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될때
<에베소서 3장14-21절>
-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영국에 Julian Ellis Morris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릴때 집을 잃어버린 미아가 되어서 거지의 신분으로 청년이 될때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청년이 재벌의 친 자식인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람이 부자가 되고 난 이후에도 거지 생활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대궐과 같은 큰 집에서 잠을 자고 난후에 아침이 되면 거지 옷차림을 하고 집을 나갑니다. 그리고는 시장이나 전철역을 중심으로 해서 비누와 삼푸를 팔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구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이나 두번은 멋진 양복을 입고 리무진을 타고 런던거리에 있는 최고급 레스트랑에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정도는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비롯해서 유럽의 여러 도시로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그 다음날에는 또 다시 거지 옷차림을 하고 시장이나 전철 역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거지 옷차림을 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생활을 하는 생활이 자기 마음에 편안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쥴리안 엘리스 모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책에서 보면서 이사람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챤의 모습과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순간에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두번씩 교회에 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또 일년에 한 두번 특별한 집회에 참석을 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거나 그리고 또 특별 집회를 마치고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예전과 변함없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쥴리안 엘리스 모리스가 부자집 자녀 신분이지만 거지로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성경은 말씀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풍성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풍성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7절 후반부에서 18절입니다. 17.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사랑’ 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18절 후반부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풍성한 삶을 살아갈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풍성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첫째 나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이 성숙해지고 강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내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끼? 그 앞을 보시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성령은 바로 예수의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의 능력,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내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게 되어 결혼해서 같이 살고 싶으면 금반지나 다이아 몬드 반지를 주면서 프로포즈를 합니다. 그런데 그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기 전까지 그 금반지나 다이아 몬드 반지를 신문지 종이나 비닐 봉지에 싸서 보관을 합니까? 아닙니다. 예쁘고 튼튼한 보석 상자안에 넣고 보관을 합니다. 그리고 프로포즈할 때 자기가 사랑하는 그여인에게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믿는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가 있는 성령을 내 마음의 그릇에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성만찬을 하시는 그날 저녁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가 (성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보혜사라는 단어를 영어성경을 보시면 niv 영어성경에서는 comforter 위로자이죠. 그리고 kings james에서는 counselor(상담자)로 나옵니다. nasb에서는 helper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보혜사는 이러한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원래 헬라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 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내곁에 있으면서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상담자가 되기도 하고 협조자가 되어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성령을 성부 하나님께서는 내가 성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내마음의 그릇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점점 더 알게 되어짐에 따라 내마음속에 담긴 성령의 능력이 점점 더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속사람이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강건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될수록 이런 고백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4장 16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의 육신은 늙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점점 더 알게 되어 질수록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은 더욱더 성숙하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도 인내할수 있게 되고 이해력이 넓어져서 포용할수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수가 있나‘ 가 아니라 ’그럴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더 알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늙어가도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날로 날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둘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17절입니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에서 ‘계시게 한다’ 라고 하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내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 원문을 보시면 ‘카토이케오’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헬라 원어에서 집에 계신다 라고 할때 두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카토이케오’ 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파로이케오’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똑같이 ‘계신다. 거하신다’ 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이 ‘카토이케오‘ 는 주인으로 계시는 것을 의미하고 ’파로이케오‘ 는 손님이나 나그네 신분으로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주인으로 계시는 것과 손님으로서 집에 계시는 것은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본문 17절에 있는 말씀은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계셔서 나를 다스리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종종 혼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신앙생활을 할때 마음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을 내마음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온 것입니다. 내자신이 내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해나갈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식의 설교를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내마음의 주인으로 모실려고 하기 때문에 내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이 손님이면 그렇게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마음의 주인으로 계시고 내가 손님이 되면 매사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에 일어난 갈등도 이러한 이유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에서 25절 사이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을 보시면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리고 17절을 보시면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9절을 보시면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리고 23절을 보시면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지막으로 24절을 보시면,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 이 몇 구절만 보아도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갈등과 긴장감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생긴 갈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이후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겪고 있는 갈등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계시게 하면서 신앙생활하면서 갈등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가 몇 년만에 내집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냥 손님으로 있으면 괜찮지만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할려고 하면 어떤일이 생기겠습니까? 당연히 나와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총각이 결혼을 하고 난 이후에 느끼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깔끔하게 살아온 총각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총각들은 뭐 그렇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갑니다. 저도 총각시절엔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손님의 자격으로 있는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혼 후에는 자고 일어나면 이불을 개고 장롱속안에 넣어야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옷을 방바닥에 휙 던져 놓는 것이 아니라 옷걸이에 걸어놓아야 했습니다. 치약도 중간부터 쥐어 짰는데 끝에 있는 부분을 누르고 사용해야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사용하고 나면 원래 제자리에 두어야 했습니다. 처음엔 힘들었죠. 제가 살아온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게 되니까 조금씩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혼자 이곳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옛날 총각 시절때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자고 나서 이부자리를 개지 않았습니다. 옷도 그냥 방바닥에 던져놓고 치약도 중간부터 눌러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니까 몸은 편하고 좋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웬지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 던져놓은 옷을 보고 정리해놓지 않은 이부자리를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이전에 총각시절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지저분하게 살아가는 것 보다 차원이 더 높은 고상한 생활을 내가 그동안 경험을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이 정리가 되고 깨끗한 환경에서 오는 평강을 제가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지저분하게 살아가다 보니까 몸은 편한데 웬지 마음이 불편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후 하나님이 성령을 내마음에 담아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내자신이 지저분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고 난후 이전의 나는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감옥에서 생활을 해왔던 죄수가 출소한 이후에 죄를 짓고 또 다시 감옥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수는 자기가 감옥안에 있을때 그 어둡고 지저분한 환경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게으름뱅이는 또 다시 자기 방을 지저분하게 하면서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사람은 과거의 불결함과 오늘의 깨끗함 사이에서 오는 차이를 잘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으로 계시면 내 마음에 갈등이 생길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이 갈등을 이용해서 저와 여러분이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어도 평강이 없고 죄책감만 생기고 갈등만 생기는 구나” 라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죽을때까지 평생동안 짓게 될 모든죄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씻기고 계신 제자들의 발이 배반하게 될 발 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자기를 두고 그 발을 가지고 도망하게 될 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발을 미리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훗날에 자기들의 발을 보면서 갈등을 하며 살아가게 될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약함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주인의 자격으로 우리 마음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도 계속 갈등이 생기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신앙생활을 못하겠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바울에게 날마다 갈등이 생겼다면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내망의 갈등이 생길 때 오히려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인정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세째 주님의 사랑의 크기를 깨닫고 살아가게 됩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어떻게 할 때 충만한 삶을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까? 앞을 보시면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살아갈 때‘입니다. 여기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그 앞에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를 향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안다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충만한 생활을 할수 있게 되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를 생각해보십시다. 이세상을 다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지 못할 대상이 없으시고 누구나 다 사랑하십니다. 이사랑을 거절하지만 않으면 그분의 사랑은 그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길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창세전부터 영원후까지 지속적으로 사랑하시는 사랑의 길이입니다. 누가 복음 15장을 보시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를 언제부터 사랑했습니까? 집을 나간 탕자가 다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시작되었습니까? 아버지는 탕자인 둘째 아들을 태어날때부터 사랑했습니다. 아들이라는 신분에 있을때부터 아버지는 계속 사랑을 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집을 떠날때도, 먼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을때에도 사랑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세상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생활을 하고 있을때도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의 지속적인 사랑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길이를 깨닫게 되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다 짊어지시고 지옥에 까지 내려갔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그 캄캄한 지옥의 깊은곳까지 내려가신 그 사랑의 깊이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내가 내려가야 할 지옥의 깊은곳에 대신해서 가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옥에 내려가야할 나를 끌어올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측량할수 없는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입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오백 데나이온 빚을 진 사람과 오십 데나니온 빚을 진 사람이 모두 그 빚을 탕감받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이 두사람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 하겠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생각에는 빚을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입니다. ”47. 사함을 받은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는 우리의 지식으로는 측량 할길이 없을 만큼 크고 풍성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크고 풍성하신 사랑을 다 받아들일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적게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적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이 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적게 받기 때문에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남을 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입니다.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사실을 왜 두려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다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잘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와 여러분이 탕감을 받은 액수는 일만달란트입니다. 일만달란트는 우리인간이 3, 4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평생 일해도 갚지못할 어마 어마한 액수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가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으로 부터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래전 가이드 포스터 기독교 월간 잡지에 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던 한 존이라고 하는 미군 병사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독일군 병사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던 어느 전쟁터에서 이 존이라는 미군이 어느 웅덩이 보고 그 웅덩이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 속에는 부상을 당한 독일군 병사가 많은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고 있는 그 독일군 병사의 모습을 보자 이 존은 갑자기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벨트에 차고 있던 물병을 꺼내어 그 독일군 병사의 입에 물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독일군이 힘들어 하면서 자기 군복 웃 주머니를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존이 급히 그 독일군 병사의 웃주머니 단추를 열어보니까 한 장의 사진이 나왔습니다. 그사진은 이 독일군 병사가 어릴때 자기 부모님들과 같이 찍었던 가족사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존은 그 사진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그 독일군 병사가 잘 볼수 있도록 바로 눈앞에 가져다 대어주었습니다. 이 존이라는 미군 병사가 베풀어준 친절에 의해서 이 독일군 병사는 미소를 짓으면서 죽어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총알이 그들의 머리 위로 빗발치듯 지나가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전투가 한창입니다. 하지만 얼마전 까지만해도 서로 적군이었던 이 두사람은 잠깐 동안 이긴 하지만 친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사랑이 필요한 인간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 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리고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 들일수가 있다면 비록 내 주위가 전쟁터라 할지라도 그리고 총알이 빗발치듯 내 머리위를 지나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또 하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볼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처럼 사랑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