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의 내용과 목적
<출애굽기 17장 1~7절>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하에 애굽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 광야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마라에서 마시지 못하는 쓴물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그후 엘림을 지나 신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게 됩니다. 이때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출발한지 한달이 되던 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먹을 식량들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먹을 음식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르비딤 에서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르비딤’ 이라는 단어는 ‘쉬는곳, 휴식처’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단어의 뜻대로라면 쉬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광야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경험할수 있습니다. 휴식을 취할수 있는 장소인줄알고 가져온 짐을 다 풀어놓았는데 마실물이 없는 메마른 땅인 경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어려움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길 소망하지만 시련과 어려움을 계속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시련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2절 전반부입니다.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서 물이 없는 시련을 당할 때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일어나는 시련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명기 8장 2절입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그다음에는요?) 너를 시험하사’ 그런데 시험을 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다음에 나옵니다. ‘네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는 시험’ 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시험은 내가 나자신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알기 위해서이지 하나님이 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써낸 시험 답안지를 보지 않아도 내가 몇점을 맞을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시험을 내십니까? 내가 내자신이 어느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험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험 결과를 보고 내가 내자신이 어떠한 수준에 와있는지 내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 성적을 보면 알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치게 되면 믿는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알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아침에 멀리서 살고 있었던 반가운 친척이 온다고 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 친척을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바람에 주일예배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가운 친척을 만나 온종일 시간을 보내고 그 친척이 떠나고 나면 내 마음에 어떤 느낌이 옵니다. “야 내가 우선 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못지켰구나. 친척이 온다 할때 내가 일단 양해를 구하고 주일을 먼저 지켜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구나” 라고 하는 이런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치게 되면 내 자신의 신앙 수준이 어느정도가 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연히’ 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치신다‘ 라고 생각하시면 그것이 바로 성경적이고 올바른 생각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해 내 자신을 신앙상태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시험은 대부분의 경우 시련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있을 때 만나게 된 시험의 내용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잘 치룰수가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 광야에 있을 때 만난 시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시험
본문 7절입니다. "7.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여호와께서 우리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시험하시는 내용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너희들이 알고 있느냐 알지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하는 시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고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내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이겨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되면 내가 어떠한 환경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강과 그 능력으로 환경을 이겨낼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동안 불신앙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기서 ‘여호와의 명령‘ 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낮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받고 순종하여 르비딤 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르비딤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였던 것입니다. 왜요?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당연히 물이 있어야지 왜 없느냐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 의심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수가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길이 열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길이 막히고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대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보니 마실물이 없는 아주 삭막한 르비딤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셨으니까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지라고 믿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길이 막히게 되던, 열리게 되던 이 사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곳에 있고 가라고 하는 곳에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길이 설사 막혀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앞길이 막혀있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관심있게 보십니다. 그럼으로 길이 막혀있다고 해서 하나님 뜻이 여기 있는게 아닌가보다 의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지금 내게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다 할지라도 이길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교회이요,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업터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신앙생활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광야에 있을 때 만난 시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둘째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시험
2절입니다.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가 나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면 일이 잘풀려야지 이게 뭐야“ 이런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했습니다. 사실 가나안땅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 전반부입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그런데 그 가까운 지름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름기둥을 따라 빙 둘러서 갔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없는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생각을 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가까운 지름길로 갔다면 여기 물이 없는 르비딤이 아니라 우리는 벌써 가나안땅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물이 없는 이곳에 와서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 이러한 마음으로 인해 그들은 모세에게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보면 아주 살벌하고 험악한 분위기 임을 알수 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 이사람들이 여기서 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너죽고 나죽자 는 식으로 저 돌로 나를 죽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모세는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주 걸려서 넘어지는 문제가 영혼 구원의 문제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먹고 마시는 차원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이 벌고, 좀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차를 사고 편안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이런 문제에 걸려 원망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면 할렐루야 이고 그렇지 않으면 원망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믿음의 차원이라고 한다면 안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잘 해나갈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물이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수 있어야 합니다. "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서 목말라 죽게 할려고 애굽에서 데려온 것이 아닐 것이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언제나 선하심으로 끝나고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온갖 질병과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 인류의 역사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땅임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지옥과 같은 순간들이라 할지라도 이 마지막에는 천국, 영적인 가나안땅임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간에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광야에 있을 때 만난 시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셋째로 순종의 시험
본문 6절입니다.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은 르비딤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무슨 사건들이 있었습니까? 홍해 바다가 가로 막고 있었어요. 그리고 뒤에는 바로왕 군사들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사건이 있었나요? 홍해를 건넌지 사흘후에 마라 지역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마시지 못할 쓴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었나요? 마라와 엘림을 지나 신광야를 지나게 될때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 르비딤에 오기전까지 여러차례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사건들을 만나게 되어서 죽었습니까?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 바다는 갈라졌습니다. 마시지 못하는 쓴물은 달게 변했습니다. 먹을 양식이 다 떨어지자 하늘에서 만나가 날마다 내렸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사건들을 불과 한달 밖에 되지 않았던 기간에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몇 십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몇 년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불과 한달사이에 이 모든 사건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치매증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달사이에 경험했던 그 기적의 사건들은 지금 자기들이 만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계속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왜 칩니까? 배운 것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배워서 알게 된것을 제대로 잘 응용하고 적용하고 있는가 알아보는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시간에 수학 문제를 푸는 공식이나 원리를 배웁니다. 그리고는 시험을 칠때 그 시험의 문제는 똑같은 내용이 아닙니다. 숫자가 다른 시험문제를 냅니다. 숫자까지 똑같으면 답만 외워서 쓰기 때문이죠. 하지만 숫자는 달라도 공식이나 원리를 적용 시킬수 있으면 아무리 숫자가 다르게 나와도 그 시험 문제에 올바른 대답을 할수 있습니다. 배운 공식대로 문제를 풀면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학생이 못풀게 되면 선생님은 그 공식을 다시한번 더 가르쳐주고 또 비슷한 시험 문제를 냅니다. 그래서 그 시험문제를 풀게 되면 이후에는 좀더 차원이 높은 공식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학생은 맨날 더하기 빼기 공식에서 헤매며 그 시험만 치다가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물이 있기는 하지만 쓴물을 만나는 시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르비딤에서는 물이 보이지 않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라에서 시험을 쳤을 때 문제 해결을 보았던 그 공식을 이 르비딤에서 적용시키면 문제 해결이 됩니다. 그 공식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기도입니다. 모세가 기도를 했더니만 하나님이 쓴물을 달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모세야. 저기 보이는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져라” 그 말씀대로 던지니까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르비딤에 갔는데 물이 없습니다. 이전에는 쓴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물은 있었는데 이번에는 물이 아예 없습니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시험문제입니다. 하지만 마라에서의 문제를 풀게 된 그 공식을 적용시키면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방법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기서 기도를 하지 않고 내경험에 의지해서 주변의 나뭇가지를 주어서 땅에 던졌다고 해보십시다. 그러면 없던 물이 생깁니까? 나뭇가지가 땅속 깊숙히 파고 들어가서 구멍을 내고 그 땅속깊은곳에서부터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나하면 첫 번째 공식은 내 경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를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연결되어지는 두 번째 공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먹고마시는 문제에 대하여 유혹이 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4.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떡으로만 살아가면 이 육신은 살아갈지 모르지만 이 육신이 끝나는 날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먹는 떡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육신이 장막을 벗게 되는날 영생을 얻어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가 하는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자 하나님이 문제 해결 할 길을 말씀해주십니다. 5절 6절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반석을 지팡이로 내려 쳤습니다. 그러자 깨어진 반석사이로 물이 나와서 백성들이 마시고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놓일 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동을 할때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결과를 이루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자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쓴물을 만났을 때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져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엘림을 지나 신광야를 행진할 때 양식이 떨어졌는데 모세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먹을 양식인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물이 없는 르비딤에서 모세가 기도를 하니 하나님이 네 손에 든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때렸더니만 반석이 깨지고 그사이로 물이 나와 백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에서 모세에게 나뭇가지를 던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는 르비딤 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쳐야 르비딤에서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이 두사건에서 우리는 공통 분모를 배울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가 기도를 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문제 해결할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배우다가 중학교에 들어가 인수분해를 배우고 나니까 그이전에 그렇게 복잡하던 문제들이 쉽게 풀어지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했던 감정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다시말해서 계산해야할 분모와 분자가 있는 숫자들이 아무리 많이 나열되어 있어도 하나하나 계산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적용시킬수 있는 공통된 분모를 만들고 난후에 같이 묶어서 계산하니까 아주 쉽게 답을 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올바른 공식을 적용시켜야 하는데 특별히 공통분모를 찾는일이 참 중요합니다.
자, 마라에서 모세가 쓴물에 던졌던 나뭇가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에 있는 자라’ 여기서 나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르비딤에서 모세가 내리쳤던 반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입니다. 4.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무엇입니까?) 곧 그리스도시라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성경은 여러군데에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통된 분모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시련을 만나고 문제를 만나게 될 때 그 시련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통된 분모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가 처한 입장과 문제는 다 다를수 있습니다. 하지만 풀어야 하는 공식은 똑같습니다. 모든 환경과 입장이 다 다르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일은 쉬운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쉬운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5절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것은 모세에게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흥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차하면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을 지나 반석앞에서 지팡이로 때렸는데 물이 나오지 않으면 모세는 돌맹이를 맞아 죽게 될 상황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모세는 순종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하는 모험과 결단이 필요한 순종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6.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위 거기서 네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앞에 있는 반석 위에 서시고 계시는데 그때 모세 네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반석위에 계시는데 어떻게 지팡이로 반석에 칩니까? 매를 맞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석위에 계시고 지팡이로 나를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지팡이는, 하나님의 정의의 지팡이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우리 인간을 내려쳐야하는 데 아무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진 반석사이에서 나온 생수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되었듯이 예수님의 그 찢어진 몸에서 흘러나온 보혈의 피가 저와 여러분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시험과 어려움을 만날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불신앙적인 행동을 볼때마다 그들을 탓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러니까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이렇게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을 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 탓으로 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을 예수님께서 다 맡아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문을 두드리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약한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할수 있겠습니까? 원망 불평만 할 뿐이지요. 믿음이 있는 저와 여러분이 해야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말씀에 의지하여 반석을 쳤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 가족의 불신앙, 내 주변에 있는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 실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대신하여 예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때 주님은 해답이 되는 길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 할지라도 그때 기도를 통해 말씀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문제해결함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