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믿을때 일어나는 현상

Author
kgmcc
Date
2022-06-25 23:06
Views
19
본문 : 요한복음 1장 12절

날짜 : 2022년 6월 26일

 

<요한복음 1장 12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얼마전 뉴스 기사에 어느 한 사진사가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생기기 이전과 그 이후에 어린 아이들에게 생긴 변화에 대해 자신이 느낀 점을 고백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에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 어린 아이를 웃게 하는 것이 쉬웠는데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후에 가족사진을 찍을 때 어린 아이들이 잘 웃지 않아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웃음을 잃어가고 있는 현상은 코로나로 인한 관계성의 단절 때문인 것으로 심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만나 서로 뛰놀면서 감정표현과 사회성이 키워지게 되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이러한 기회가 없어지게 되자 어린아이들이 사람들앞에서 감정표현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현상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곧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한문으로도 사람 人자를 보면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누군가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제일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외로움과 고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인 하와를 지으십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외로움과 고독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들도 외로움과 고독을 싫어합니다. 이곳 미국에서 노인 아파트가 세워진 곳을 보면 경치가 좋고 조용한 산기슭 같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복지시설이 잘되어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붐비는 샤핑 하는 장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적한 곳보다는 사람이 많고 복잡한 도심지 안에 노인 아파트가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이유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보다는 그래도 사람이 많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보다 쉽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수 있는 환경이 노인들의 정신과 육신적인 건강에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불어 살아갈 때 훨씬 더 건강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에 소홀히 하고 관계를 무시하고 살아가면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관계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누가 실패한 사람입니까? 관계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위간 박사가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한적이 있습니다. 그 연구 결과 전문지식이 모자라 실패한 사람들은 불과 15%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85%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인생에 실패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부를 남보다 못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하기 때문에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 재단에서도 5년동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1만 명을 대상으로 ‘성공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았는데 85%가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인간관계를 잘했기 때문에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통계 자료를 보면 행복한 삶,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식이나 능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외로움과 고독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해답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그누구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 인간은 불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 인하여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입니다.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1:21)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원수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우리 인간은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기 전 우리의 상태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입니다.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3)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예수님을 믿기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에 무슨 평안이 있고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옆집 이웃사람과도 원수를 맺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무슨 평안이 있고 참된 자유가 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이 범죄하고 난 다음 가장 먼저 경험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아담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맺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불안과 공포 두려움 속에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이런 저런 종류의 두려움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의 원수된 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졌던 그 이상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만이 인생의 진정한 성공자인 것입니다.

□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청산하고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처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나 이론의 차원이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문밖에서 벨을 누른다고 하십시다. 그래서 내가 안에서 확인해보니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웃사람에 대해 나는 잘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한명 딸이 한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곳으로 이사 오기전에는 뉴욕에서 왔습니다. 남편과는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고 나이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가지고 그사람을 믿는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사람을 믿는다면 문을 열고 그사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내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2천 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만들었고 그 죄가 우리에게 죽음과 가난과 질병과 온갖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그냥 사라지라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치루어야 할 값이 있습니다. 그 값이 무엇입니까? 형벌입니다. 고난입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의 값은 죽음입니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누군가 반드시 이러한 죄 값을 치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 죄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습니까?

예수님은 먼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심으로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시로 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너무나 피를 많이 쏟음으로서 목마름의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30센티나 되는 대못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말로다 할 수 없는 수치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빰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말하며 조롱하였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님을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고 있던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한번 구원해 보라. 어찌 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인류를 구원해 내겠다고 하느냐” 라며 조롱하였습니다.

이렇게 온갖 고난과 수치와 형벌을 당하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값을 지불했다, 완불했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그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아니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죄 값을 치루신 그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예수님과 나 사이에 관계가 맺어집니다.

□ 신비한 연합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어떤 관계가 이루어집니까?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내가 연합되어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1장 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절a)

예수를 믿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이 영으로 내안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요14장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내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예수님이 영으로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가 그 안에 거하게 되는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예수님은 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나무와 가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가지도 나무를 떠나면 죽습니다. 왜냐하면 가지는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나뭇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살아갈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무와 가지처럼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는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뜬 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내 안에 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시기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요한 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다음에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먹고’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식인종이십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친밀한 사귐을 말합니다.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갖기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강제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 열 때까지 주님은 계속하여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내리는 추운 날에도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고 힘들어 하는 순간에도, 인생이 너무 힘들어 살아갈 용기마저 잃어버리고 인생을 포기하고자 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릴 때 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예수님을 내 마음문을 열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 주님과 하나되는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그러면 이제 그 신비한 연합의 관계를 통하여 주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가장 먼저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법적으로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법적으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가 맺어졌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친밀한 감정이 없다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입양한 자식들이 자신의 양부모를 살해하는 사건들이 종종 나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생겨납니까? 법적으로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되었지만 서로 간에 사랑과 친밀한 교제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큰 요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법적으로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내가 그분의 자녀이지만 평상시에 아무런 친밀한 교제가 없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그냥 부르는 칭호 일뿐입니다. 아버지 보다 옆집 아저씨를 더 좋아하고 따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단지 의무적으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친밀함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피조물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갖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제든지 아버지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바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할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세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도 하고 자신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한 만큼 행복합니까? 그렇게 수고한 만큼 성공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인생의 성공이고 무엇이 인생의 실패입니까?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면 그것이 성공입니까? 남보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면 그것이 행복입니까?

진짜 성공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지으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진짜 성공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행동은 인생의 해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포도나무와 나무 가지처럼 주님과 내가 신비적으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 순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당당하게 아버지 앞에 나아가 필요를 구하고 아버지의 위로와 보호를 받으며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날마다 기도를 통한 친밀한 교제를 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이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