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Author
kgmcc
Date
2022-03-19 21:14
Views
52
본문 : 요한복음 5장 1-9절

날짜 : 2022년 3월 20일

 

<요한복음 5장 1-9절>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시다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38년된 병자를 만나서 그 병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 가까이에 양문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 제사를 드릴 양을 데리고 올때 베데스다 연못의 물을 이용해서 양을 씻기도 하고 물을 먹이고 난 이후에 이 문을 이용해서 들어왔다고 해서 양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양문 옆에 어문이 있습니다. 물고기 어자 문 문자입니다,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가지고 왕래하는 문이라고 해서 어문입니다. 그리고 서쪽에 골짜기가 많은 지역으로 나가는 곳이라고 해서 골짜기 문이라 불렀고 그리고 동서쪽 이근처에 실로암 연못이 있는데 실로암 샘물이 있다고 해서 샘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드온 골짜기가 바라보이는 말문이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서 군사들이 말을 타고 왕래하는 곳이라고 해서 말문이라고 불리어 졌습니다.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문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미문이 있는데 아름다운 미자 문 문자 ‘아름다운 문‘ 영어로는 beautiful gate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시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이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나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유대나라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많이 왕래하는 문입니다. 정문이라 할 수 있는데 정문이니까 성전에 들어가는 여러 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양의 문에 들어가기 전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고 그리고 그 연못가에는 다섯 행각이 있었습니다. 행각이라는 것은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데 우리나라 옛날 정자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자에서 쉬기도 하고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던 것 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많은 병자들이 다섯 행각에서 쉬기도 하고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1888년에 이 베데스다 연못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이후 1956년도에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하나가 아니라 쌍둥이 연못입니다. 전체 사이즈가 스크린에서 보시는 것처럼 약 110m x 65m 정도 입니다. 한 개 연못의 사이즈는 약 60m x 50m 정도이고 이 두 개의 연못 사이에 폭이 5m 정도의 길이 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고대 문서에 의하면 가장자리에 각각 한 개씩 도합 4개의 행각이 있고 그리고 중앙에 한 개의 행각이 있어서 총 합계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스크린에서 보시는 것처럼 대략 이러한 구조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다섯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베데스다 단어의 의미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지내고 있는 모습은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병자는 육신의 병이 있었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마음의 병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이 아플때가 있고 그래서 고통속에서 살아갈때가 있습니다. 몇 년전에 발표된 우리나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40대 이상된 사람들중에 약 70퍼센트 정도가 어떠한 질병이든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도의 차이 일뿐이지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은 건강한것 처럼 보여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원인을 알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서 아픔과 고통을 당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질병으로 인하여 이 육신이 병들고 약하게 되어지면 그와 더불어 마음도 자연히 병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울증이나 고독이라는 마음의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이웃사람들도 다 떠나버린 현실을 우리는 이 병자가 하는 고백에서 알수있습니다. 본문 7절 전반부입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그런데 사실 이 병자 주변에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입니다.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가 다 병자들입니다.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필요로 할 때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나와 경쟁을 해야 하는 존재들 이었던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진작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기 보다는 오히려 나와 경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훨씬 더 많은 인생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나 회사에서 회사원들 그리고 사업을 하는 사업가들은 주변에 수많은 경쟁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고 고독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속에서 우리는 그 문제 해결책으로 베데스다 연못을 바 라보면서 살아갑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소망을 두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베데스다 연못에 일등으로 들어가게 되면 문제 해결을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베데스다 연못은 참 공평합니다. 나이가 든 사람인지 나이가 어린 사람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배운 사람이든지 못 배운 사람이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베데스다 연못에 일등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질병에 걸렸든지 다 낫을수가 있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상관이 없이 다 나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언제 와서 연못의 물을 동하게 만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베데스다 연못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질병도 그리고 그누구도 언제 연못의 물이 동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공평한 것 뿐입니다. 실제로 연못가의 물이 동할 때 어떤 사람이 제일 먼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갈수가 있습니까? 남보다 몸을 더 빨리 움직일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해서 좀더 젊고 좀더 건강한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그 병자를 도울수 있는 식구나 친구들이 많이 있는 사람이 남보다 더 빨리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세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 뿐 입니다. 실제 현실속으로 들어가보면 보다 더 젊은 사람이, 덜 아픈 사람이 그리고 주변에서 도와 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이 이 베데스다 연못이 주는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세상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학교라고 할수 있는 하버드 대학이나 예일 대학에는 아무나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백인이고 흑인이고 아시아 사람이고 스페니시이고 누구나 다 들어갈수 있습니다. 나이와 성별이나 재산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들어갈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도 들어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습니까? 제 둘째딸 미진이(에스더)가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 졸업생들중 한명이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이 졸업생을 대표해서 인사하는 것을 졸업식장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몇 년동안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이 없었는데 그때 한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동안 그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없었습니까? 누구나 다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길 소원하지만 들어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고 공부만 잘해도 안됩니다. 고등학교 다닐때 여러개 클럽에 가입을 해서 많은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부모님들이 시간이 날때마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행사에 가서 자원 봉사도 해야 하고 또 물질적으로도 후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 견학을 보내서 남과 다른 스펙을 쌓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있는 부모님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이는 하버드나 예일 대학에 들어가기가 힘든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그래서 극히 제한된 사람만이 하버드라고 하는 베데스다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이런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세상속에서의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베데스다의 의미는 좀전에 말씀드렸지만 ‘자비의 집’ ‘은혜의 집’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하기까지는 누구나 다 베데스다 연못이 주는 혜택을 누리게 되길 소망하고 꿈꾸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서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아픈 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베데스다 물이 동하기 까지 만 입니다. 베데스다 물이 동하게 되면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혜택을 누릴수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도덕도 철학도 겸손도 양보도 사라집니다. 일단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하겠다고 생각을 할때부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경쟁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저사람이 없다면, 저사람의 가족이 없다면 내가 먼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서 병고침을 받고 문제 해결을 받을 수가 있을텐데” 라고 생각 하면서 물이 동하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향해 경쟁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자비의 집’ 이고 ‘은혜의 집’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겉으로는 공평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돈 많은 부자집에 태어난 자녀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녀중에 누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수가 있겠습니까? 능력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들이 있는 집안의 자녀와 어릴때부터 부모가 이혼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집안의 자녀들 중에 누가 먼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게 되는 혜택을 누릴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회 구조속에서 우리는 마치 38년된 병자처럼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남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다가 우연히 들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6절 전반부입니다.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38년동안 병이 들었으면 오래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을 제외 하면 이 병자는 거의 평생동안 병을 앓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병자의 머리에는 인생이란 아픔과 고통과 고독 이라는 단어들로만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병자에게 예수님은 일부러 찾아오셨던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두가지 내용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두가지 내용의 말씀을 깊이 살펴볼때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어 주시는 진정한 자비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베데스다 연못이 주는 혜택보다 더 큰 혜택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가지 다른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은혜를 받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이 주는 자비와 세상이 주는 은혜가 아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한 것은 이 병자에게 병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가를 확인 해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소원이 있고 갈망이 있어야 주님이 역사를 하실수가 있지 소원이나 갈망도 없다면 주님이 어떤 일도 행하실 수가 없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맞기는 하지만 충분한 해석을 아닙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병자들 중에 병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병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하신 말씀 일수도 있겠지만 충분한 해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충분한 해석은 무엇입니까? 38년된 병자가 하는 대답에서 우리는 추측해볼수 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는 ‘예 낫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면 될 터인데 말을 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이 병자는 말이 좀 많다. 말이 많으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병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말이 많이 한다는 것 보다는 문제 해결책을 베데스다 연못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관심있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 병자는 지금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뿐만 아닙니다. 이 병자는 오랜 기간동안 베데스다 연못만 바라보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연못물이 동할 때 마다 이 병자는 기를 쓰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내려갔지만 그 동안에 다른 사람이 벌써 연못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러니까 이 병자는 그동안 한눈 팔고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낫겠다고 하는 의지나 소원을 가지고 계속 베데스다 연못가에 머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그렇게 열심히 소원을 가지고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게 가능할것 같습니까? 오래전 자기가 젊고 병이 덜 할때도 안되었는데 이제 거의 움직일수 없게 된 상태에서 어떻게 제일 먼저 그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갈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 한일 입니다. 그런데도 이 병자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 자녀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다닐수 있을 것이고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 멋진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내 병이 낫게 되면, 내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면, 내 신분의 문제가 해결이 되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건강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자비와 은혜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녀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설사 만에 하나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고 그리고 가장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내 자녀가 은혜와 자비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라 할수 있는 하버드 대학을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장이라 할수 있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이 되고 난이후에 얼마되지 않아서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저는 많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당시 오바마 전 대통령의 나이가 50살 정도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흰머리카락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예일대학을 나온 클린턴도 마찬가지로 미국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얼마되지 않아 머리카락이 갑자기 하얗게 되어진 모습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자리가 너무 행복해서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라면 하버드 와 예일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힘있고 좋은 직장이라면 미국 대통령이 아닙니까? 그들은 가장 먼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간 사람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함을 누리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이 이런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내가 대통령 직함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마치 내가 이 두손으로 코끼리를 들고 다니는 것 처럼 무겁고 힘들다” 그래요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이 주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사업, 좋은 건강을 바라보면서 들어가기를 소원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함을 누리게 되는 길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첫 번째 말씀에서 우리에게 알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하느냐” “네가 그 베데스다 연못만을 바라보고 그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것만을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면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게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온전한 문제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두 번째 말씀에 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니 사실 일어나 걸을수 있었다면 이 병자가 38년 동안 왜 누워 있었겠습니까? 일어나라 하지 말래도 일어나서 걸어 다녀겠지요. 병이 들었기 때문에 못 일어나고 누워 지냈던 것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나온 38년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예수님께서 앞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일어나 네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만 하면 낫게 됩니다. 믿으십니까? 세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이 계신 예수님께서 물어 보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리고는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래요 지금 저와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진정한 문제 해결자이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문제 해결은 내가 건강해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 해결은 내가 부자가 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 해결은 내 자녀가 잘되고 내가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도 아니고 내 사업이 부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은 본문에 나오는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 해결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제가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안에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을 할때 그것이 곧 영적인 베데스다에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함 속에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병들어 누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죄악에 누웠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남을 탓하고 환경을 원망하던 그 자리를 털어버리고 일어나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자리에서 일어나라“ 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면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된 이런 저런 문제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 말미암아 해결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베데스다 연못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으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기를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세상의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고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누었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문제 해결함을 받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