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한복음 14장 1-3절>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심 하는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런 명령에 대해서는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고 회개를 하지만 근심을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이 명령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갈때가 참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살인과 간음과 폭력은 상대가 분명하고 또 드러나는 죄이지만 근심 염려 불안 같은 것은 내마음속에서 일어나서 내자신을 향하고 내마음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드러나는 죄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죄가 본인에게는 더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 간음 폭력은 상대를 힘들게 하고 상대를 죽이지만 근심 불안 염려는 내자신을 병들게 하고 내자신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있는 근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그냥 방치해두면 이 근심이 점점 더 자라서 더 큰 근심을 가지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우리의 인격과 영혼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심하지 말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심하지 말아야 하지만 근심하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내안에 근심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살아있으니까 근심 염려 불안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글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나 걱정이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나 공포가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슬픔과 절망이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견딜수 없을 정도의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보고싶고 그리운 마음이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수치스럽고 창피한 마음이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잠이 오지 않고 입맛이 없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제가 언급한 이 모든 것들은 즉 ‘근심 염려 아픔 눈물과 수치 분노와 그리움’ 이런것들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경험할수 있는 감정들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어떤 근심 어떤 불안 어떤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으로 인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깨닫기만 하고 내가 여전히 걱정과 염려 불안속에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의사가 진단만 하고 처방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내 몸이 떨리고 추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의 몸이 떨리고 한기가 오는 것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진단만 하고 집에 돌려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방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근심 걱정을 이겨낼수 있는 처방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처방의 내용입니까? 1절 전체를 보시겠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을 이길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믿음입니다. 근심을 이길수 있는 해답은 바로 믿음입니다. 자 한번 따라해보십시다. ‘근심의 해답은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믿으라 라고 하는 동사가 바로 현재형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안에 일어나는 근심과 염려와 불안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오늘 지금 현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믿어야지 내일 믿어야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지금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지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도 지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도 지금 내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알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믿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믿음이 필요한가 하면 지금 현재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현재 믿음이 있어야 내가 염려와 불안과 분노를 이기고 살아가게 될줄 믿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아버지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아주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 이라고 표현하기도하고 ‘세째 하늘 삼층천‘ 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이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편의 강도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을 낙원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누가 복음 23장 43절입니다. ’43.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는 ’내 아버지 집‘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천국은 아버지의 품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의 품안에 있으면 가장 안전함을 느낍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장 22절입니다.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거지 나사로가 죽었는데 천사에게 이끌려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들의 아버지의 품이 바로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천국을 아버지의 품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은 따스함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안전하고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16장 25절을 보시면 지옥불에 떨어진 부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25. ... 이제 그는(나사로이죠)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위로를 받고‘ 천국은 아버지의 위로를 받는 곳입니다. 이땅위를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땅위를 살아가는 동안 내아픔 내 눈물 내 고통을 아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위로의 보상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품과 같기 때문에 따스함이 있고 위로가 있고 안전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천국을 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돌아가야할 영원한 본향이 천국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강남갔던 제비도 봄이 되면 돌아옵니다. 연어를 보십시오. 연어가 큰 바다로 나갔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 알을 낳고 죽을때가 되면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먼거리를 돌아오면서 죽기도 하지만 약 80퍼센트가 돌아온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은 짐승들에게도 태어난 본향을 돌아가고자하는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에게는 더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 영혼이 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죽을때가 되고 나이가 들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고향을 그리워하고 본향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을 나그네의 삶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지금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본향이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세상을 다 떠나야 될 사람들입니다. 죄 많은 이세상은 내집이 아닙니다. 슬픔과 고통 눈물이 많은 이세상은 저와 여러분이 영원히 머물수 있는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 이세상에 머물다가 주님이 우리는 부르시는 그날 아버지의 품에 들어가게 될것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집, 천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일까요?
내 아버지의 집은 첫째로 풍성한 곳입니다.
2절 앞부분입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곳이 많도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2절 하반부와 3절 상반부를 보시면 거처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2절 하반부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절 앞부분입니다.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자 예수님께서 천국에 거할곳이 많다 말씀하시고 이렇게 거처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천국은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국하면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세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그렇게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머물수 있는 장소와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천국이 실재하는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면 내가 너희에게 천국은 그런곳이 아니다 라고 벌써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은 없다라고 너희들에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천국은 실재하는 장소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종종 요한 계시록에 말씀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공간이 어느 정도일 것이라고 계산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6절을 보게 되면 새 예루살렘 성의 길이와 높이와 너비가 각각 만 이천 스다디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만 이천 스다디온 을 킬로미터로 바꾸면 약 2천 2백 킬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니까 새예루살렘성의 크기가 얼마인가하면 길이가 2천 2백 너비가 2천 2백 높이가 2천 2백 킬로미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일로 따지면 1400마일정도 됩니다. 여기서 플로리다 까지가 약 700마일이니까 두배 거리로 길이 너비 높이가 요한이 본 천국의 사이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차지할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을 연구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지금까지 살아온 전세계인구의 숫자는 천억명 정도로 볼수 있는데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약 2백억 정도로 생각을 한다면 천국에도 산이 있고 강도 있고 들판도 있어야 하니까 다 빼고 계산을 해보니까 한사람이 차지할수 있는 공간은 길이가 500미터 넓이가 500미터 높이가 500미터 되는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백미터 공간이라면 굉장히 넓은 공간이 되겠죠. 그러나 천국은 이렇게 계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예루 살렘 성의 크기는 상징적인 의미이지 문자적으로 계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 성이 가로세로 높이가 똑같이 네모반듯하게 되어있다는 것은 천국이 그만큼 안정성이 있고 균형이 잡혀있는 나라인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이천 스다디온이라는 표현은 그만큼 성도들이 살기에 풍족하고 적합한 곳이다라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천국은 물질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집에 거할곳이 많다. 많다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많다라는 개념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풍성함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들어가게 될 그 아버지의 집은 부족함이 없이 풍성한 곳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질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많아도 내게 부족함이 있을수 있습니다. 먹을것이 많고 귀한 것이 많아도 내가 먹고 싶어하는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부족하거나 아쉬움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예수님께서 많다라고 하는 개념은 어느것 하나 부족하거나 아쉬움이 없는 풍성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먹고 싶으면 먹을수 있고 만나고 실고 가고싶은 곳 얼마든지 갈수 있는 그런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위로와 함께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천국이 어떤 곳이냐 하면 예수님이 친히 예비하신 곳입니다.
2절 하반부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러니까 예수님이 떠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가게 될 아버지의 집, 천국이 준비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신 천국에 대해서 환상을 본 사도요한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2절입니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무슨 의미입니까? 결혼식 주례를 많이 해보신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슴하신 내용이 생각이 납니다. ‘내가 지금까지 결혼 주례를 수십번 해보았는데 아름답지 않은 신부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신부가 결혼식 그날을 위해 얼마나 위해서 얼마나 많이 준비를 합니까?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그날을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꾸미겠습니까? 그러니까 결혼식 그날 아름답지 못한 신부는 한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을 한 것 같다 라고 하는 이표현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을 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께서 믿는 성도인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놓으신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천국은 주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3절입니다.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다시와서의 의미는 짧게는 부활이고 길게는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땅에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재림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믿는 성도인 우리를 천국에 데리시고 가서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이전에 믿는 성도인 우리가 이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게 되면 주님이 우리를 맞이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주님이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동안 너가 믿음을 지키느라고 힘이 들었지?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느라 힘이 들었지? 남편과 자녀와 건강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지? 우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3-4절입니다.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눈물에도 종류가 참 많습니다. 그 모든 종류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날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시는 모습이 바로 내눈에 흐르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천국이 천국 다울수 있는 것은 내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그곳에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가 멀리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집은 새로 수리해서 잘 꾸며져있고 정말 예쁘게 정리 정돈 되어있는데 아무도 없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집에 들어갔을 때 나를 진심으로 반겨줄 사람이 없다면 그집은 집이 아니라 그냥 하우스 일뿐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국가 공무원이셨는데 그당시에 한번 일하러 나가시면 24시간 근무하시고 그다음날 집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시면 곧바로 어머니를 찾으셨습니다. ‘야 니 엄마는 어디갔냐?’입니다. 그리고 집에 없으시면 별로 기분이 안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그집에 나를 반겨줄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땅을 떠나고 저 천국에 들어갈 때 그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우리는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주님이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에 천국이 천국다운 것 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품으로 가셨지만 신학교수이기도 한 고 김정준 목사님께서 ‘내가 죽는날’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 한바 있습니다. 내가 죽는날 : 내가 죽는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눈물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인 까닭에.
내가 죽는 날에는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근심을 없이 하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는 내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에는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 광채를 보여주기 때문에.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인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되는 출발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이땅을 떠나게 될지는 모릅니다. 질병으로 세상을 떠날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수도 있습니다. 오래 오래 살다가 손자 손녀 자녀들이 다 보는 앞에서 평안하게 눈을 감을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떠나게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오라하시는 그날 그아침이 나에게 있어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눈을 감게 되는 그날 그나라에서 우리는 영혼의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땅위에서 그동안 당해왔던 괴로움과 아픔을 다 벗어버리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아버지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예비해놓으신 거처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영광의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힘들고 어렵지 그러나 근심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해놓은 영원한 집이 있잖아. 내 따스한 품이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근심하고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 근심 걱정이 생길 때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저 천국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이겨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