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과 동행할때 누리는 축복

Author
kgmcc
Date
2022-07-31 03:15
Views
184
본문 : 히브리서 11장 5절

날짜 : 2022년 7월 31일

 

<히브리서 11장 5절>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제 스마트 폰안에 들어있는 JS 성경에는 말씀을 검색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동행’ 이라는 단어로 검색해보니까 창세기 5장과 그다음장인 창세기 6장의 내용이 나왔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에녹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그리고 창세기 6장에는 노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창세기 6장 9절입니다.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는(노아)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창세기 5장 21절과 22절입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사람으로 에녹과 노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살펴본 내용에서 알수 있듯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속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떠나 산속이나 기도원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에녹을 소개하면서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자녀를 낳으면서 일상적인 삶에 충실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가정에서 충실하고 직장에서 충실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에녹이 언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언제 므두셀라를 낳았습니까? 에녹의 나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65세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는데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이후에 자녀들을 낳으면서 일상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

첫째는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축복

창세기 5장 24절입니다.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그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날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타고 승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에녹을 데려가셨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에녹을 찾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찾을수 없으니까 사고를 당해 어디에선가 죽었을것이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세상은 굉장히 악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옮겨졌다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 전반부입니다.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이렇게 성경은 창세기 5장 24절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라고 말씀하시고 히브리서 11장 5절에는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시고 하나님이 에녹을 옮기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에녹을 어디로 데려가셨습니까? 골로새서 1장 13절입니다. ‘13.그가(하나님)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지금 이 성경구절은 믿는 성도의 죽음이후에 성도가 가는 곳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에녹을 옮기신 곳을 알수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사랑의 아들의 나라‘ 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아들의 나라‘ 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영광스런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영광스런 천국으로 하나님이 에녹을 옮기신 것입니다. 어디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씀합니까?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래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수많은 죄악으로 가득차있습니다. 요즘 러시아 지도자 푸틴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이세상이 얼마나 수많은 죄악으로 가득차있는가 알수 있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나라 사람들까지 그렇게 무고한 생명들을 수없이 죽이면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푸틴과 그의 추종자들을 보면 이세상이 얼마나 사악한지 쉽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악한 세상은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살인과 폭력과 죽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는 성도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데려가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옮기실 때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누가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서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까?

착하게 사는 사람입니까? 양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골로새서 1장 14절입니다.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아들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사함을 받은 사람 다시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왜 죄사함을 얻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이 진 죄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어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그나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에녹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질수 있습니까? 에녹과 같은 경우는 이젠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이 죽는 것을 하나님이 정해놓으셔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정해놓으신 법을 스스로 깨트리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경우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특별하게 계시해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간 이유는 두가지인데 첫째는 죽음 저편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할수 있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에녹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가는 곳은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이사가듯이 옮겨가는 것이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게 되면 자기 재능만을 믿고 교만하게 살다가 외로움과 공포속에서 눈을 감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시도 잘 썼지만 얼굴이 잘생긴 미남이었습니다. 미남이고 글도 잘 썼기 때문에 이사람 주변에는 항상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향략과 사치속에서 인생을 엔조이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세상을 떠나기 얼마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은 말라빠진 낙엽 한 장과 같구나. 나는 한 마리 벌레처럼 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슬픔과 고독뿐이다’

프랑스의 양심이자 계몽 사상가이었던 볼테르는 하나님은 없다라고 주장했던 무신론자입니다. 볼테르는 앞으로 백년만 지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성경은 이세상에서 사라질것이라고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하루는 그가 파리의 수많은 시민들앞에서 이렇게 연설한 적도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이렇게 욕을 하고 빈정대는 나를 한번 이 자리에서 쓰러트러 보십시오’

그랬던 그가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죽어갈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속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스데반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돌에 맞았으니까 얼굴과 온몸에 피가 나고 고통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그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하늘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보좌에 서계신 주님을 스데반은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예수여 내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위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돌은 던지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중보의 기도를 드리면서 평온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누가 인생의 승리자입니까? 누가 인생의 행복자입니까?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순간에 하늘의 문이 열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순간에 평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리고 인기가 있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공포와 두려움속에서 눈을 감는다면 그사람을 인생의 승리자라고 말을 할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기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이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진 것은 또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들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살고 있었던 성도들은 죽음을 맛보지않고 들림을 받을수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의 댓가로 죽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임으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주님이 다시오시는 그날에 이땅에 살면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성도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들림을 받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7절입니다.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후에’ 는 어떤 사건후에 라는 의미입니까?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주님을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먼저 부활을 한 후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예수를 믿고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무덤이 열리면서 썩지않는 신령한 몸과 영이 합쳐지면서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안에서 죽은자들의 부활이 끝나고 난이후에 이땅에 살고 있던 성도들의 몸이 변하게 되면서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왜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가신바 되었는가 하면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너머에 또다른 세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에 있고. 두번째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이땅의 성도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들림을 받을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땅에 살아가고 있다면 에녹처럼 우리도 들림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에녹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본보기로 에녹의 사건을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누리는 축복

둘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가 됨.

히브리서 11장 5절 후반부입니다. ‘5. ...그는(에녹)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기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에녹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지혜롭다든지 기술이 있다든지 용기가 있다든지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평범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삶 밖에는 내세울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큰 일을 남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위대한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도 하나님에게는 너무 하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업적보다도 훨씬 더 크고 위대한일도 단 1초만에 말씀으로 이루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은 내가 어떤 위대한 일을 하는 것 보다도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에게 재능이 없고,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학벌이 없고 물질이 없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은 바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 나도 미워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 내가 좋아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부자가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행하는 삶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생각 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 히브리서 11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이 있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할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정치가로서 이탈리아 대사를 역임했던 클레오 루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사람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그어느 누구나 그 인생이 이땅을 마치는날 한 문장으로 요약될수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땅을 마치는날 한 문장으로 요약될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인생은 어떻게 한문장으로 요약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 라고 요약할수 있습니다. 에녹이 우리처럼 이땅에서 죽음을 맛보고 이땅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의 묘비에는 분명히 이렇게 쓰여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사람이 이곳에 잠들다’ 우리가 이땅을 떠나던날 하나님은 어떻게 한문장으로 요약을 하실 것 같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한문장으로 요약 될것 같습니까? ‘그는 술 주정뱅이었다’ ‘그는 난봉꾼이었다’ ‘그는 쌀만 축내고 세상을 떠났다’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았다’ 라는 한문장으로 요약되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

세번째는 그의 후손들이 복을 받음

에녹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첫 아들은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몇 살을 살았습니까? 969세를 살았습니다. 이땅위에 태어난 인간중에서 최고로 오래 장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수의 축복을 받았기도 했지만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이 있는 이름입니다. ‘므두셀라’ 의 의미는 ‘그가 죽을때에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가 죽은 그해에 홍수의 심판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므두셀라가 최장수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통로나 수단으로 오랫동안 쓰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한사람이라도 구원하실려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에녹의 첫아들 므두셀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녹의 후손인 노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노아는 온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창 6장 8절입니다.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리고 6장 9절입니다.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이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을 사니까 그의 후손인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의 자손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동네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가끔 그 집앞에 쓰다 버린 가구들을 볼때가 있습니다. 의자나 소파도 있고 침대도 있고 식탁 테이블도 버린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 가구들은 이전까지 주인들의 사랑을 받고 사용을 받았던 가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니까 주인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구와 같은 물건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사람도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고 하는 것이 이세상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버림받은 가구들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로 부터 버림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는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까? 그이유는 우리와 친밀하게 교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평안한 것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목적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에녹처럼 그리고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