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가 쓰시겠다 하라

Author
kgmcc
Date
2022-04-09 21:50
Views
42
본문 : 마가복음 21장 1-9절

날짜 : 2022년 4월 10일

<마태복음 21장 1-9절>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고난 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토요일까지 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를 고난 주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이시간에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고난 주간 첫 날인 오늘은 좀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종려주일 혹은 고난 주일이라고 말합니다.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하십니다. 이날 유대 군중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그리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때 유대군중들이 외친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주간 둘째 날인 월요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십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돈벌이 장사에 정신없는 장사꾼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시면서 성전 마당을 청소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시면서 길거리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날도 이날입니다. 그당시 더럽혀진 성전과 타락하고 부패한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어느 한 무화과 나무에게 대신하여 저주를 하셨다고 생각해볼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둘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고난주간 셋째 날인 화요일은 예수님께서 40년 후에 무너져 버리게 될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탄식을 하신 날입니다.

결국 이 예루살렘 성은 주후 70년경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을 벌이기도 한 날입니다.

넷째 날인 수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루를 휴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성만찬을 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식사 도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날 식사를 마치신후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후에 붙잡히십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섯째 날인 금요일은 고난 주간의 절정의 날이라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난을 당하신 날입니다. 이 날 예수님은 체포되어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여섯 시간 동안 계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우리는 이날을 ‘성 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은 쉽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무덤에 들어가셔서 토요일을 무덤에서 지내시고 제 3일 안식 후 첫 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시고, 모든 부조리를 일소하시고,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가오는 다음 주일 아침이 바로 부활주일의 아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보다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일요일,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고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님을 크게 환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무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 12장 13절을 보시면 이 나무는 종려나무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입니다.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많은 유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하였다고 해서 우리는 이날을 종려주일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만, 사실 이날 종려나무가지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가 있습니다. 물론 이날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귀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순서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면 ‘종려 주일’ 이 아니라 ‘나귀 주일’ 로 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제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 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이 없었다면,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초라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사건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환영하던 그 군중들은 며칠이 되지 않아서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태운 나귀새끼는 묵묵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 내었습니다. 이 나귀는 오늘 본문에서는 나귀와 나귀 새끼가 나옵니다만 누가복음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9장 35절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그러니까 종려주일날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는 나귀새끼 라 할수 있습니다. 나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나귀는 이세상의 것이 아닌 구원자 메시야를 자기 등에 태우는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귀들 중에서 가장 축복받고 사용함을 받은 나귀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나귀새끼가 예수님에게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당시 나귀새끼가 처해있던 상황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서 같이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 나귀새끼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1.매여 있음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예수님이 타신 나귀새끼는 들판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짐승이 아니라 원래는 매여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매여있는 것 보다는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더 원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왜 죽음을 각오하고 러시아와 싸우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자유를 누리고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죽음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자유 쟁취의 역사이자 해방의 역사이다’ 우리 인간은 자유가 없는 평등보다는 차라리 평등이 없는 자유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평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유가 훨씬 더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는 도중에 18년 동안 귀신들려서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허리를 낫게 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회당장이 안식일 말고도 나머지 엿새 날이 있는데 그날 치유사역을 하지 왜 안식일에 하느냐 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복음 13장 15, 16절입니다. ‘15.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사탄 마귀의 손에 매여있는 우리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인간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이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그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죄를 짓게 됨으로 그 결과로 인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된것입니다. 매임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오는 나귀도 매여 있었지만 그 매임에서 풀려나게 된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은 매임에서 풀어주시기 위해 이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생명을 가졌다’ 는 의미는 자유롭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는 이세상에 없습니다. 내 자유라고 상대방을 괴롭게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칠수는 없습니다. 어떤 규칙과 책임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는 진정한 참 자유가 아닌 방종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한 자유함을 얻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칙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입니다.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에 매여있을 때에만 진정 자유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진리 되십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곧 진리가 되시니까 예수님에게 속해 있는 사람은 참 자유할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말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세상은 인간이라는 말위에 하나님이 아니면 마귀가 올라타 있다. 아무도 올라 타 있지 않은 그런 말은 이세상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아니면 사탄 마귀 둘중에 하나에 매여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 마귀 둘중에 하나에 매여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해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기는 진리되시는 예수님에게 붙잡혀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멍에를 맴

본문 5절입니다. 5.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나귀는 멍에를 매는 짐승입니다. 그러니까 나귀 새끼도 멍에를 매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운명에 처한 짐승이었습니다.

멍에라고 하는 것은, 짐승들에게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기 위해서, 짐승의 어깨에 짊어지도록 고안된 도구입니다. 그 멍에에 수레나 쟁기를 연결해서 그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을 옮기기도 하고 밭을 갈게도 합니다. 그러니까 멍에는 주인이 짐승을 자기가 계획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도구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멍에는 자유함의 반대의 의미가 됩니다. 멍에를 지는 짐승은 그 멍에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멍에의 주인이 농부이면 그 멍에를 진 짐승은 논이나 밭을 갈아야 합니다. 그 멍에의 주인이 수레꾼이면 그 짐승은 수레를 끌고 짐을 운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멍에를 지길 좋아하는 짐승들은 없습니다. 그 멍에를 쓰게 되면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짐승들은 멍에를 매길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멍에를 매지 않는 말이나 소는 농사나 운반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말해 멍에를 매지 않은 짐승은 주인의 뜻대로 사용함을 받지 못하게 되는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멍에는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내 자신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우리 각자의 십자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무거운 멍에는 바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상징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지시고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믿는 성도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입니다. 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올바른 쓰임을 받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8-30절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내맘대로 살아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가 되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가면 마음의 쉼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여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진리되신 예수님에게 매여있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자의 신분으로 살아갈수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에서 자유한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세상 학문이나 사회적인 신분에서 볼 때 바울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으며 멋지게 살아갈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입니다. 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내가 이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가다가 바울은 감옥에 들어갔지만 진정한 자유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사탄에 매여있는 사람들을 풀어주기 위해선 자신의 것을 희생한 삶을 살았던 진정한 자유자이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우리도 예수님에게 매여 살아가십시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이 나귀새끼는 예수님의 사용하심을 받기 전에 세상의 주인으로부터 매여 있었고 그래서 세상 주인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 주인이 주는 멍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선택으로 인하여 매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귀새끼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선택하시고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그 마을에 가면 나귀 새끼가 있으니 풀어오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가 뭐라고 말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라고 말하면 나귀 새끼를 보내줄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마을에 가서 나귀의 주인에게 말하고 주인의 허락을 받고 나귀새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사오라고 하시지 않고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매여있는 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 나귀 주인에게 그냥 ‘주님이 이 나귀새끼를 쓰시겠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제자들에게 나귀새끼를 풀어 가져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가면서 어떤 생각이 했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며 놀랐을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때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오래되어서 지금 그 목사님의 성함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다음날 새벽부터 교회 부흥회 시작인데 그전날 밤늦은 시간에 담임목사님이 저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니 부흥회 강사 목사님이 한국서 가져온 랩탑에 들어있는 자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랩탑 연결선에 사용할 Adapter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곳 미국에서는 110V이고 한국에서는 220V 입니다. 그래서 그냥 사용할 수가 없고 110V를 220V로 바꾸어 사용할수 있는 Plug adapter 가 필요하다는 것(일명 돼지코) 입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당시는 110V를 220V로 변환시켜 사용할수 있는 어탭터를 파는 곳이 주변엔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도 너무 늦어 전자 부속을 파는 가게는 문을 닫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회 강사 목사님이 제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를 해놓았을테니까 전도사님은 아무 걱정말고 아는 사람에게 가서 달라고 하면 어댑터를 내 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죠? 담임 목사님 사택을 나와서 저는 그당시 한국에서 온지 얼마되지 않은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집을 찾아 가는 동안 부흥강사님을 원망했습니다. ‘한국에서 오실 때 잘 챙겨서 오시지 않고 대책도 없이 그냥 와서 이렇게 부사역자를 고생시키냐’ 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연구소에서 일하시는 그분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니 자기에게 그 플러그 어답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답터를 빌려가지고 집에 오면서 ‘참 신기하다 그 목사님은 어떻게 아셨지?“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 부흥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매여있던 나귀새끼를 데려온 장면에서 얻을수 있는 다른 하나의 교훈은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인이 나귀새끼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자 선뜻 내어주었습니다. 이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은 나귀 새끼의 진짜 주인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은 주인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그분께 내어드리겠다는 청지기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재능이든, 시간이든 이 육신이든 무엇이든지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주님께 드릴수 있어야 한다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수 있게 된 것은 나귀 새끼의 주인과 제자들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나귀 새끼처럼 매임에서 풀어지는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런 저런 주님의 멍에를 지고 주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땅이 아닌 천국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그리고 나귀 새끼 주인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천국의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가는 축복을 누릴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