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축복된 동행

Author
kgmcc
Date
2021-12-04 22:52
Views
40
본문 : 누가복음 24장 13-35절

날짜 : 2021년 12월 5일

 

<누가복음 24장 13-35절>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의 두 제자가 자기의 고향인 엠마오로 내려가는 모습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의 거리가 25리 라고 하니까 약 11킬로미터 되는 거리입니다. 마일로 계산하면 7마일 정도 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시면 'Seven miles' 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7 마일이면 여기 이 교회에서 아시안 가게인 G마트 까지의 거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차로 운전하면 10분이 조금더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는 두제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시게 되면 한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18절 전반부입니다.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한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입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의 이름은 밝혀주지 않아서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이름을 알수 없는 예수님의 제자를 우리는 나 자신으로 생각하십시다. 지금 이 두 제자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14. 이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이 모든 된 일’ 이란 문장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님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건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고 하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헛소문이고 부질없는 헛소망인 것으로 여기면서 그들은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는 이 두 제자가 지닌 마음을 우리는 본문 17절에서 알수있습니다. 17절 후반부입니다. 17.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왜 슬픈 빛을 띠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21절을 보시면 그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속량은 자유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지배에서 자기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줄 사람인 것을 믿고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바랬던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지 못하고 그냥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린 순간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졌던 꿈과 소망도 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제자는 무너져버린 꿈과 소망 때문에 슬픔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된 어떤 사건이 나의 꿈과 소망을 좌절 시킬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비통한 마음으로 엠마오 인생길을 걸어갈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렵고 그래서 다시 도전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를 해야 할지 비참한 마음으로 엠마오 인생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소식은 이러한 상태에 있던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함께 동행하여 주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15절입니다.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입니다.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지금 이 두 제자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어떤 드라마 나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이 자기들 가까이에 오시고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불행이란 인생의 실패와 꿈이 깨어졌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처럼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곁에 다가와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가까이 오셔서 동행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까?

첫째는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6절입니다.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눈이 가리어져서 이 말씀은 눈에 붕대를 감았다는 뜻이 아니라 영안이 어두워졌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장면이 기록된 마가복음 16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2. 그후에 그들중 두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수가 없었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영안이 열리면 어떠한 모양으로 오시더라도 예수님이심을 알아볼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주된 이유는 영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할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영안이 가리워졌기때문에 진리 되신 예수님을 알아볼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지게 되면 아무리 많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를 볼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발람 선지자가 영안이 어두워지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영안이 열리니까 자기 길 앞을 가로 막고 있던 하나님의 사자를 볼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안이 어두운 발람이 영안이 열린 나귀보고 빨리 앞으로 가라고 꾸짖고 있는 모습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종 게하시는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의 군대만을 보았지만 영안이 열린 엘리사는 아람의 군대만을 보지 않고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영안이 열려야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영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불신앙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25절입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더디 믿는 것은 지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고 있는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시라고 전도를 하면 이렇게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사정이 있어서 힘들고 나중에 믿을께요. 안 믿겠다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는 믿고 신앙생활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사람은 믿고 있습니까? 나중에 믿게 될수는 있겠지만 지금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믿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영적인 소경이 되게 합니다. 자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사실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로마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시켜줄 해방자로서만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려왔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22절 후반부터 24절까지입니다. ‘22. ...그들이(여인들이죠)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3절에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24절 후반부에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보지못하고, 보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많지만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이 가리워졌고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동행을 하여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주님과 동행을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이 나와 동행을 할 때 어떤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주님과 동행할대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주님과 말씀을 서로 나누게 됩니다.

17절 전반부입니다.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그리고 19절 전반부입니다.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 ‘무엇이냐? 무슨일이냐?’ 이것은 질문입니다. 이렇게 물으신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궁금하고 그래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질문을 왜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질문을 하면 당연히 그 질문의 대답이 돌아오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대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 어떤 문제로 인해 힘들면 힘들다고 고백해야 하고, 좋으면 좋다고 그냥 이야기를 하면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 입니다. “주님 요즘 직장생활이 힘듭니다. 주님 요즘 제 몸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주님 요즘 사업하기가 힘들어 지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보통 힘든게 아닙니다. 힘들어 죽을지경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 하루 생활을 해나갈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왜 우리와 동행하십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입과 마음을 닫고 있으면 그것은 불행이요 비극인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또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2.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32절입니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뜨겁습니다. 왜 마음이 뜨거워집니까?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내 마음에 닿게 되면 내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영이요 생명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우리의 영은 막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아서 죽어있는 영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아무 느낌이 없고 지루하니까 자동적으로 꾸벅 꾸벅 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기뻐합니다. 믿는 성도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회복이 되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해나갔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을 보면 그들의 마음에 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입니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니까 내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수가 없다고 예레미야가 고백합니다. 마음에 불이 붙어있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려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시면 이렇게 가슴에 불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나갔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야는 그당시 남유다를 향해서 바벨론에 항복을 하라고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말을 하면 자기 민족들이 예레미야 자신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있을려고 했지만 가슴에 불이 붙어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가만 있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가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인해 마음에 불이 타오는 사람들이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뜨거운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서 견딜수가 없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할 정도로 하나님의 일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불이 활활 타올라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뜨거워서 못견디겠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라옵기는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차갑고 냉냉한 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3.주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30절과 31절입니다.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할때 비로소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 예수님이셨군요’ 이렇게 그들이 깨닫게 되는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십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곧 말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귀에 들리지 않아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말씀과 동행하며 살아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다른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 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집사님의 모습으로 때로는 목사님의 모습으로 때로는 이웃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주십니다. 힘들어하고 있는 내게 와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시는 집사님을 다시한번 보게 되는 순간 그 집사님은 평범한 집사님이십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힘과 용기를 얻게 되어 목사님을 다시 쳐다보았지만 목사님은 여전히 평범한 목사님이십니다. 말씀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힘과 소망을 가지게 되는 순간 주님은 사라지십니다. 이렇게 오늘날 주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동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가던 길을 계속 갔나요? 곧바로 가던 길을 돌이키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33절입니다. 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곧 그때로 일어나’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가던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열한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모닥불 하나하나 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닥불 하나로선 이 거칠고 차가운 이세상을 밝히고 따스하게 해주기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리고 쉽게 꺼져버릴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는 성도들이 모닥불처럼 함께 모여서 불을 밝히고 세상을 뜨겁게 하며 이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들처럼 인생의 꿈과 소망이 깨어지고 사라진것에 대해 절망과 슬픔의 길을 걸어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절망과 슬픔은 내 꿈과 소망이 깨어지고 사라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이 왜 나와 동행하십니까? 내 삶의 이야기를 듣고 또 주님이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교제를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외로우면 외롭다고 주님에게 이야기를 하십시요.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 하십시요.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서든지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로하시고 내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기만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망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인생길을 가는 동안 주님과 동행할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세상에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큼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보지 못하고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을 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리의 영적인 눈이 잠시 가리워져서 동행하시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다 이해하십니다. 말씀을 듣고도 더디 믿는 불신앙 때문에 절망과 낙심한 마음을 가지고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시고 함께 동행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어떠한 일을 당할때도 어떠한 환경속에 있다할지라도 내곁에 오사 나와 함께 동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동행입니까?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나는 주님과 동행하며 인생길을 가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의 생활을 하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