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보배를 가진 사람

Author
kgmcc
Date
2022-02-06 00:00
Views
73
본문 : 고린도후서 4장 6-12절

날짜 : 2022년 2월 6일

 

<고후 4장 6-12절>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만도 전세계에서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계산해보면 약 40초당 한명이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통계에 잡혀있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이보다 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숫자는 전쟁이나 테러로 인해서 죽은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입니다. 우리나라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도 자살자 수는 1만 3195명으로 하루 평균 36.1명이 자기 목숨을 끊고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시간 정도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우리나라에서 자살을 하는 사람이 두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수치인데 이는 2018년 이후부터 3년동안 연속 1위입니다. 그이전에는 13년동안 연속 1위를 차지하다가 2017년도에 잠시 2위가 되었는데 다시 1위를 연속 3년동안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서 우리나라는 교통 사고로 죽는 사람보다도 자살로 죽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빗대어서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입니까? 자살 방지 협회에 따르면 자살을 하게 되는 동기는 무려 989개나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허무 때문에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가족들이 동반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울증과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처와 열등감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을 끊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자살의 충동을 느끼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백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성도님들도 계시겠지만 며칠전에 2019년도에 흑인으로서 미스 USA로 뽑힌 체슬리 크리스트 양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60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이 체슬리 크리스트는 미스 USA가 되기전에 이미 이곳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지역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입장에 있는 흑인들을 위해 무료로 변호를 하면서 늘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왔던 미모와 인격과 학식을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왜 자살을 했는지는 언론이 확실히 밝히지 않아서 알수가 없습니다만 여기 샬롯에 사는 그의 지인들에 의하면 아마도 우울증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기 때문에 이런 심리적인 갈등에 있는 사람들의 고백을 유난히 관심있게 지켜보는 편입니다. 자녀를 둔 어떤 아버지는 자녀가 성장해가는데 회사에서는 나오지 말라고 한다면서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으로서의 안타까움에 죽고싶다는 심정을 토로한 글을 보았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어느 한 소녀는 사람들은 왜 예쁜 여자만 좋아할까? 나는 왜 꾸며도 예쁘지 않을까? 성형수술을 하고 싶지만 돈이 없다 라면서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죽고 싶어하는 마음을 토로하였습니다. 자살을 택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백을 보면 대부분 수치심과 열등의식이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배운 것이 없다‘ ’나는 소망이 없다‘ ’나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배우지 못한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외모의 문제도 아닙니다. 자살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1.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7절 상반부입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에 가졌으니’ 성경은 우리 인간은 질그릇에 비유를 합니다. 이 질그릇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두가지만 생각해보십시다.

첫째는 볼품이 없습니다. 질그릇은 진흙을 구워서 만들었기 때문에 겉모양이 투박하고 볼품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사람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가진것도 배운것도 내놓을만한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이렇게 볼품이 없는 질그릇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이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습니다. 땅에 떨어지면 그 즉시 깨어지는 것이 바로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은 뚝배기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 뚝배기 그릇은 무겁다가 보니까 잘못하면 떨어트리기 쉽습니다. 또 바닥에 떨어지면 와창창 요란하게 소리가 나면서 깨어집니다. 아마도 옛날에 시집살이를 해오신 성도님들은 뚝배기나 질그릇을 깨 가지고 시어머니에게 혼나신 경험들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은 강한 것 같아도 연약합니다.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 듣으면 상처를 잘 받습니다. 저는 목회자 출신이라 여러분보다는 그래도 병원 중환자실에 가볼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많습니다만 병원에 가보면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명해나가시는 분들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그사람들에게는 산소호흡기가 생명줄입니다. 산호호흡기를 떼버리면 10분도 못되어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는 영양제 음식을 주사기에 달아서 위장에 직접 넣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러지 말고 그냥 두라고 그당시 열심히 간병하시던 저희 아버님에게 말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부른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영양제 음식 하루 안드시고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부모님이나 배우자 그리고 친칙들의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볼품이 없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둘째로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가진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7절 다시 보시겠습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릇은 그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이 됩니다. 그 그릇에 술이 담겨있으면 술잔이 되는 것이고 물이 담겨있으면 물 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릇에 밥이 담겨있으면 밥그릇이 되는 것이고 찌개가 담겨있으면 찌개 그릇이 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 안에는 무엇이 담겨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보배가 담겨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안에 있는 이 보배는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문맥속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면 이 보배는 첫째로 1.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의미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절에서 ‘우리가 이보배를...’ 이렇게 이어가니가 이 보배는 ‘예수님 즉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빛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생겨난 빛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빛입니다. 이 자연적인 빛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보고 분간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빛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빛입니다. 이 빛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면 우리 인간은 그제서야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빛이 임하면 내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빛을 앞에 있는 4절에서는 복음의 광채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 복음의 광채가 사람들의 마음에 비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한다고요? 혼미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단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복음의 광채가 사람들의 심령에 비추기 시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의 광채가 사람들의 심령에 비추기 시작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복음의 광채가 사람들의 마음에 비추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을 혼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혼미하게 한다는 의미는 보지 못하게 눈을 멀게 한다는 뜻입니다. 눈을 멀게 해서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고 복음을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3절을 보게 되면 바울 이전의 사울이 처음으로 영적인 빛을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 9장 3절입니다.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하늘로부터 빛이 임하면서 바울이전의 사울의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핍박을 하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죄인을 구원하려 이땅에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빛이 임할 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사람들의 심령에 비치게 되면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의미를 꼭 환상을 보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이 영안이 열린다는 말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으로 오늘날에도 이 하나님의 아는 빛 즉 복음의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어둠의 세력들은 떠나가게 됩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치기 시작하게 되면 묶어놓았던 것이 풀어지게되고 저주가 떠나가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광채가 비추기 시작하게 되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이 보배는 무엇입니까?

둘째로 이 보배는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절에 예수의 생명이 11절에 예수의 생명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안에 있는 생명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생명이십니다. 그럼으로 우리안에 있는 이 생명은 사망권세를 이기게 되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인가요? 권력인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지금까지 죽음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던 인간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것도 없다라는 말을 한 나폴레옹도 죽음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이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드 대제도 죽었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진시황제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강한 죽음도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에 의해서는 정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 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 말씀입니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이 육신은 썩게 될 것이고 그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 마지막날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생명의 옷을 입게 될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우주 천지 만물에 예수님의 생명보다 더 큰 능력과 힘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분명히 질그릇입니다. 사람들이 내던진 말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건강을 해치는 그런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안에 이 보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과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내속에 있는 보배 때문에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내 자신을 막 대하는데 그누가 나를 소중하게 대하겠습니까? 내가 내자신을 사랑할 때 다른 사람들도 나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자신속에 있는 보배를 생각하며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보배를 질그릇같은 볼품없는 그릇에 두셨습니까? 좀 더 멋지고 품위있는 그릇에 담아두시지 않고 말입니다. 7절입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는(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이유는’ 심히 큰 능력이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 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오로지 하나님만 영광받으시기 위해서 볼품이 없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저와 여러분안에 보배를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릇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질그릇이 금그릇 은그릇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질그릇은 질그릇입니다. 하지만 담긴 보배 때문에 질그릇이지만 가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질그릇이지만 내 안에 보배를 가지게 됨으로 내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속에 있는 보배 때문에 내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치에 맞게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과 생명의 보배를 가진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보배를 가진자는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것입니다.

8절 상반부입니다,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면초가에 처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만날 수 있는 철호의 기회입니다.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보배를 가진자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8절 후반부입니다. “8.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기대한 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답답할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너무 답답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아도 낙심할것까지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 8장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넘어졌다고 해도 완전히 넘어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 실패했다고 했서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지금 승승장구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사람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속단하면 안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서보면 좋지 않은 결과를 보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반대로 처음에는 서운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직장에서 짤려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을 얻어서 절망했는데 그 병을 통해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되고 가족과 이웃사람과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그럼으로 속단하지 마세요. 지금은 실패이고 지금은 눈물과 한숨이어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안에 있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답답함이 있어도 낙심하며 살아가지 마십시다.

세 번째로 보배를 가진 사람은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9절 상반부입니다.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어느시대에나 교회는 박해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여러분 사실 어느 정도의 적당한 박해와 핍박이 있어야 교회와 신앙은 건강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딤후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박해를 받을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버림을 받았다라고 생각까지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서로 버리기도 하고 버림 받을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네 번째로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9절 하반부입니다. “9.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인생을 살다보면 진짜 거꾸러 뜨림을 당할때가 있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망했습니까? 아니죠. 스데반은 죽어가는 순간에 빛나는 얼굴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을 하고 돌로 자신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게 망한자의 모습입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거꾸러 뜨림을 당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창과 칼에 맞아죽고 총알에 맞아 죽고 돌맹이와 몽둥이에 맞아죽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망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요? 그사람들속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빛과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이기 때문에 깨어지고 거꾸러 뜨림을 당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성경은 스테반의 순교를 망했다라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입니다.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종말입니까? 이것은 망한 자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질지언정 결코 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망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은 망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배를 가진 믿는 성도들은 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더 이상 질그릇만 바라보지 마세요. 더 이상 환경을 바라보지 마세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마세요 더 이상 다른 교회도 바라보지 마세요. 질그릇속에 감추어진 보배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내속에 담겨진 보배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당당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알래스카는 원래 러시아 땅이었습니다. 이 땅은 일년 내내 얼음으로 꽁꽁 얼어 붙은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가 미국에 720만불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땅에는 금광 석유 가스 지하자원이 무려 4조억 달러가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4조억 불이라면 계산이 잘 안될 것입니다. 저도 계산이 안되지만 어마어마한 가치가 된다는 정도는 알수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그 땅속에 4조억 달라가 넘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720만불에 팔았겠습니까? 그들은 얼음으로 덮힌 땅만 보았지 그속에 감추어진 보배를 보지 못햇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성도인 우리가 당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깨어지기 쉽고 볼품이 없어 보이는 질그릇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사망 권세 저주를 이겨낼수 있는 생명의 능력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살아가십시다. 답답함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살아가십시다.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물이 온다 할지라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 뜨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망하지는 않는다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십시다. 우리는 보배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 보배 때문에 기뻐하고 이 보배 때문에 감사하며 이 보배 때문에 넘어져도 일어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인생이 허무하고 괴로울때만다 비록 질그릇이지만 질그릇만 보지 않고 내속에 담겨있는 보배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살아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