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잃어버린 자

Author
kgmcc
Date
2022-07-24 01:30
Views
125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날짜 : 2022년 7월 24일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종류의 만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보니까 이렇게 다섯가지 종류의 만남에대해 설명을 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우개와 같은 만남입니다. 만나기는 만났지만 어떤 것도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는 그런 만남입니다. 정말 시간이 아까운 만남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둘째는,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 생선을 만지면 만질수록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이 만남은 가까이 할수록 비린내가 나는 만남입니다. 속아서 만나게 된 잘못된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꽃송이와 같은 만남입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게 되는 꽃과 같은 그런 만남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만남 속에 이런 만남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이라 할수 있습니다.

넷째는,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

건전지와 같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을 때는 잘 사용하다가 힘이 다 했을 때는 던져 버리는 그런 만남입니다. 요즘 황혼 이혼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만남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만남 중에 가장 비참한 만남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다섯째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는 만남을 말합니다. 이런 만남을 가져야 인생이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축복중의 하나는 이 만남의 축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만남의 축복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만남의 축복이 우리 인생에는 중요합니다.

만남이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고 만남이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아무리 명문대학을 나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만나서는 안될 사람을 만나면 평생을 불행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남의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만남의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리고 지역에 사는 세리장인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구원을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변화가 되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2절입니다. “2. 삭개오라 이름하는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여리고 지역에 사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미움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리는 이스라엘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일정금액을 로마 정부에 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를 면허증을 가진 강도로 여겼고 로마정부를 도와주는 매국노로 여겼습니다. 오죽했으면 이 삭개오가 사는 집을 보면서 ‘죄인의 집'이라고 불렀겠습니까? 본문 7절입니다.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저가(예수님이죠)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삭개오집이라 말하지 않고 죄인의 집이라고 동네사람들이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삭개오는 돈이 많은 부자로 살았지만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살아가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외로운 사람이 바로 삭개오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찾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외로움 때문이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 외로움 때문에 두려움과 염려가 생긴다고 심리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럼으로 절기가 있고 행사가 있을때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시간을 나누는 것은 우리가 재 충전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라고 하는 사회적인 명예와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많은 물질을 소유했지만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삭개오는 신체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3절입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그는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러 나아갔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웬만큼의 키가 되어도 뒤꿈치로 발을 들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인데 삭개오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삭개오는 그냥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거의 난쟁이에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신체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치유를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기와 같은 직업을 가진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일에는 두가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3절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두 개의 장애물중 하나는 작은 키 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개의 장애물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려고 하면 사탄이 장애물을 우리들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사단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장애물을 동원합니다. 내가 기도를 할려고 하거나 성경을 볼려고 할때면 웬지 내 몸이 좋지 않거나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게도 합니다. 바쁜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하지 뭐 오늘만 날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뒤로 미루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장애물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본문 4절입니다.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옛날 성경은 돌무화과 나무라고 기록하지 않고 뽕나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뽕나무가 아니라 돌무화과 나무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삭개오는 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장애물이 있었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체면을 버리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작은 키 때문에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삭개오는 주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볼수 없었기 때문에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갔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삭개오가 키가 커서 자기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지나가는 예수님을 볼수가 있었다면 이렇게 개인적인는 만남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오히려 축복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평상시에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이 약점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축복이요 장점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의 약점 때문에 비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변 성도를 보면 자신이 가진 핸디캡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시는 분들을 볼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 남보다 가지지 못했다는 열등감,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열등감, 남보다 키가 작고 남보다 눈이 작다는 열등감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 앞에 자신있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0.1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숫자인 9가 8.9를 보면 늘 자기보다 작다고 무시하고 괴롭혔습니다. 이 숫자 9는 시간이 나기만 하면 8.9를 불러놓고 이런 일 저런일을 시키면서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숫자 9가 8.9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 8.9가 9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소리로 “야 8.9 이리로 오라고 하는 내 목소리가 안들려!. 너 나한테 혼나고 싶어?‘ 그러자 8.9가 9를 보면서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야 숫자 9 나에게 함부로 말하지마. 나 어제 점 뺏다 말이야, 이놈아” 8.9에서 점을 빼니까 하룻밤 사이에 89의 거대한 숫자로 변한 것입니다. 약점을 가진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은 이 약점이 있는 나를 남이 무시하지 못하게 되는 강점으로 바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가진 약함으로 인하여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약함을 숨길 필요도 없고 나의 약함에 대해 원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이 약점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약함이 아니라 ‘약점을 부끄러워하는 나의 생각에 있습니다. 약점이 있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약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래서 숨기고 절망하는 그 생각이 불행한 것입니다.

*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다

5절을 보시면 예수님과 삭개오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돌무화과 나무 밑을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는 나무위에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지금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이 샬롯 지역에 방문했다고 하십시다. 내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나를 보면서 내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든다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래서 6절을 보시면 삭개오가 놀란 가슴을 안고 급히 내려옵니다. 6절입니다.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5절과 6절을 보시면 “속히”라는 말과 “급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5절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그리고 5절과 9절을 보시면 “오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5절에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리고 9절을 보시면 “9.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속히” “급히” “오늘”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예수님을 만나는 일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교제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교제를 하는 일이 우선적이 되어야 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오늘 예수님과 대화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만남으로 누리게 된 축복

그렇다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누리게 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1.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9절입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원래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됨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후손이었지만 이젠 매국노와 죄인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말은 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음으로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자기 집에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심으로서 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 지역에 오시기 전에 이미 삭개오에게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포기하지 않고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주님은 삭개오가 있는 돌무화과 나무가 있는 것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 돌무화과 나무앞에서 멈추시고는 삭개오를 바라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이 과정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과거부터 역사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내가 그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내용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한마디 말씀 때문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씀이 빛이 되어서 삭개오 자신의 어둡고 외로웠던 심령에 쫙 비춘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한마디 말씀을 하시면 그 사람은 한 순간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사람은 한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게 되고 한순간에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자신이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누리게 된 축복은

2.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바로 삭개오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보는 구경꾼은 많은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나에게 변화가 없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을 보면 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이렇게 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자원해서 스스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해서 모은 돈입니까? 사람들로부터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다 받으면서도 참고 견디며 모았던 돈입니다. 눈물이 나도 이를 악물면서 모았던 돈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할때마다 삭개오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돈이 있어야해, 돈만 있으면 저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거야. 난쟁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깔보지 못할거야” 그러면서 이를 악물고 모았던 돈입니다. 이렇게 돈을 모으기 위해서 참고 살아왔던 삭개오가 이제는 자기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속여서 가진 것이 있으면 네갑절이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서 이렇게 가치관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며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나뿐인 사람에서 나왔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나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랍니다. 나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나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나쁜사람에서 좋은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본문 10절입니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생애 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찾아오심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도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것도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가성 우물가를 찾아가셨고 삽십 팔년된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리고 지역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오십니까?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축복을 상실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 못하고 움켜쥐지 말아야 할 것을 움켜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이였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았기에 잃어버린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았기에 가치가 있는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행복도, 만족도, 양심도 이웃도, 건강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놓아야 할 것을 놓을수 있게 되었고 잡아야 할 것을 잡을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움켜쥐고 살았던 손이 주고 베푸는 손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게 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잃어버린 자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렙다 과부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엘리야 선지자를 그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엘리사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나를 그 니느웨 성으로 보내셨습니다. 한 에디오피아 내시를 구원하시고자 빌립 집사를 유다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과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구원하고자 베드로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만남으로서 더 이상 잃어버린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주님이 지니고 계신 관심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부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건강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나의 가족과 이웃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주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일은 주님이 지니고 계신 관심에 나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 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 주변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