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령의 도우심과 결과

Author
kgmcc
Date
2020-03-02 02:59
Views
125
본문 : 롬 8장 26-28절

날짜 : 2020년 3월 1일

 

<로마서 826-28>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참으로 약한 존재라 할수 있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하면서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도 집에 돌아오면 고독감과 외로움을 이길 수 없어 왕후 조세핀의 무릎을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실제로는 의지할 곳을 찾는 매우 약한 존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질병에도 약하고 바이러스에도 약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중국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유혹에도 약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유혹 앞에 넘어졌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도 유혹 앞에 넘어졌습니다.

이런것들을 보면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완전한 사람이 있나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했겠습니까? 그만큼 실수가 많고 부족함이 많은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연약한 우리 인간을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26절 전반부입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알지 못하면 어떻게 도와 줄 수 있겠습니까? 잘알고 계시기 때문에 도와주실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나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안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승리할 수 있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이 연약함에 대해 감사할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 연약함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연약함이 있었던 사도바울도 이렇게 고백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 12장 9절입니다 "9.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바울이 자신에게 육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 능력이 너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느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을 도우시고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우리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우리를 슈퍼맨이나 천사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길 수 있게 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슈퍼맨이나 배트맨으로 만들어서 나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한 자로 만들어서 연약함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연약함을 그대로 놓아둔 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가시는 그대로 둔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라고 표현할 때 돕는다는 말은 “함께 담당한다” “함께 가담하여 열심히 돕는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같이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돕는다는 단어가 성경에 두 번 나오는데 또 한곳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열을 받아서 예수님에게 가서 이렇게 말을 하죠. 누가복음 10장 40절 후반부입니다 “40.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도와 주라 하소서. 바로 거기에 나온 단어를 성경원어로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우시나니 라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지금 마르다가 어떻게 도와달라고 합니까? 음식이 잘되었나, 안되었나 맛을 좀 봐달라는 것입니까? “언니 이 음식은 싱거워. 소금 더 집어넣어야 되겠어. 언니, 이 음식은 덜 익었네. 1분 정도 더 익혀야 되겠어.” 이렇게 도와달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반대로 언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할게. 이런 것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팔을 걷어 부치고 같이 음식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는데 이래라 저래라 코치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너는 저기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다 해치울게” 이런 식으로 도우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성령님의 도우심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파출부나 도우미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가 자신의 약함을 알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할 때 나를 도우십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이 연약함을 그대로 두시고 나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성령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님은 가장 먼저 우리가 기도할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할 때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육신적으로 연약하든지, 정신적으로 연약하든지, 영적으로 연약하든지 간에 어떤 연약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제일 먼저 기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기도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조금만 열을 받아도 기도가 안 됩니다. 부부싸움을 해서 한창 열이 나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여보 우리 같이 기도하십시다” 이러시던가요? “그래 맞아, 기도를 해야지”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들도 계십니까? 그렇게 하실수 있는분들은 아예 부부싸움도 안하겠지요. 우리는 세상 향락에 조금만 취해도 기도가 막힙니다. 드라마 한, 두편 보고나서 기도할려고 하면 괜히 쑥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기도가 안되고 너무 피곤해도 기도가 잘 안됩니다. 잠만 오지요. 이래서 기도 못하고 저래서 기도 못하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할수 있도록 성령님께서는 도우십니다.

그런데 기도하기가 어려운가요? 쉬운가요? 기도는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왜 가장 쉬운 일입니까? 기도란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때는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눕니다. 이런 관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도란 이렇게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기도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 바자회나 새신자 환영회 같은 행사가 있으면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밤을 새워서라도 음식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라고 하면 한 시간도 못하고 다 일어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에는 어디를 가든지 잘 따라 다녔습니다. 광야로 가자하면 광야로 가고, 배를 타고 가자하면 배를 타고 가고, 전도하라고 내보내도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라고 하니까 다들 자빠져 잠을 자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기 직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해다오’ 라고 그렇게 세 번이나 부탁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때마다 잠을 자버린 것입니다. 왜 그래요? 기도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단의 방해를 많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이렇게 하기 힘들고 사단의 공격을 많이 받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심으로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때 끙끙 신음을 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못된길로 나갈 때 부모님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끙끙 앓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친히 기도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세상의 정욕과 유혹을 따라 살아가고 세상의 넓은 길로 나아갈 때 근심하시며 탄식하시며 기도하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면 말할수 없는 탄식까지 하시면서 기도하시겠습니까?

2.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심으로 도우심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때문에, 정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시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두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자기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입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조금 원색적으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느냐?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귀하고 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아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끼리 다투는 것을 보면 가끔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서로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구하십니다. 만일 성령님께서 우리의 원함만을 따라 기도하시고 우리의 간구하는 대로만 간구하신다면 성령님은 우리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요. 성령님은 직접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 주심으로서 기도하는 사람도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생활을 많이 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종종 기도가 깊어지면 내가 하고자 하는 그 기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기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성령님께서 내 생각을 사로 잡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영적인 희열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도우심으로 주어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28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령님께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신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간구하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할 때 선을 이룬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선‘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아가돈’인데 이 말은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만사형통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유용하게 만든다.’ ‘가치있게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유익하게 만들고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돈과 출세와 성공이 내영혼에 유익이 됩니까? 물론 그럴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출세와 성공은 그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가정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은 나의 영혼에 유익하고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합력하여라는 말은 ‘쉬네르게오’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함께 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조금전에 살펴보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의미는 내가 가만히 있고 성령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약한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할 때 성령님께서 함께 일하신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곧 합력한다는 의미라 할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도 경험합니다. 진학에 실패하기도 하고 결혼에 실패하기도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아픔도 경험합니다. 핍박도 받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유혹을 받아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마지막에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까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나의 좋지 못한 과거까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약점, 실수와 허물, 넘어짐까지라도 내 영혼에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시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 성경의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다른사람들이 겪지 못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가까운 형제들이 돈을받고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끌려가 애굽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한 탓에 주인의 신임을 얻게 되어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제 좀 살만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보디발의 아내의 누명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감옥에 들어온 술관원이 꿈 꾼을 해몽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술관원은 2년후 애굽왕이 꿈을 꾸게 되었을 때 자기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해준 요셉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왕이 꾼 꿈을 해몽함으로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이 요셉으로 인해서 애굽나라에 들어온 요셉의 가족들은 그이후에 애굽나라안에서 큰 민족을 이루며 성장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 만일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너무나도 잘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나중에 양식을 구하러 온 자기의 형들을 만났을 때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렇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나를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으로 팔아버렸지만 운이 좋아서 내가 이렇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창 45장 5절입니다.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생명을 구하시는 일입니다.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구덩이에 집어 넣기도 하십니다. 종의 신분으로 팔려가게도 하고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십니다. 중국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열이 섭씨 40도 가량 올라가게도 하십니다. 가족 때문에 고통을 받게도 하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결과적으로 내 영혼에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나의 실패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눈물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축복을 누립니까? 아무나 이러한 축복을 누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는 그누구도 예수님을 구주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면 사람에 따라 그 시기와 모습이 다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르심을 입은 자가 있는가 하면, 좋은 세상 다 보내고 인생의 황혼에 죽음의 직전에 부르심을 받은 분도 계십니다. 어떤 분은 건강하고 잘 나갈 때는 예수를 핍박하고 거절하다가 실패를 통하여 육체의 질병을 인하여 부르심을 받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교육의 어려움을 통하여, 어떤 분은 교통사고를 통하여 부르심을 받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인생의 허무함을 통하여 어떤 분은 인간관계의 아픔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형태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간에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룩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본문 2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말씀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좀 부족하다 할지라도 이 지식만큼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부동산 경기는 잘 모르고 세상의 물정은 잘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진리만큼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운명론자가 되어 내자신의 실패와 넘어짐을 한 없이 한탄하고 자책하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 그때 나는 이 남자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 이것이 내 운명인가 봐. 아이구 남편 복도 되게 없지. 가방 끈이 짧은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이렇게 운명에 맡겨 살아가는 인생, 자포자기 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넘어지는 일이 생겨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 넘어졌다 할지라도 역전의 은총을 경험하며 전화위복의 축복을 소망하며 다시 일어섭니다. 새롭게 도전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그 뜻대로 부르신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십니까?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지금은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만을 알고 이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