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둘람 굴의 축복
<사무엘 상 22 장 1-5절>
1.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떤일에 실패를 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에서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일어나게 되기는 커녕 거기서 또 실패를 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본의가 아니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 기도 합니다. 나혼자만 실패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실패한 것을 만회 하기 위해서 계속 몸부림을 치다가 보면 주변에서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끊기게 됩니다. 그래도 끝까지 조건없이 도와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님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의 도움마저도 다 말아먹고 부모님이 가진 재산과 부모님이 그동안에 평생 쌓아 올렸던 것까지도 다 잃어버리게 만들면 그 때야 말로 그사람은 더 이상 내려갈때가 없는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로 표현을 한다면 ‘아둘람굴의 인생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다윗이 아둘람굴로 도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절 전반부입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굴로 도망하매...”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아둘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피신처’ ‘도피처’ 라고 하는 뜻이 있는데 그지역에는 굴이 많아서 사람들의 피신처로 적합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굴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울왕의 군사들이 침입할 때 이굴에서 저굴로 피신할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서 도망을 하고 도망을 하다가 오게 된 곳이 바로 아둘람굴입니다. 이때는 다윗이 깨어질대로 깨어지고 낮아질대로 낮아진 상태이었습니다. 그이전에 사울 왕에게 쫓길 때는 자기와 인간관계가 좋았던 블레셋 사람들한테도 도움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에서는 더 이상 블레셋 사람에게도 피신할 수가 없게 되어서 굴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온 일가족이 자기 때문에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1절 후반부입니다 “1.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그당시 베들레헴 고향에 있었던 다윗의 형제와 아버지 까지도 다윗과 함께 도망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형제들이 몇 명입니까? 사무엘상 16장을 보시면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이새의 집에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는 다윗이 여덟번 째 막내로 나옵니다. 그런데 역대상 2장을 보시면 다윗이 맨마지막 일곱 번째로 나옵니다. 여덟 번째가 맞아요? 일곱 번째가 맞습니까? 둘 다 맞습니다. 다윗의 형들 중에 한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한단계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저도 원래 따지면 아들로서 세 번째 입니다마는 사람들앞에서는 언제나 둘째 차남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로 위에 형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셋째가 아니라 차남이 되었습니다. 역대상 2장에서는 죽은 형을 빼니까 다윗이 일곱째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당시에 생존한 여섯명의 형들 가정과 부모님들이 모두가 다 피신을 했습니다. 다윗 때문입니다. 그 전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블레셋에게 피신할 때는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다윗이 역적의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일가족의 생명이 모두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수 없이 베들레헴 고향을 떠나서 다윗이 피신한 아둘람굴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다윗 때문에 주변에 있는 온 가족 형제들이 모두 도망을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던 다윗이 왜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되어졌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인생에 아둘람 굴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아둘람 굴의 상황을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 아둘람 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질문.
우리의 인생에 아둘람 굴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보시면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2절입니다. 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첫째로 “환난당한 모든 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둘람 굴은 환난을 당한 자가 모이는 곳입니다. 환난을 당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열심히 수고를 하면 수고한 것에 비례해서 열매를 얻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성실하게 일하면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환난이고 역경입니다. 코비드 때문에 그동안 내가 하는 가게에 갑자기 손님이 뚝 떨어집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적자운영입니다. 그것이 환난이고 역경입니다. 그동안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승진도 하면서 이제 겨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고칠수 없는 불치의 병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따스하고 훈훈했던 가정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들이 환난이고 역경입니다. 내가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역경을 당하고 있는 그 국민들입니다. 기도하실때마다 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둘람 굴은 어떤 곳입니까? 내가 그동안에 쌓아올렸고 이루어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아둘람 굴과 같은 시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빚진 모든 자”입니다. 아둘람 굴은 빚진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사실 환난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게 빚진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동안에 애써서 일구었던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을 때, 그냥 포기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하면 차라리 속이 편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빚진 자가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빈털털이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몸둥아리 하나 가지고 다시 시작할 입장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빚쟁이가 쫓아다니는것을 피할려고 동굴로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아둘람굴입니다.
세번째로 “마음이 원통한 자”입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둘람 굴입니다. 당연합니다. 환난을 만나서 빚까지 지게 되면 마음에 상처와 원통함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이때는 내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싶어집니다. 어떠한 모임에도 나가고 싶지 않고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지내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둘람굴은 이렇게 환난을 당한자와 빚진자 그래서 마음에 상처가 있고 원통함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둘째 질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인생에 아둘람 굴과 같은 경험을 하게 하십니까?
본문 1절 전반부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굴로 도망하매... “아둘람굴로 도망하매...” 지금 다윗은 도망다니고 있는 신세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사울왕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는 일이 생기자 사울왕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을 죽일려는 계획을 세우자 다윗은 살기위해 도망자가 됩니다. 다윗이 처음으로 도망간 곳은 ‘놉’ 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안전을 느끼지 못하게 되자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 지역인 ‘가드’로 도망갑니다. 어느날 하루는 거기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사람 흉내까지 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도망다니는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자리를 잡은 곳이 ‘아둘람’이라는 동굴입니다. 다윗은 약 10년동안 10군데가 넘는 처소를 옮겨다니며 도망자 생활을 해왔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자신을 가리켜 ‘외로운 자’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이 그랬던 것입니다. 다윗이 오랫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는동안 늘 외로웠고 혼자이었습니다. 시편 10편 1절입니다. 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환난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 10: 14절입니다. 14.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이렇게 다윗은 외로운 도망자의 신분으로 오랜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 이렇게 환난속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살아가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홀로 서기를 위한 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세상에 자신을 도와줄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세상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기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돕지 않는 나 혼자만이라고 느껴질 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크게 성장시킬수 있도록 때로는 우리 인생에 외로움과 홀로서기의 환경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혼자라고 생각될 때, 그래서 지치고 외롭고 힘들 때,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필요한 것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지닌 다윗이었기에 왕이 된 이후에도 여러 모양의 환난과 역경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그 순간을 극복해나갈수 있었습니다. 여러 모양의 환난과 역경중에서도 가장 큰 역경은 아들 압삽롬의 반란사건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랑했던 자신의 아들 압삽롬의 반란으로 인해 다윗은 가까운 친구 아히도벨과 자신이 속한 유다지파로부터도 배반을 당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랑했던 아들의 배반과 가까운 친구의 배반과 그리고 자기가 속한 가문인 유다지파의 배반을 경험합니다. 이때의 심정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41편 9절입니다.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자신의 아들과 가까운 친구와 그리고 자신이 속한 가문인 유다지파로부터 배신을 경험하게 될 때 이때가 다윗의 인생중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외로울 때 이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자기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다윗 자신을 지키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다윗의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고 신뢰했던 대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는데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충성을 하며 지키겠다는 그말이 자기 마음에 와닿겠습니까? 아들 압삽롬이 반란을 일으키는 그날 밤 다윗은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울면서 예루살렘 성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도 ’주께서 나와 함게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잘 아시는 시편 23편 4절입니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과 믿고 신뢰했던 가까운 친구와 자기가 속한 유다 지파의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속을 헤메고 있었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순간을 극복해나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렇게 할수 있는 믿음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옛날 환난과 고난을 만나 도망자 신분으로 살아갈 때 바로 홀로 서기의 연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고독과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다윗은 홀로 서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다윗은 경험했던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외로움과 홀로서기를 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시기임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기보다 먼저 나의 하나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에도 동쪽에 해를 뜨게 하십니다, 왜요? 이지구에 사는 만물과 인간들을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름다운 꽃을 이세상에 피우게 하십니까? 인간들을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언젠가 한번이라도 그곳을 지나갈 때 그 꽃을 보게 되는 나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왜 밤에 그렇게 수많은 별들을 빛나게 하십니까요? 그것은 어두운 밤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나를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바로 나를 위하여 창조하시고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감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이고 좁은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믿음이 출발된다는 의미입니다. 며칠전 저와 제 아내가 병원에 가서 일년 마다 정기적으로 검진하는 피지컬 이그잼을 받았습니다. 같은날 예약이 잘 안되어서 제가 먼저 진단을 받고 난후 일주일후에 제 아내가 같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제가 검사를 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진찰 결과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서 아내에게 ’당신이 그 의사에게 진단을 받을 때 질문을 해서 알아 오라‘ 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그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을 때 아내가 제가 요청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의사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는 지금 당신의 몸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지 당신 남편이 처한 몸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 당신의 남편이 가진 질문은 후에 내가 알아서 해결할테니까 지금은 당신과 나에 관한 대화만 하자“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선 나와 관련해서 관계를 가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세상에 해와 달을 만드셨습니다. 밤에는 수많은 빛나는 별들과 그리고 낮에는 아름다운 꽃들을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내가 기뻐하고 찬양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온세상의 인류를 위하여, 내남편 내 가족 내 교회 성도님들을 위하여 라고 말하고 고백하기 보다는 먼저 나를 위한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럼으로 지금 내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웅장하고 멋진 산과 바다를 보면서 나를 위하여 만들어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저와 여러분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우리는 나를 위한 하나님만을 바라볼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만 의지하며 어렵고 힘든 순간을 다윗처럼 극복해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환난과 고난의 순간에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홀로 서기를 통해 믿음을 성숙시키게 하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십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질문.
그렇다면 우리가 아둘람굴의 생활을 할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3절입니다. “3.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지금 다윗이 가지고 있는 마음중에서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이런 다윗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수가 있는 용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때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건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세우십니까? 아둘람굴의 생활을 겪은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본문 2절 후반부입니다. “2.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 이었더라” ‘사백명 가량 이었더라’ 400명이면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다윗에 왜 이렇게 환난과 역경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사울왕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려고 하자 사울왕이 자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윗을 죽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에 맞는 자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이 세워야 할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 마음에 합한 나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환난당한 사람을 위한 나라’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나라입니다. ‘빚진 자들을 위한 나라’ 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생을 살아가다가 하소연할데가 없어서 마음에 원통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워지는 나라’ 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서 세우는 나라가 아닙니다. 돈 많고 능력이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우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환난 때문에, 빚진 것 때문에, 배신감 때문에 그 마음속에 원통함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서 세우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입니다. 13.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그리고 마태복음 9장 12절입니다. 12.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이렇게 예수님은 죄인들과 병든자들을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는 그 나라는 마음에 원통함이 있고, 빚에 쪼달리고 그리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우는 나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께서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환난을 통해서 훈련을 시킵니다. 빚지는 경험을 통해서 훈련을 시킵니다. 마음에 원통함을 통해서 훈련을 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상 22장입니다. 그 다음장은 몇장입니까? 아무 부담이 없는 질문이죠. 23장을 보시면 이 사람들의 숫자가 400명에서 600명으로 불어납니다. 삼상 23장 13절입니다. “13.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규모가 늘어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시게 되면 어떤 조직과 체계가 잡혀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이 육백명은 점점 훈련받은 군사가 되어지고 충성심이 강한 용사가 되어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윗이 왕궁에 들어갈 때 이 육백명은 정예부대로 같이 들어가게 됩니다. 자 성도인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동안에 왜 아둘람 굴과 같은 생활을 할때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과는 다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받은자, 빚진자 그리고 원통한 마음이 있는자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아둘람 굴에 모이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능력이 있고 인생에서 성공의 길만을 걸어온 자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한 자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시는 지는 잘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환난속에 들어갈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둘람 굴의 생활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둘람굴 생활을 해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세상이 요구하는 능력과 성격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워낙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은 그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능력은 환난을 통해서 배운 순종입니다. 남에게 빚을 졌던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연약한 인간이구나 라는 사실을 배운 능력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배신을 당한 그 아픔과 원통함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아둘람 굴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가지지 못하는 능력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 중에 아둘람 굴에 있으신 성도님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기 요구하시는 능력을 가지면 됩니다. 그래서 순종을 배우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아둘람굴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아둘람굴은 오래 있을 곳이 못됩니다. 아둘람굴은 피난처이지 살 집이 아닙니다.
본문 5절입니다. “5.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매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지는 아둘람굴이 아니라 유다땅입니다. 아둘람굴에서 바라보면 저멀리 베들레헴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지는 아둘람굴이 아니라 유다 땅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 땅입니다. 그곳은 이세상이 아니라 저하늘 천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목적하신 그곳에 우리가 들어갈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잠시동안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아둘람 굴에 두십니다. 그리고 그 아둘람굴에서 나를 강한 용사로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성경 사무엘 하 23장을 보시면 아둘람 굴에 모였던 사람들의 이름과 그 업적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 23장 8, 9절입니다. “8.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9.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이러면서 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과 업적들이 계속해서 성경은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사람들 처럼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용사가 되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도 한때는 인생에서 실패를 해서 아둘람굴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그 아둘람굴에서 순종을 배우고 내 연약함을 배우고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배웠더니 이렇게 나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군사로 만들어 주셨군요. 다윗과 그 용사들은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책에 기록되어지게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러한 고백을 할 수가 있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지금은 비록 저와 여러분이 아둘람 굴에 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능력을 배울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