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위로하라

Author
kgmcc
Date
2022-06-12 01:19
Views
25
본문 : 이사야 40장 1-3절

날짜 : 2022년 6월 12일



 

<이사야 40장 1-3절>

1.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매년 성탄절시기가 되면 큰교회에서는 헨델의 메시아 곡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 메시아 곡중에 2부 마지막을 장식하는 할렐루야 합창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다들 한두번씩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만 얼마나 웅장하고 장엄한 곡인지 모릅니다. 이 메시야곡이 처음으로 공연될 때 당시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할렐루야’ 의 음악을 듣고 너무 감격해서 일어나서 듣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이후 오늘날에도 이 메시아 곡중 ‘할렐루야’ 합창곡이 연주될때는 청중들 모두 기립하여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시는 주님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헨델의 메시아곡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습니까? 헨델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세상사람들로부터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국 런던에서 여러번 음악회를 열었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했습니다. 거듭된 공연의 실패로 인해서 이 헨델은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 실패로 인해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52(쉰두살 때)에 뇌졸중으로 인해서 반신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의와 좌절에 빠져잇을때에 촬스 제임스라는 믿음이 있는 친구가 찾아와서 책을 한권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고 힘을 내서 다시한번 작곡을 해보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책에 있는 내용이 자네를 위로해줄것일세’ 그래서 헨델은 그 책을 읽어 보게 되었는데 그 책에는 온갖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헨델은 그 책을 읽으면서 말씀에 붙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다시 힘을 얻게된 이 헨델은 식음을 전폐하고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작곡을 마졌던 것입니다. 24일째 되던날 하인이 헨델이 있는 방에 들어갔더니 헨델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에 헨델은 악보를 들고 내앞에 하늘이 열렸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라고 외쳤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연주하는 시간만 해도 2시간이 넘는 대곡을 24일만에 마칠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불가능 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헨덴의 메시아 곡 첫내용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바로 오늘 본문 첫절에 나오는 내용이죠. 1절 보시겠습니다. 1.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백성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죠.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지금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와서 노역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결과 그들은 바벨론으로부터 침략을 받았고 예루살렘의 성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70년동안 노역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에 패배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포로가 되어 이방의 땅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었겠습니까? 몇년전에 탈북한 북한 사람들이 태국에서 머물고 있는 수용소에 대한 뉴스를 듣었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중국 내에 있는 각국 대사관 진입할수 있는 길이 아예 차단되어있어서 많은 탈북자들이 이 태국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 탈북자들이 태국에 도착하려면 일단 최소 서너 번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북한 경비대, 중국 공안, 라오스 경비대의 감시망을 피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밤 시간대를 이용해 도보와 차량으로 이동을 합니다, 이렇게 가다가 도중에 체포되거나 헤매다 죽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태국 국경지대를 넘어가면 경찰서나 이민국 수용소로 찾아간답니다. 그러면 태국에서는 이 탈북자들은 일단 불법 입국자로 취급돼 재판을 받고 대기 기간을 거쳐서 방콕 이민국 수용소로 이감됩니다. 이 태국 수용소에서 머물고 있다가 신원수속을 다 밟게 되면 대부분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탈출하여 태국수용소에 잠시 머물고 있다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에게 하루는 전화가 왔는데 받아보니 자기 엄마이었습니다. 자기 엄마도 탈북해서 태국으로 와서 자기가 머물고 있었던 그 수용소에 왔는데 거기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에게 기자가 지금 심정이 어떻냐고 물었보았습니다. 그때 그자매가 이렇게 대답을 했던 내용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예 저는 이곳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또다시 오게 되었네요’ 그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했으면 다시는 오고싶지 않다고 말했겠습니까? 그 방송말미에 그 수용소에서 나와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중 한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가 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는 그순간에 울어버리고 말것입니다’ 그래요 감옥과 같은 수용소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의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서 70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시편 126편 1 절을 보게 되면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 이게 꿈이나 생시냐 반신 반의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사아야 너는 그들에게 가서 내 백성을 위로해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고난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바벨론 강가에 모여서 같이 기도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는 아니하셨을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내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로 인해 징계는 하시지만 버리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이 잘못하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때리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징계하시고 때리시지만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으시고 결코 우리를 포기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징계받고 고난가운데 있을 때 말합니다. 너는 끝장이야 하나님은 너를 포기했어 하나님은 관심도 없어 그러니까 너가 그냥 그런 고통가운데 있는 것이야.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도 포기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한바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입니다.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내용은 예례미야가 하나님이 편지를 쓰라고 해서 써가지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보낸 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례미야에게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말씀하셧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싶어서입니다.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그들은 밤마다 바벨론 강가에 모여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시편 137편 1절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들은 고향과 가족을 떠나 말도 안통하는 이방나라에 포로가 되어 살면서 너무 슬프고 우울하고 두려운 가운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소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게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을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다. 멸망이 아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징계로 인해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평안을 누리기 원한다. 너희들이 굴욕과 비참한 생활가운데 있다할지도 너희들의 미리애 소망을 가지길 원한다. 이것이 바로 자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은 우리가 인생의 고난가운데 있고 인생의 어두운 밤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희망과 소망을 가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본문 1절 말씀을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시길 원하시는가를 보여주고 잇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51장 12절입니다. 12.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이사야 66장 13절입니다. 13.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이사야서 40장 이후부터 위로라는 단어가 열다섯번이나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바벨론의 포로된 자기백성들, 고난가운데 있는 그들을 하나님은 위로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장 3-4절입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이 왜 환난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그 위로를 가지고 또다른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래서 성경을 보시게 되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내용으로 가득차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기진맥진해서 로뎀나무 밑에 쓰러져 더 이상 살아갈 소망을 잃어버리고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하는 그 엘리야를 하나님은 위로하셨습니다. 그래서 위로하심을 경험해서 회복하게 된 엘리야로 하여금 주변의 고난과 어려움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난후 그들은 절망과 낙심속에서 자기의 고향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일부러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다른 위로자가 되어 절망에 빠진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로를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리고 베다니 마을 사람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병에 걸린 병자들을 회복하게 해주심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귀신들린자들을 자유케하심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들을 사람들이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중에 죄없는자가 이여인을 돌로 치라’ 라는 말씀으로 주변사람들을 다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말씀을 듣었을때에 이 여인이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줄 알았는데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이 말씀에 얼마나 위로가 되엇겠습니까? 예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뿐만아니라 성령님도 위로자이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 이단어의 의미는 몇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는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의 심령안에 찾아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상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때마다 성령님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할 때 성령님께서는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십니다. 이렇게 성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위로해시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서 위로해주시기도 하고 말씀과 찬송으로 위로해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절 중반부입니다. 2.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위로의 내용은 첫째로 노역의 때가 끝났다 둘째는 죄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죄값이 완벽하게 지불되었다는 것입니다. 벌을 배나 받았다는 표현은 죄값이 완벽하게 지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을 통해서 죄값이 다 지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의 백성아 너희들의 죄가 다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희들의 죄값이 다 지불되었느니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죄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었노라’ 라고 하는 것이 위로의 내용이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그렇게 실감있게 다가오지 않지만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이 말씀보다 더큰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36년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시대를 살지 않아서 잘모르지만 저희 부모님들에 의해서 들은바에 의하면 그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대동아 전쟁터로 군인의 신분으로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가야 햇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4대독자라 동남아쪽으로 가지는 않고 일본 본토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어느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섬에서 배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게 되었는데 그날 아침 누가 신발을 훔쳐갔답니다. 그런데 신발을 찾다가 시간을 놓치게 되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봐 신발도 신지못하고 그냥 맨발로 배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신발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그냥 오셨겠습니까?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마 저희아버님은 신학을 공부한 저보다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그 기쁨을 훨씬 더 잘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요.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최고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이세상의 가장큰 위로는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위로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요,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은 우리는 이세상에서 최고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살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가? 죄사함을 받지 못해서 여전히 죄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좋은 집과 차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죄에서 사함받아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위로는 내가 비록 넘어졋다 할지라도 그죄를 회개함으로 사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그 위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아갈때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주시는 위로를 누리다가도 주변에 사람들과 몇마디 대화를 하다보면 위로를 잊어버릴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는 우리가 위로를 누리지만은 예배를 마치고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주신 위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관계의 문제나 이런 저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내영혼이 육체의 장막을 벗고 이세상을 떠나서 천국에서 신랑되신 주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을 3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3절 보시겠습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말씀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침례요한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예수님이 오심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위로는 다시오실 주님을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날에 우리 주님은 가장 먼저 나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3-4절입니다. 3....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모든 눈물입니다.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면서 흘리는 눈물의 종류가 너무나 많습니다. 배신를 당한 아픔의 눈물이 있습니다. 패배와 좌절의 눈물이 있습니다. 후회스러운 눈물이 있고 외로움의 눈물이 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흘렸던 눈물도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울기도 하고 운전을 하면서 울기도 하고 잠을 자면서도 웬지 모르게 서럽고 원통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왜 눈물이 자꾸만 나는지 나자신도 이해할수 없는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눈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땅을 살면서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 모든 눈물을 기억하시고 다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모든 눈물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위로를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차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날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한 우리들은 내가 경험한 이 위로를 가지고 다른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위로를 해야 합니까? 본문 2절 상반부를 보시겠습니다. 2.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여기서 예루살렘의 마음이란 고난과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에 와 닿도록 위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위로하지 말고 마음으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나오는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경험을 해보셨겠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보면 그사람이 굉장히 샤프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하나의 단순한 지식과 정보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 이야기 해보면 논리적이지 못해요. 그런데 마음에 와닿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런데 머리에서 나오는 지식이나 논리는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마음에 와닿는 위로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본사람입니다. 하나님위로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와닿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요. 이세상에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다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주고 받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는 위로자가 별로 없습니다. 이세상에는 남을 공격하고 대적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남을 위로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세상에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자녀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아내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남편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환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환자를 힘들게 고치고 치료의 과정을 보고 잇는 의사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목사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요 선포되어지는 메세지에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그 말한마디가 목사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함게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것입니다. 저는 우리 지구촌 교회 성도들이 숫자는 적지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은 자로서 위로하는자로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위로의 단어를 히브리어로 해석해보면 다시 숨을 쉬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들을 보면 숨이 막힐듯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대로 그냥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숨이 막히게 살면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분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임하면 다시 숨을 쉴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범죄를 해서 하나님의 징계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로하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를 누리는 우리들이 또다른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이땅에서 완전한 위로하심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날 완벽한 위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먼저 주님의 위로하심을 누리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한 또다른 위로자가 되어 위로를 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