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부림절과 성탄절

Author
kgmcc
Date
2021-12-11 23:31
Views
160
본문 : 에스더 9장 17-22절

날짜 : 2021년 12월 12일

 

<에스더 9장 17-22절>

17.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18.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19.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20.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21.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22.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어지는 날들이 있습니다. 프로포즈를 받았던 날이나, 결혼기념일 그리고 자녀들이 태어난 날 이런 날들은 잊어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잊어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된 날이라든지,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빠졌던 날이라든지,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던 이런 날들은 정말 잊고 싶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날들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잊혀지지않고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날들을 절기로 구별하여 지켜왔는데 그 절기 중에 하나가 바로 바로 부림절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부림절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부림절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한 것 같아서 오늘은 부림절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부림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아각 사람 하만에게서 구원하여 내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 바로왕 에게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이라고 한다면 아각 사람 하만에게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부림절입니다. 그런데 이 부림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만과 모르드개와 에스더 이 세명의 인물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을 모르면 부림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부림절의 역사적 배경

먼저 부림절이 생기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BC 586년에 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해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바벨론은 페르시아(메데·바사)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다사람들은 비록 포로출신의 신분이었고 또한 소수 민족이었지만 그들중에는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벨론 포로 70년의 역사가 끝나고 1차로 예루살렘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제 2차로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그 사이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를 통치하고 있었고 하만이라는 사람이 국무총리 이었습니다. 원래 하만은 평범한 관리 출신 이었는데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게 되어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제2인자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 하만이 왕궁에서 나오면 모든 신하들이 다 엎드려 절을 하고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을 보아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던 뻣뻣하게 서있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바로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왕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만이 왕궁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갈 때 그 왕궁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직업이 문지기이고 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경배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만이 요구했던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엎드려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경배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인간을 경배합니까? 그래서 모르드개는 엎드려 절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하만이 영적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아각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아각이 누구인가하면 사무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말렉 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만은 아말렉의 후손이고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아말렉과 유대인은 철천지원수 지간입니다. 신 25:19절 후반부를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악한일을 잊지말아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옛날 성경인 개역한글판을 보시면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찌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말렉이 너희에게 행한 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해버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까? 왜냐하면 모세의 인도하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 르비딤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지치고 힘들어할 때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했던 족속이 아말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영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연약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어둠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성경에서 아말렉은 단순한 한나라의 족속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원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말렉과 같은 어둠의 세력들은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믿음의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고 믿음의 전진을 방해하고자 하는 세력이 바로 아말렉 인 것입니다.

지금도 아말렉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습니까? 피곤하여 대열에서 이탈한 자들입니다. 신앙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연약하여 믿음의 대열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사탄의 공격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 불편하고 힘든일이 있더라도 언제나 신앙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이기 때문에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하만은 분노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문지기가 그것도 원수지간인 유대인이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분노가 일어난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르드개가 속한 유다민족 전체를 몰살 할려고 계획합니다.

그당시 페르시아 왕국에는 약 7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당시로는 적지 않은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숫자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왕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에스더 3장 8절과 9절입니다. “8.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9.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에 3:8-9절)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그러면서 은 일만 달란트를 내어 놓습니다. 그당시 페르시아왕국은 그리스와의 전쟁으로 나라의 돈이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페르시아 제국의 1년 수입이 은 일만 오천 달란트이었다고 하니까 일만 달란트 라면 이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액수 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왕은 자기의 반지를 손에서 빼어 하만에게 주면서 “너의 소견에 좋을대로 행하라” 고 허락합니다.

이렇게 왕의 허락을 받아낸 하만은 정월 13일에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를 전국에 내려 보냅니다. 그 조서의 내용은 바사제국(페르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입니까? 12월(아달월) 13일입니다. 어떻게 이날을 정했나요? 제비 뽑아서 이날을 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금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누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죄도 없이 유대인이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지만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얼마 있으면 자신이 죽는 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마냥 재롱을 피우며 뛰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사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하만에게 속한 일당들은 유대인들을 볼 때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죽어 없어지게 될 사람이라며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죽어야 할 사람이기에 유대인들은 얼굴을 들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노와 슬픔과 비통 속에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채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이 어인이 찍힌 또 다른 내용의 왕의 칙령이 전국에 내려졌습니다. 이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은 유대인이 멸절당하기로 정하여진 그 날 12월 13일에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모든 자들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정 반대되는 왕의 칙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유대민족을 진멸할려고 한 하만의 음모가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에 의해서 들통이 났기 때문입니다. 왕은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하여 하만의 음모를 깨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를 잡아 죽이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높은 나무에 하만을 매달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만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왕후 에스더에게 주었고 모르드개는 하만을 대신해서 페르시아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을 따라 자기들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더 9장 16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기를 죽일려고 했던 원수들을 잡아 죽였는데 무려 7만 5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 8장 17절을 보면 본토 백성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유대인이 되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8장 17절입니다. “17.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새로 주민등록을 하는데 민족을 유다인으로 바꾸어서 기재해 달라고해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대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달월(12월) 13일에 원수를 갚고 다음날인 14일에 쉬면서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대역전의 은총을 허락하신 이 날을 기념하여 12월 14일과 15일을 부림절로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21절입니다.

“21.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이날이 바로 부림절기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부림이라는 말은 ‘부르’ 의 복수형인데 ‘부르‘ 는 ‘제비’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하만 일당이 ‘언제 유다인들을 몰살시킬까?’ 정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이스라엘 달력으로 마지막 달인 아달월 12월달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원수를 갚을 때 13일 하루만이 아니라 13일과 14일 양일간 원수를 갚았기 때문에 부르의 복수형인 부림을 써서 부림절 ‘제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부림절은 어떤 날입니까? 22절 전반부입니다.

“22.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부림절은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은 날입니다.

그리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부림절은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입니까?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부림절은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 즉 좋은 날, 찬송이 되는 날입니다. 부림절은 초상집이 변하여 잔칫집이 된 날입니다.

부림절은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된 날입니다. 부림절은 굵은 베옷을 벗고 기쁨의 옷을 입게 된 날입니다. 부림절은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된 날입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된 것도 역전의 은혜이였고,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갔던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도 역시 역전의 은혜이었습니다. 대적들은 다니엘을 죽이기 위하여 사자 굴속에 던졌지만 하나님은 다니엘을 살리시고 그 대적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덤속에 들어갔던 나사로로 인하여 동네사람들과 나사로 가족들은 초상 분위기었지만 주님은 그 초상 분위기를 잔치집 분위기로 바꾸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감사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도 놀라운 역전의 은혜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값을 지불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잘알고 있는 시편 23편 5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죽일려고 하는 원수들의 목전에서 보란 듯이 나에게 식탁테이블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기를 죽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울의 목전에서 다윗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운동경기에만 역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역전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수많은 역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십시다. 힘들다고 낙망하지 마십시다. 지금 내 모습, 현재 이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전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부림절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칼에 맞아죽을 운명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칼 자루를 쥐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수가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부림절의 영광이 임하기 전 까지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림절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짖누르고 있었습니다. 12월 13일이면 죽어야 되는 그들에게 무슨 자유함이 있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존재의 이유도 삶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예수를 알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림절의 영광이 임하였습니다. 왕으로부터 새로운 칙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의 법에 매임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실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힘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왕의 도장이 찍힌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물리치고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림절입니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해서 이 부림절의 영광을 맛볼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왕후 에스더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유다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왕후이기 때문에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죽지 않고 왕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3일간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청원하여 몇 차례의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 가운데 처해있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에스더의 희생이 없었다면 부림절의 영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라운 역전의 축복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더처럼 죽음을 각오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부림절의 영광을 경험 할수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이 진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이 진 죄값을 다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오늘날 부림절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역전 시켜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우리가 매년 지키는 성탄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주에 성탄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이땅에 오신 성탄주일과 성탄절을 맞이하십시다. 슬픔과 괴로움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하게 하시기 위해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저와 여러분이 이제 믿게 되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내가 힘든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역전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망하고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십시다. 하나님의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올 한해동안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신 성도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코비드 19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육신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지내오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제 거의 다 끝이 났는가 생각했는데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의 등장으로 다시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부림절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이 있습니다. 이 부림절의 교훈을 생각하며 이번 성탄절과 내년 새해를 맞이하십시다. 슬픔을 기쁨으로 초상집을 잔치집으로 변화시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감사와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