 사랑
본문 4절 후반부입니다. “4....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요일서 4장 10절입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누가 먼저 사랑했는가는 중요합니다. 여러분 비슷한 조건과 환경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때는 누가 먼저 사랑했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비교될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을 때는 누가 먼저 사랑했는가는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왕과 평민과의 관계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영국황실의 왕세자가 저와 여러분의 딸을 사랑한다고 하고 청혼해온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뭐 못이기는체 하고 받아들이시겠죠? 그런데 반대로 저와 여러분의 딸이 영국 황실의 왕세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얘가 미쳤나. 왜이래?” 이러겠죠. 신분과 환경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날때는 누가 먼저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늘 자주 변하기 때문이죠. 우리의 감정은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햇다면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언제나 조건을 따지고 계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건을 따진 사랑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사랑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내어줌의 사랑입니다.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민족들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본문앞에 있는 3절을 보시겠습니다.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구스와 스바도 넓은 의미에서는 애굽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을 속량물로 내어 주셨던 것 입니다. 그당시 애굽은 최 강대국가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볼품이 없는 아주 약하고 작은 나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볼품이 없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대신 값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떻게 돌아올수 있게 되었나요? 바벨론은 당시 바사 페르샤의 나라에 망하게 됩니다. 그 페르샤의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은 유다 백성을 해방시키고 유다를 전초기지로 삼아서 애굽을 정복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고레스 당대에는 그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왕위를 물려받은 캄비세스 시대에 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볼품이 없고 초라한 이스라엘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는 반드시 몸값을 지불하셔야 했는데 그당시의 어마어마한 애굽나라를 몸값으로 속량물로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께서는 별볼일 없고 허물과 죄악투성이 인 저와 여러분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세상에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귀하고 가치있으신 분을 볼품이 없는 우리를 위해 속량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롬 8장 32절입니다.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구하십시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인색하시겠습니까? 믿으십니까? 그래요. 확신을 가지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이 왜 인색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내어주심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 결혼이 불행합니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결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주기 위해서 결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미련 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1. 생명을 대신한 사랑
  2. ...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네 생명을 대신 하리니’ 생명을 대신한 사랑입니다. 죄의 값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값을 지불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죄값이 지불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수많은 짐승들이 인간의 죄값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레위기 3장 2절을 보십시다. 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는 죄의 전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짐승에게 안수할 때 안수하는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야 미안하다 내가 죄로 인해서 내가 죽어야 하는데 너가 내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되었구나. 고맙고도 미안하구나‘ 이런 마음으로 안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짐승은 내 죄를 뒤집어쓰고 각이 뜨여지고 제단에 피를 흘리면서 죽는 것입니다. 사실 그 짐승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 없으신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내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어떠한 죄도 값을 치룰수가 없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의 아들을 못박아 죽이신 것입니다. 로마의 병정이나 세 개의 못이 예수님을 못박은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못박았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되찾으시고자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만히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이 되거든 십자가의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댓가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에는 수고와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수고와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확실히 증명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줄 주님이 아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양을 먹이라 네 양을 치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양을 먹이고 주님의 양을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무감 때문에 마지 못해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운데 아들을 보내주신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고 수고하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죄 많은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깨트려 예수님 머리와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과 눈물로서 예수님의발을 닦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복음 7장 47절입니다. “47.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아들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받게 하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자존심을 내어놓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더많이 꿇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의무감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손해가 있어도 사랑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나를 사랑해서 아들을 내어주신 그사랑 나를 사랑하사 생명을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사랑에 빚진자로서 사랑하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