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이것을 자랑하라

Author
kgmcc
Date
2022-02-20 00:11
Views
287
본문 : 고린도후서 12장 5-10절

날짜 : 2022년 2월 20일

 

<고린도후서 12장 5-10절>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자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돈을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명예를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집안의 가문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자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영어실력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친구가 말을 하면서 종종 혀를 굴리는 것입니다. 밧데리를 밧데리라 하지 않고 배러리라고 말을 하고 로토 복권을 라러리라고 자꾸 말을 하더래요. 그래서 계속 혀를 굴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친구중의 한명이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야 너 자꾸 밧데리를 배러리 배러리 하고 로토복권을 보고 라러리 라러리 하면 재러리가 너에게 날라간다” 영어실력을 자랑하다가 재떨이에게 맞을뻔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이곳 샬롯 지구촌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하루는 교회 주일예배를 마치고 친교시간에 두분의 남자 집사님들이 무슨일인지 모르겠지만 언쟁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성도님들도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그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고 말리지 않으면 이제 곧 주먹싸움 까지 할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분중 어느 한 분의 집사님이 하시는 한마디 말에 모든 사태가 조용해졌습니다. 무슨말을 했는줄 압니까? ‘내가 당신보다 한 살이 더 많아“ 저는 나이가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자랑이 되는 줄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이는 상대방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상대방에게 자랑할만 하기도 합니다. 거지인 아버지와 아들이 한창 불타고 있는 집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아버지를 잘 둔 탓에 저렇게 집에 불이날 걱정이 없겠구나“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네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집에서 도둑맞을 염려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들이나 할 것 없이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자랑을 해왔습니다.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그리고 자랑할만한 베냐민 지파이다. 율법적으로는 하나의 흠도 없는 바리새인이고 로마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자랑해왔습니다. 그랬던 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무익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앞을 보면 부득불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랑하게 됨을 용서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셋째하늘에 들어가게 된 것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1절입니다. 1.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그러면서 자신이 셋째하늘 즉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이 없다 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서 할수 없이 말한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자랑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5절입니다.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바울이 자랑하기 원하는 약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두가지로 볼수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바울이 자랑하기 원하는 약한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수와 허물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박해와 고난이 약한 것들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사도바울은 복음 때문에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온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태장으로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태장이 무엇이냐 하면 가죽끈에다가 납덩어리를 매달아가지고 내리치는 형벌입니다. 주로 노예들에게 가해졌던 형벌입니다. 이런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또 돌에 맞아 죽을뻔한 적도 있고 세 번씩이나 배가 파선이 되어서 그 배안에서 일주일동안 밤낮없이 지냈던 적도 있었습니다. 강도를 만난적도 있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자기집 드나들 듯이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헐벗고 굶주린 적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광주리를 타고 성벽 아래로 내려와 도망을 친 적도 있습니다. 고후 11장 33절을 보시겠습니다.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다메섹지역에 있는 왕과 고관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에워싸고 있으니까 바울이 새벽에 들창문을 통해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이끌려 셋째 하늘에 올라가 말로 표현할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사람들 몰래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와 도망을 간 것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나 인간적인 눈으로 볼때는 이 얼마나 구차하고 비열해 보이는 것입니까? 얼마나 연약한 모습입니까? 그러면 바울이 왜 도망을 쳤던 것입니까?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 입니까? 죽음이 두려워서 인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천국의 영광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죽게 되면 가게 될 그 나라를 미리 가서 보고 온 사람입니다.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야할 마지막 목적지가 무덤이 아니고 더 나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바울은 이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새벽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갔습니까? 그것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살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재수 없고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자랑한 약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두번째로 육체의 가시 이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안질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간질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심한 편두통일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말더듬이라고 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근거가 있습니다.

요즘에 새롭게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가시는 바로 바울을 괴롭히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가시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괴롭히는 가나안 땅 거주민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2장 3절입니다.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땅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될 것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아도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찔림을 당해 고통 받은 것을 알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복음을 들고 나아갈때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말로 표현할수 없는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는곳마다 자신을 괴롭히고 죽일려고하는 유대인들을 바울에게 가시 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성경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 할만큼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약한것들에 대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5절 하반부입니다. ”5.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약한것들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약한 것들 것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9절 중간 부분입니다. ‘9. ...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나의 여러 약한 것 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바울은 자신의 이런 약한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이런 육체의 가시를 주시는 것입니까?‘ 라고 말하면서 원망 불평하고 낙심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했을까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9절 하반부입니다. “9.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안에 머물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게 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하면 보자기가 어떤 물체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보자기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인생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는 곳곳마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사람이 사십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얼마나 힘들게 선교사역을 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뽀족한 육체의 가시가 자기의 몸과 마음을 찔렀던 것입니다. 가끔 우리 눈안에 티눈이 들어가면 눈이 얼마나 따끔거리고 아픕니까? 아무리 일이 많고 바빠도 그 모든 일을 중단하고 가장 먼저 눈 안에 들어간 티눈을 빼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희 교회에 속 눈썹이 자신의 눈을 찔러서 힘들어 하시는 성도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시면서 속눈썹에 찔려 눈물이 날때마다 손수건으로 닦으셨습니다. 속눈썹 수술을 받으신후에는 괜찮아졌습니다. 조그마한 속눈썹이 자신의 눈을 찔려도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려야 했던 그 권사님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주는 고통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육체의 가시가 주는 고통에 견딜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왔었는데 그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마치 보자기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현장가운데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도 찬송을 하니까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져 자유의 몸이 되었고 뿐만아니라 간수와 그 가족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의 몸에 대기만 해도 병이 낫고 귀신들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들이 삶의 현장가운데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요. 바울에게 이런 연약함이 없었더라면, 바울에게 이런 가시가 없었더라면, 이런 핍박과 박해가 없었더라면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의 인생에 이런 고난과 아픔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장 8절 9절입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의지 하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실려고 이런 고난, 이런 가시를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안에 머물러 있게 되었고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들중에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너무 커서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힘드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까?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가운데 그아픔을 그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후로 내가 어떤 고난과 아픔을 당하던지 간에 하나님만 의지할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자에게만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할수 있다 생각을 하고 자기 나름대로 사람과 물질을 이용해서 목적을 이룰려고 하는 심령속에는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을수가 없습니다. 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안에 머물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삶의 현장가운데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왜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까?

두번째로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믿는 성도가 가장 강할때는 언제 입니까? 돈이 많을 때입니까? 몇년전에 이 지역에 있는 어느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LA 지역에 장로님이 한분 계셨는데 이분이 한주에 내는 십일조가 4만불이었습니다. 한달도 아니고 일년도 아닌 한주에 내는 금액이 4만불입니다. 그래서 일년에 거의 50만불의 액수를 십일조로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어느 한 목사님과 교회를 새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신문사에 전면 광고를 내었습니다.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두군데에 내었는데 그때 광고료가 한번에 천오백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주에 광고료만 3천불 가량이 나가고 한달이면 돈 만불이 넘는 액수가 광고료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서 광고를 했으면 성도들이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년 조금 지나서 교회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한국으로 떠났고 그이후 그 장로님의 사업은 점점 망해갔다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강할때는 돈이 있을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명예와 높은 신분을 가질 때도 아닙니다. 사람이 가장 강할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했을때입니다. 왜요? 자신의 약함을 발견했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언제 강했는가 하면 가난하고 핍박을 받을 때 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말 그대로 이제 시작하게 되는 시기가 아닙니까? 그때 제일 강했던 것입니다. 언제 기독교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돈이 쌓이게 되고 교회가 부요해질 때 기독교는 부패되고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돈을 모아두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 돈이 모아지면 그 돈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을 의지하기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가장 강한자입니까? 이세상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어린아이 이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돌진할수 있었습니다. 왜요?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했고 없었던 시절에 능력이 있는 목사님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능력의 목사님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난 이후 건물과 재정이 풍부한 교회에 부임하여 사역을 하시고 계시는 후임 목사님들을 보면 옛날만큼 능력이 있는 목회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선교사인 아버지가 선교를 하시던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아버지가 중국 내지 선교 여행을 위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그 동네 마을에는 백인선교사로 인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이 분노해서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은 미신을 믿고 있던 중국 사람들에게 마치 사실처럼 들리게 되었고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동네사람들이 몽둥이와 곡괭이 그리고 도끼와 쇠고랑과 같은 농기구를 들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가서 그 가족을 죽일려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는 차를 마실수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어 준비를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아무일이 없는 양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펄벅의 집에 도착한 동네사람들은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안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 했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와서 여기 케이크와 과일과 함께 차라도 한 잔 드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못 이기는 척하고 케이크과 과일과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간 그날 밤에 동네사람들이 그동안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훗날 펄벅의 어머니인 캐럴라인이 성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날 도망칠 곳이 있었다면 나는 두려워서 도망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망할곳이 없었던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렇게 담대하게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이말을 듣게 된 펄 벅 여사에게는 이후에 자신이 절망적이고 위기의 순간을 만날때마다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그 위기와 고난을 극복할수 있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펄벅이 미국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 문학학을 받게 된 ‘대지라는 작품도 사실 지적인 장애자로 태어난 자신의 딸 캐롤 때문에 탄생하게 되었다고 펄벅이 말했습니다. 지적인 장애자인 자신의 딸과 그리고 자신의 자궁에 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로 인해 더 이상 아이를 출산할수 없게 되자 남편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소설을 써내려갔을때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이 사람이나 환경을 의지할수 없는 무기력하고 연약한 환경이 될 때 강하고 능력의 주님을 경험하게 할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내자신의 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약함이 벗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시길 바랍니다. 이세상에 자신의 약함을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자기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우리 그리스도인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던 간에 자신의 약점을 숨길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승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게 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이제 우리의 약점 우리의 핸디캡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약함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