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Author
kgmcc
Date
2022-07-10 01:15
Views
189
본문 : 고린도 후서 8장 6-11절

날짜 : 2022년 7월 10일

 

<고린도후서 8장 6-11절>

 

6.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10.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전 세계적으로 아웃 도어 브랜드로 유명한 L. L. Bean 회사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12년 미국에서 레온 레온우드 빈이라는 남자가 작은 신발 사업을 시작한 것이 현재와 같은 아웃 도어 브랜드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레온 레온 우드 빈이 처음에 사업을 할 때 아웃 도어용 신발 한 종류만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홍보를 위해 품질에 이상이 있다면 무조건 환불을 해주겠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 1차로 판매된 양의 90%가 환불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제품은 하자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상이 있다면서 환불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환불을 해달라고 하는 제품이 많이 돌아오자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사람은 끝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말한 약속을 지키면서 환불을 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레온 레온우드가 창립한 엘 엘 빈은 망하지도 않고 미국에서 최고로 신뢰받는 아웃도어 제품 회사로 성장했던것입니다. 지금 아마존이 이렇게 성장할수 있는 것은 환불 요청을 하면 두말없이 환불을 해준다고 하는 확신이 고객들에게 심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마켓팅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제품을 신뢰해서 그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주 쉽게 언제든지 환불할수 있다고 하는 인식이 되어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품을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서 전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올라도 너무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경기가 침체되고 금리가 올라가면서 아파트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부동산 투기를 방지하는 정책이 없어서 이렇게 가격이 올라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부동산 투기를 방지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수 십번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만 하면 워합니까? 약속만 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예루살렘교회가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교회보다 먼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내린 이러한 결정이 하나의 동기가 되어 다른 많은 교회들도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동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제헌금을 작정한 지 1년이 지나도록 그일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본문 10절 후반부입니다. “10.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고전8:10) ‘너희가 일년 전에..’

그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흉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경제상황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성도들은 점점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보다도 먼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것도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원하여 구제헌금을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정만 했다는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변화 관리 전문가인 팻 맥라건 (Patricia McLagan) 이 쓴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unstoppable you) 라는 책이 있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 이 책 제목만 보아도 어떤 내용인지 쉽게 추측할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 팻 맥라건은 지난 30여 년 동안 수많은 사업가들과 상담하면서 사업이나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개인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연구 분석한 끝에 이 책을 내었다고 말합니다. 간단히 결론적으로 말하면 변화의 힘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데, 문제는 ‘당신이 끝까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강한 신념과 강한 품성을 가지고 행동을 해나가는 것 뿐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생각하고 계획만 하고 결심만 하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일년전에 계획을 했지만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 디도를 통해서 눈물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편지를 써서 기근과 핍박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하루 속히 도와 줄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그 일을 구제라고 말하지 않고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여기서 “이 은혜”는 바로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헌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를 성취하게 하라”는 말은 핍박과 기근으로 인하여 고통 중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작정한 그 헌금을 속히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제헌금이라 말하지 않고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이 은혜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 은혜도” 역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구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이 고린도 교회 보다는 늦게 구제 계획을 세웠지만 더 일찍 교회 헌금을 모아서 그당시 어려운 지경에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본문앞에 나오는 1절을 보시겠습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다음 2절입니다.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바로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드린 연보 즉 헌금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돕는 구제를 구제라 표현하지 않고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을 구제라는 단어보다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를 입은 자만이 나누어 줄수가 있고 이 나눔이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라!” “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나누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누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움켜쥐는 인생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경제적으로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힘을내어 선교 헌금을 하는 이유는 나눔으로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일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미약하고 작은 저희 교회를 위해 가끔 한번씩 헌금을 하시는 외부 성도님도 계시지만 특별히 적지 않은 액수의 헌금을 하시는 매달 정기적으로 보내시는 성도님이 계십니다. 절기때마다 교회 행사가 있을 때는 따로 보내어 주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헌금에 대해 성경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행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고 있다고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이시기에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하게 보이는 교회를 위해 정기적으로 나눔의 실천을 해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눔이 은혜이고 나눔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나눔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나눔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내 안에 있는 타락한 죄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부에 나타나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믿음도 없고 가진 것도 없기 때문에 나눔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기도 힘들고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돌 볼 여유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전에 잠시 살펴보았지만 본문에는 마케도냐 교회와 고린도 교회 이 두교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 교회가 처한 현실을 보겠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고린도 교회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교회이었습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 성도들 보다 교육을 많이 받아서 말도 더 잘하고 지식도 더 뛰어났습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교회 중에 성령의 은사가 가장 많은 교회였습니다. 항구 도시에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풍부했습니다.

하지만 흉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있어서는 작정만 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입술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물질, 많은 지식,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눔에 인색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혜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게도냐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2절입니다.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은 환난으로 인해 많은 시련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을 보시면 ‘극심한 가난이’ 그냥 보통 가난이 아니라 극심한 가난중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힘을 다해 풍성한 연보(헌금)를 넘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는 것은 마치 북한에 있는 지하 교회의 성도들이 남한의 어려운 농어촌 교회를 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남한에 있는 자고 미약한 농어촌 교회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모아서 보냈다고 한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남한에 있는 큰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일이 약 2천년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의 강요와 명령 때문에 구제 헌금과 선교 헌금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연보를 드려 예루살렘교회를 도왔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섬김과 나눔의 문제, 베풂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의 문제입니다. 은혜가 있고 없고의 차원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주고 싶어도 줄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받을 것이 없을 만큼 그렇게 큰 부자도 없지만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여유가 있어서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물질적인 여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 때문에, 그리고 그 나누는 행위가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때문에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눔과 베푸는 행위는 그것이 곧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 왜 우리는 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알거니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앞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는 무엇입니까? 그다음에 나옵니다.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성도인 우리가 알고 있는 은혜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부요하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아름답고 화려한 궁중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반 세겔인 성전세를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입고 있던 옷마저 다 빼앗기고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모든 피까지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죽음 후에도 장사 지낼 무덤이 없어 남의 무덤에 장사를 지낼 만큼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오셨고 가난한 자로 사셨고 가난한 자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부요하신 예수님이 이토록 가난하게 되셨습니까? 본문 9절 후반부입니다. “9....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b) “너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부요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에는 가난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이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함으로 말미암아 그후에 우리 인간은 가난이라는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게 일하고 땀을 흘려야 살아갈수 있는 물질적인 가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하나님과 멀어지는 영적인 가난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가난은 비참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가난입니다. 가난 때문에 오늘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에 수 많은 아이들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러시아 푸틴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곡물들의 공급이 막혀서 지금 수많은 생명들이 굶어 주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가난은 비참한 것입니다. 가난은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질적인 가난만 생각하는데 가난은 육신적인 가난이 있고 영적인 가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 모든 가난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왜요?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이 있고 영적으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주님과 교제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참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 입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눅2: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벧전 2장 21절입니다. “21.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벧2:21)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위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는 중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입니다. 19.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몸이라‘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누가복음 22장 20절입니다. 20. 이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주님은 또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입니다,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그러니까 예수님은 바로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하늘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 영으로 찾아오셔서 나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나를 위하여 바쳐진 삶인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너희를 위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해가 되는 것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십시오. 100세에 낳은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는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다 “너희를 위하여”서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포기하지 마십시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너희를 축복하기 위하여” “너를 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너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너를 내가 원하는 수준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제자인 믿는 성도들도 같은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존재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 후서 6장 10절입니다.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이러한 성도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인 것을 보여줍니다. 가진 것이 없고 배운것도 없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부요하게 할수 있는 것은 바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의 해답이 되시고 내 삶의 이유가 되시고 나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사실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많은 은혜를 나누는 일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둘째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그리고 14절입니다.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의 넉넉함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균등하게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가난한 자가 있고 부자가 있습니다. 똑같이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넉넉한 자들이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곳에는 언제나 기부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빌 게이츠(Bill Gates)나 강철왕인 카네기도 많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네기가 65세가 되었을 때 “부자인 채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자신의 남은 재산을 모두 사회복지를 위해 헌납 하였던일은 유명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수고하여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입니다. 28.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4:28)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풀고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 벌어서 남 주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는 남에게 주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되 남 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보충해 줄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잘 사는 사람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이러한 세 가지 경제생활의 원칙을 말했습니다.

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②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③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나누어주라

그렇습니다. 믿는 성도인 우리는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처럼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베풀며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신 은혜가 더 풍성해지는 축복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