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냐 문이냐?
<빌립보서 1 장 12-21절>
12.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는 대부분 저녁에는 가정이라고 하는 울타리안에서 지내다가 날이 새면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사회생활을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라고 하는 이 안전한 울타리안을 벗어나 사회생활을 할 때 때로는 곰이라는 장애물을 만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울타리 밖에 나가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울타리 밖에 나가 온전하게 사회생활을 할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곰을 피해서 곰이 안보이는 쪽에 있는 담을 넘어서 나가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곰과 싸워서 곰을 물리치고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있는 곰을 이렇게 180도를 돌려서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면 곰이 아니라 문이 됩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 그래서 내가 앞으로 갈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한 단계 전진 할수 있는 기회가 되는 축복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곰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문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내가 가는 길이 막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곰 이라는 글자를 180도 회전시키면 문이 된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역설적인 사고방식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을 깨어버리고 새로운 길과 방법을 제시해주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10절입니다. 10.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내가 힘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약할 때 그때 강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하다고 하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그래서 오직 주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힘이 있고,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도 많아서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 때가 오히려 약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의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한가지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입니다.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목숨을 얻는자는 잃을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는자는 얻으리라’ 그러니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요 죽을려고 하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죽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어쨌든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이 가진 사고를 뒤집어 놓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역설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하면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뒤집어서 생각하고 뒤집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만난 장애물의 내용을 알려줍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로부터 순교를 할때까지 사도바울은 마라톤 선수처럼 쉬지 않고 계속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순탄하고 쉬웠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유태인들이 사도 바울의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려운 환경들이 바울이 가는 길을 방해했습니다. 수없이 굶기도 하고 붙잡혀서 채찍에 수없이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번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 때문에 좌절하거나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20절 후반부입니다.
20....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서 존귀하게 되게 한다는 원어는 ‘메가누노’ 인데 ‘가장 크게 한다(magnify)’ 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메가누노 에서 영어 단어인 magnify(찬미한다, 확대한다) 가 나왔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이는데 자기 인생의 최고 가치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작게 보여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에게도 적용해볼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이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그래서 돈이 생겨도 술 생각, 일을 해도 술 생각, 무슨일을 하든지 술을 마실 생각을 합니다. 도박중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생기면 도박을 할려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만들 생각을 합니다. 거짓말을 해서 돈을 꾸기도 하고 강도짓을 해서 돈을 만들어 도박을 합니다. 그러다가 감옥생활을 하다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그날부터 또 도박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작아보이고 사소해 보이게 되어집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자기가 감옥에 있어도,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고 비웃어도 개여치 아니하고 자기앞에 닥친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며 살아갈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사도바울이 겪고 있는 장애물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중에 여러 장애물을 만나게 될 때 사도바울처럼 극복할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바울의 장애물
1.환경의 장애물 (로마 감옥)본문 13절입니다.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나의 매임이...’ (I am in chains)
여기서 ‘나의 매임‘은 바로 로마 감옥생활을 의미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4년동안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김옥생활을 한 초창기이었던 지금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위대는 그당시 로마 황제를 지키는 군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로마항제 직속 부대입니다. 로마 황제를 지키는 직속부대이니까 상당한 세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 시위대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일반 감옥이 아니라 이런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에 갇힌 이유는 죄수였지만 많이 알`려지고 유명한 죄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는 하루 6시간씩 4교대 하면서 군인들이 죄수들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6명의 군인들이 1개조가 되어서 감방안에서 두사람, 감방 문밖에서 두사람 그리고 감옥 전체 출입구에 두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감옥생활이 얼마나 숨이 막히고 답답하겠습니까? 이러한 환경에서 계속 생활을 하게 되면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과 육신의 병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당시 사도 바울은 몸에 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때 바울의 나이는 60을 넘긴 노인입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환경에서 지낸다는 것은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매인자’ 다시말해 ‘감옥에 갇힌자‘ 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바울은 자기곁에 서서 지키고 있는 두 명의 군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수 있었습니다. 두 명의 군인이 하루에 4교대를 하니까 하루 8명입니다. 바울이 잠자는 시간을 뺀다고 해도 6명의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로마 시위대 군인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기 위해 로마 황실의 귀족출신들도 개인적으로 바울을 찾아와 만나 복음을 듣는 일이 생겼습니다. 본문 13절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서 ‘시위대 안’ 은 로마 감방을 지키는 군인들을 의미하고 ‘그밖의 모든 사람’ 은 로마 황실 귀족 출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이 감옥 생활하는 것을 ‘매여있다‘(in chains) 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저런 일로 매여있는 생활을 할때가 많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매여있을수도 있고, 자녀들이나 부모님에게 매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질병에 매여있을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혼의 아픔이나 실패의 부끄러움에 매여 있을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에 매여있을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매여있는 종류는 각각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다 바울처럼 매여있는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매임과 우리들이 매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임을 당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I am in chains for Christ’ 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매임을 보면 for 가 아닌 by 인 경우가 많습니다. I am in chains by something입니다. 어쩔수 없이 매여지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매임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매임이 예수님과 관련이 없는 매임이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의 매임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자유롭게 활동을 할수 없는 상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복음은 더욱 활발하게 전파되어져 갔습니다. 바울은 갇혀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의 문이 열려져 전파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장애물을 만나게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은 나를 매이게 하고 힘들게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이 환경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환경이라는 장애물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환경을 내게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환경을 내게 허용하셨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할때 우리는 이 환경의 장애물과 매임에서 벗어나게 되는 길을 걸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문을 열어놓으시고 나로 하여금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 앞에 환경의 장애물을 허용하셨을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어떤 장애물을 만날때 ‘이 장애물에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선하신 또다른 뜻이 있다‘ 고 믿고 그 환경을 극복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르으로 축복합니다.
2.사람의 장애물
바울은 감옥이라는 환경의 장애물과 더불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러니까 그당시 바울이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에 바울이 처한 이런 환경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로 바울을 비난하고 부정적으로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16절입니다.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사랑으로 하나’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을 대신해서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난하고 부정적으로 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17절입니다.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 사람들은 옛날에 바울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을것입니다.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지만 이 사람들중에서 바울이 가장 핵심인물 이었고 가장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가 바울을 대신해서 큰 영향력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간 바울을 무시해버리고 비난해서 바울의 존재감을 없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경쟁하고 다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어려운 환경을 만나게 될수 있습니다. 질병을 만날수도 있고 경제적인 가난을 만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환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되어집니다. 하지만 사람들로 인해 받게 되는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극복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내가 믿고 있었는데 배신하는 경우를 만나게 될때 마음의 상처는 큰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들간의 관계에서 받게 되는 장애물도 극복했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18.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바울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일을 하던 나를 시기 질투하는 마음에서 일을 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나는 기뻐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내이름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될 때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 때문‘ 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매사에 주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의 행실이나 그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동기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동기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의를 위한 것이다‘ 라고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든 시기와 경쟁적으로 하든 것이든 그것은 주님이 판단하고 평가해야할 차원입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 영역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위하고, 자기가 돋보이기 위해서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한다 할지라도 그일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난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던 자기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사람이던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보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 더욱 귀하고 중요하다’ 고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내가 싫어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사람이 어떠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인지는 주님이 판단하시고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처럼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이렇게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죽음의 장애물
바울에게는 환경의 장애물과 사람의 장애물과 함께 죽음에 대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20절 후반부입니다. 20.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말은 세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 내용으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 그것만이 바울의 최고의 관심사이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죽음은 바울에게 있어선 환영하고 기뻐할만한 좋은 일이었지 두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죽으면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좋고 내가 여기에 있으면 너희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니까 너희들에게 더 유익하다. 나를 생각하고 내 입장만 생각하면 주님에게 가는 것이 좋지만 연약하고 흔들리는 너희들을 위해서는 내가 아직 세상에 있는 것이 좋다. ’죽으면 내게 좋고 살아있으면 너희들에게 좋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본문 마지막 21절입니다.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바울은 예수님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살아가는 것은 돈입니다. ‘내게 사는 것은 돈이니..’ 하며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섹스입니다. ‘내게 사는 것은 섹스이니...’ 또 어떤 사람은 명예입니다. ‘내게 사는 것은 명예이니..’
사실 이 모든 것은 이땅에서 있을때만 존재하는 것이지 죽게 되면 모두 다 두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갔을 때 내 곁에 계실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나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땅을 살아오는 동안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온 것을 예수님이 증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앞에 나와 함께 계실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지금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하고 귀하게 여기실 분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때 우리도 바울처럼 죽음이라고 하는 장애물도 극복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게 됩니다.
이제 간단히 정리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듯이 바울에게도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인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론 죽음이라는 장애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종류의 장애물들이 상대적으로 작게 보였습니다. 이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장애물로 믿고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해나갈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에 바울이 만난 이러한 장애물들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십시다. 그러면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고 사나운 곰을 만나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두렵게 하고 나의 앞길을 막는 곰이 아니라 또 다른 길을 열어놓으시는 출입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내가 만나게 되는 이런 저런 장애물은 단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보이시기 위해서 내게 허용하신 또다른 축복일 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