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이 복음을 위하여

Author
kgmcc
Date
2020-02-16 20:23
Views
96
본문 : 딤후 1장 8-12절

날짜 : 2020년 2월 16일

 

 

 

<딤후 1장 8-12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양은 OECD 회원국가들 중에서 1위라고 합니다. 특별히 맥주나 와인이 아닌 소주나 위스키같은 독주의 종류는 다른 회원국가들이 마시는 평균의 5배에서 6배정도로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다가 분위기가 고조되면 술잔을 들고 종종 건배를 외치기도 합니다.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할떼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위하여입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승진을 위하여 이렇게 위하여 하면서 건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건배사도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까 2000년대 초반에는 ‘나가자‘로 건배를 했다고 합니다. 나가자! 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 라는 뜻이고 해요. 그리고 당나귀 건배도 했답니다. 당나귀!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당나귀 또 변사또도 있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또 다시 만나기를 위하여, 오바마 라는 건배도 있습니다. 오래 오래 바라고 마음 먹은대로 이루어지길 위하여 라고 합니다. 이렇게 위하여 건배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 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말아야 위하여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위하여‘ 입니다. 11절 입니다.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었노라.‘ 그래요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로 세우시고 복음을 위하여 권사로 세우시고 장로로 세우시고 안수 집사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교회밖에서는 예술가로 세우시기도 하고 변호사로 세우시기도하고 사업가로 세워주셨습니다. 물론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변호사는 정의를 위하여 살아가야 하고 장사꾼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종 은사와 다양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어떤사람은 예술가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싸람은 장사꾼이 되기도 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돈을 벌고 출세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먼저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일까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시기 전에는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 죄와 죽음의 법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결과는 사망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죽어있었고 육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부모님이 내게 물러주신 생명이외에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 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이 복음을 아는 자는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 빚진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주를 증언함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를 증언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당시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헬라 철학사상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헬라사상은 지혜를 구하는 철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헬라 철학사상에 입각해서 볼때에 복음은 너무나 미련하고 우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6장을 보게 되면 바울이 베스도 각하와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기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을 간증합니다. 그리고 그 다메섹 사건이후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해왔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베스도가 간증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도행전 26장 24절 후반부입니다. “24.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철학의 눈으로 보게 되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한 예수는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 인류의 구세주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습니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보시지 그래.’ 라고 조롱할 때 손에 박힌 못을 뽑아버리고 내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미련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믿으니까 지혜를 중요시 여기는 헬라 사람들이 볼때 얼마나 미련하고 우둔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말한 것입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미련하고 우둔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린도 전서1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럼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의해서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게 된 우리는 절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주를 위하여 갇힌자 된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바울은 여러차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감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감옥에 갇혔습니까? 주를 위하여 갇힌자 된 나는 바울은 주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범죄를 해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잇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햇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지금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야 감옥에 갇힌 나를 위해서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바울의 곁을 떠났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 10절, 11절을 보시겠습니다.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디모데 후서 1장 15절을 보시면 바울이 당하는 입장을 더 잘 알수 있습니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한 두사람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떠나버린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울과 같은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바울과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바울의 곁을 떠났습니까? 바울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적으로 보게 되면 소망이 없습니다.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의 마지막은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몇 번 여러차례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다가 보니 이젠 나이도 들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야 겨울이 오기 전에 속히 오너라 그리고 네가 올때에 겉옷을 한 벌 가지고 오라‘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만큼 바울이 처한 환경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핸드린 모올이라는 신학자는 디모데 후서를 읽을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때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부끄러워하면서 바울 곁을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야 주를 위하여 갇힌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바울은 당당했습니다. 바울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바울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감옥에 갇혀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복음을 위하여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복음을 직접적으로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술자리든지 노래방이든지 다 따라니며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썩어지지 아니할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복음을 왜 부끄러워 해야 합니까? 복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복음 때문에 가지말아야 할 곳을 가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한걸음 더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8절 하반부입니댜. “8.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고난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 3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이 왜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진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를 믿으라.’

이렇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슬람교나 불교를 믿고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십시다.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다 똑같습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에도 구원이 있지만 여러분이 믿는 종교에도 구원이 있습니다.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시다가 우리 천국에서 같이 만나십시다.“ 이렇게 말하면 그사람을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별로 갈등이나 어려움도 없이 사람들과 잘지낼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세상사람들과 잘 지내고 살아가기 위해서 복음을 왜곡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살아가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으로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면 고난이나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길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다시보시면 ”8.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면 고난이 생기게 되는데 그때 그 고난을 이겨낼수 있도록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진정으로 경험할수 있는 길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갈 때 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할수 잇는 길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길에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을 위해서 살아갈 때 그 어떠한 고난이 오게 되더라도 그 고난을 극복할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하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죽은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무섭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 때문에 얻게 되는 축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구원을 얻고 복음을 인하여 사업에 성공하고 복음을 인하여 건강하고 잘되는 축복에는 관심이 있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물론 일부러 고난을 자처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난을 일부러 피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일에는 생삭을 내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오면 피해버리는 얌체같은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는 정말 많이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도 하지만 고난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살아가다보면 좋을때도 있지만 힘들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준 복음 때문에 내게 어려움이 있고 손실이 있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9절 보시겠습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거룩하신 소명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거룩하신 소명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제자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부르심을 받았고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요? 거룩한 소명을 위해서입니다. 다시말해서 복음을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부르심은 곧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삶인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후회하는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 중에 후회했던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을 위하고 물질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땅을 떠나는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후회를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은 고난을 받았을지라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원하시면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위해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교사가 되는 길도 있지만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불신자와 낙심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살아가면 그것도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면서 빛과 소금이 되어서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갈때 주변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많지 않은 인생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은 그 인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바라옵기는 복음을 위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