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행복할수 있는 이유

Author
kgmcc
Date
2021-11-13 21:24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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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신명기 33장 29절

날짜 : 2021년 11월 14일

 

<신명기 33장 29절>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장미꽃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장미꽃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이렇게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가시를 주셔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가시를 준 적이 없다. 나는 가시나무 이였던 너에게 장미꽃을 주었다."

똑 같은 환경 가운데서도 가시를 보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시같은 인생에 장미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과 감사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지만, 불평의 마음과 불평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불평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불평을 하면 ''불행의 문을 열게 되지만'' 감사를 하면 ''행복의 문을 열게 되는 것" 입니다. 불평은 '또다른 불평을 낳지만''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인생이 불행한 사람은 못살고 못 배우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많이 배우고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중에도 불행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계적인 여배우이었던 마릴린 먼로가 못생기고 돈이 없어서 우울증에 빠져 결국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죽은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중에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이런일 저런일을 해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이 우리 삶의 이유이고 행복이 우리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아는 아리스토 텔레스는 ‘인간의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인생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바로 행복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파랑새를 잡을려고 몸부림을 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부림을 치고 노력을 한만큼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얼마전에 발표 된적이 있습니다. 경제협력 개발 기구(OECD) 국가 37개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35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거의 꼴지 수준인 것입니다. 올해 5월달 한국 개발 연구원(KDI)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3년 (2018-2020) 동안 국가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5.85점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GNI)이 2만 달라가 넘었고, 전 세계 7위에 해당되는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IT 산업은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막강한 대한민국이지만 행복지수는 거의 밑바닥 수준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행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아지게 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예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고 좋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옛날에 왕들도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왕들이 지금 우리들처럼 셀폰으로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동영상을 볼수 있었겠습니까? 옛날에 왕들이 겨울에 딸기나 수박을 먹으면서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볼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예전보다 더 많은 소유와 더 좋은 환경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전의 사람들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행복은 지식과 정보의 넉넉함에도 있지 않습니다. 부자중의 부자라고 할수 있는 재벌 100사람과 지식의 상아탑이라고 할수 잇는 박사의 학위를 가진 100사람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이 질문에 87퍼센트가 ‘아니요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돈이 많은 재벌이 행복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지식인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누가 행복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행복의 조건을 반대적인 관점에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에 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소크라테스 제자이기도 한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행복은 부족함에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약간의 부족함이 있어야 제대로 내가 인생의 행복함을 느낄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과 경쟁에서 질때가 있어야 이겼을 때 행복을 느낄수 있고 배고파 보아야 밥을 먹을 때 행복을 느낄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어느정도 일리는 있지만 사실 우리의 부족함이 행복의 조건이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 부족함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갈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하나 행복에 대한 착각은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좋고 나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안에 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잔에 행복을 찾기도 하고 저녁에 잠들기전 와인 한잔에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한순간의 행복은 1될수 있어도 영원한 행복은 될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수도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잘 변합니까? 그러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래전에 행복전도사로 유명했던 최윤희씨가 자살을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사람이 초지일관 주장한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말하며 행복을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진작 본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질병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요,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행복은 한순간의 행복일수는 있지만 영원한 행복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환경이나 소유의 넉넉함도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인간의 부족함도 행복의 기준은 될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불행한 존재로 이땅을 살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행복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9절 앞부분입니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누구보고 하는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이여’ 여기서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인 저와 여러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자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한 환경가운데 있었나요? 아닙니다. 최악의 상태이었습니다. 40년동안 광야를 멤돌고 있었습니다. 아직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들을 이끌어 왔던 지도자 모세와는 이제 곧 헤어져야 상황에 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고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된다 할지라도 가나안땅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쟁을 치룰만한 변변한 무기도 없습니다. 행복할수 있는 조건과 환경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여전히 문제속에 싸여있습니다. 내겐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건강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 장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합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9절 상반부를 보시겠습니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과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인기와 명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구원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구원이 행복의 조건이 될수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와 죽음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행복해질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천년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행복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죄값을 치루어야만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루어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죄의 댓가를 단계적으로 구분하면 부끄러움과 형벌과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이전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뺨을 맞고 침뱉음을 당했습니다. 또한 발가벗긴채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댓가는 형벌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손가락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채찍에 의해 살점이 찢어나가고 가시 면류관에 찔림을 당하시고 한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흘리시면서 ‘내가 목마르다’ 라는 목마름의 고통속에서 죽어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이루었다’ 외치셨습니다. 그말의 원래 의미는 ‘죄값을 다 치루었다’ 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값을 치루어주시기 위해선 이런 고통과 형벌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럼으로 내가 지은죄를 대신해서 온갖 부끄러움과 수치와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으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열매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우리도 부활의 첫열매의 뒤를 이어서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원받는 길은 너무너무 쉽고 단순합니다. 예수님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내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원망 불평을 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보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아나리라 말해라.’ 그래서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오늘날 이 장대는 십자가를 상징하고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좋은예가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우편의 강도이지 않습니까? 그 강도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기직전에 한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믿고 바라본 것 뿐입니다. ’주님, 당신의 나라에 임할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 이놈아 염치가 있거라. 평생동안 나쁜짓을 골라해놓고는 뭐 내가 갈려고 하는 천국에 가기를 소망하니‘ 이렇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이 강도는 천국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쉽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유명한 부흥사 디엘 무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을 믿어보라 반드시 실망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친구를 믿어보라 반드시 헤어질때가 올것이다 명예나 돈을 믿어보라 반드시 잃어버릴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보라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래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해질 사람이 아니라 이미 행복하고 그래서 지금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29절 중간입니다. 29.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이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의미 입니다. 방패와 칼은 평상시에 사용되는 도구가 아닙니다. 전쟁을 치룰때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방패는 방어하는 무기로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칼은 공격하는 무기로서 나의 힘이 되어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28편 7절을 보시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평생동안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방패이심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다윗은 어릴때에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시작한 이후부터 계속해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힘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원수가 얼마나 많은지 시편을 보게 되면 원수라는 단어가 일흔 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그렇게 수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힘과 방패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그 원수들을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를 따라서 도우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인간의 배신과 조롱의 고통에서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이 자식을 죽이고 그 자식이 자기를 반역하고 죽일려고 하는 비극속에서도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고난을 면제해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많은 고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주시고 칼이 되어주셔서 싸워주신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길을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영적인 전쟁에 승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29절 마지막입니다. 29.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너의 대적이 너에게 복종하고 네가 그들을 밟을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승리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부터 자기들이 죽을때까지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죽을때까지 영적인 전쟁을 치루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한번 보십시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라고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영광의 칼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할 것이고 너는 그들을 밟을 것이다라고 말씀 합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는 영적인 전쟁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영적인 전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영적인 전투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할 때 진정한 행복자로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할때 하나님이 싸워주셔야만 승리가 가능한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해나갈 때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심으로 말미암아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은 싸우시는 용사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시편 24편 8절입니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그래요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할 때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영적인 전쟁이 시작되면 친히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셔서 전쟁에 참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용사이십니다. 방패가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행복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해결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칼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자로 살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여전히 문제가운데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가운데 있습니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인것입니다. 왜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칼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평생 살아가는 동안 영적인 전쟁에서 결국에서 승리하며 살아가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이번 11월달은 감사의 달입니다. ’행복하라’ 라고 말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라고 말해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늘 감사할 내용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심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