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령의 도우심과 결과(2)

Author
kgmcc
Date
2020-03-15 16:48
Views
634
본문 : 빌 2장 12-14절

날짜 : 2020년 3월 8일

 

<212-14>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지난 주에는 믿는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주에도 계속해서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지금 나 없을때에도’ 바울이 이 빌립보 서신을 썼을 때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한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수는 없을지라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런데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는 이 표현 때문에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내 열심과 내 선행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열심과 행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입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입니다. 그럼으로 전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양심적이고 인격이 고상하고 무슨 선한일을 더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이었고 경건치 아니하고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아무 조건이 없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내가 정말 죄인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는 또 무엇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이 구원을 간직하고만 있지 말고 그 구원이 내 삶가운데서 나타내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이 새새명을 우리 몸밖으로 꺼집어 내어서 남들이 볼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요. 구원이 눈에 보입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 눈에 안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 우리안에 주어졌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자의 삶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죄사함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보이지 않는 보배들이 많이 주어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5장 5절에 나옵니다. ’5....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안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안에 찾아오실때에 성령님만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하나님의 사랑도 함께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이 부어주신 것은 사랑이 괄괄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을때에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괄괄 넘치도록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성품과 은사들도 우리안에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의미는 거룩한 삶, 용서하는 삶, 손해보는 삶,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 베풀며 나누어주는 삶,..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안에 부은바된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라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주어진 영적인 보배들을 나타내 보임으로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가운데 드러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아 저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이구나 저사람속에는 예수가 살아계시는 구나’ 하는 것을 세상 사람가운데 확실하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안에 있는 수많은 탐욕과 욕심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내 이기적인 욕심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받은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를 세상가운데 흘러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그렇게 흘러보낼 때 풍성하신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또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기만 하고 그 은혜를 흘러 보내지 못한다면 날마다 채우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기를 원한다면 받은 은혜를 흘러보내야 합니다. 흘러보내면 흘러보내는 만큼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안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사들을 우리가 이세상 가운데 나타내 보일수 있는 것입니까? 본문의 표현으로 한다면 구원을 이루어갈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항상 복종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게 되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갈수 있도록, 우리안에 있는 이 영적인 보배들을 이세상 가운데로 흘러보낼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계신 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13절입니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 하나님은 성령님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실 때 비로소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빛이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실 때 우리는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복종함으로서 구원을 이루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왜 보혜사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안에 거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8장 26절 전반부 입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너무나 잘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심하고 다짐을 해도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존재인가를 성령님은 너무나 잘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수 있습니까? 먼저 첫 번째는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도움을 받을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는 그 성령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실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고 행하십니까?

1. 내안에서 행하심.

13절 전반부입니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안에서 행하시지 우리 밖에서 행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입니다. 29.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는 바로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요.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밖에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이후에는 성령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우리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 전서 12장 7절에서는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7. 각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나타내심을 말하면서 그뒤를 보시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은사장이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내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안에 거하신 성령님안에 모든 은사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은사와 능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거하신 성령님안에 모든 은사와 모든 능력이 이미 와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자신의 필요하심에 따라서 우리에게 은사로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내가 기도해서 따내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은사를 자연스럽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사를 말할 때 성령의 나타남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하늘의 별을 따듯이 그렇게 은사를 따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은사를 받은 사람들중에 교만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바람 소리같은 이상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내어서 은사를 따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은사를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심리학자이신 유진 피터슨이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이라도 하실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우리 환경들을 바꾸시고 우리 밖에서 우리를 억압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의 변화된 생각과 마음의 소원을 통해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이 유진 피터슨 학자의 말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먼저 행하시는분 이십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우리의 삶과 환경가운데 역사하시지 않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사건과 상황 가운데 개입하십니다. 그러나 사건과 상황에 개입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생각을 변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과 상황에서 우리를 통해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씩 이렇게 기도할때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가 이런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이 상황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십시오. 이 상황을 좋은 환경으로 변화시켜주시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면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내안에서 일을 하시고 변화된 나를 통해 그 사건과 상황이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믿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생각을 통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안에서 일하시면 드디어 우리의 삶과 환경가운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도우시고 행하십니까?

2. 소원을 두고 행하심.

13절입니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이루시고자 할 때 어떤 일을 맡기시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그 마음의 소원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마음의 소원을 열망하게 하시고 그 마음의 소원을 따라 행하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심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일을 이루실 때 우리를 강제로 떠미시는 분은 아닙니다. 먼저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소원을 따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얼마나 인격적이신 분이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우리의 야망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내마음에 있는 소원이 성령님께서 주신 소원인지 아니면 내마음의 소원인지 어떻게 알수 있을 까요? 그것이 알고 싶다 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은 꺼지지않는 불과 같습니다. 우리안에 거하신 성령님은 내안에 영원토록 계시는 분이십니다. 나왔다가 들어갔다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기분이 좋으면 그냥 있고 기분이 상하면 나가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하나님을 만날때까지 항상 내속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주시는 소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역경이나 고난이 와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곳은 호렙산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본 떨기나무는 일종의 아카시아 종류에 속하는 가시나무로 사막의 거주자나 여행자들이 흔히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있는 것도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불이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떨기나무가 타지도 않고 계속 불이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붙어있듯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은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역경을 만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두달 정도 확 타오르다가 어느순간에 꺼져버리고 다시 타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야망이지 성령님께서 주시는 소원은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뜨거워 지는것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피가 솟구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생각하면 미래의 청사진이 그림처럼 확 펼쳐지는 것입니다. 내안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은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13절 하반부입니다. 13. ...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유는 바로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우리마음에 소원을 주시면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내안에 있는 이 소원이 하나님이 주신 소원인지 내 소원인지를 알려면 아주 간단합니다. 내 이소원이 나를 영화롭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소원인지. 아니면 내가 좀 힘들더라도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성공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시지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성공을 위해 일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필요할때마다 꺼집어 내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행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하고 무조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그일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먼저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일을 할 때 우리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은 없고 내 바램과 내소원만 가득하면 우리의 인생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내 소원대로 안되면 원망과 시기 질투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 없고 내마음의 소원만 충만하면 인생은 비참해지게 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나는 순종하며 살리라 라고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나는 불평하지 않고 나는 감사하며 살리라 라고 하는 이런 마음의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어릴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통해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이후에 지도자가 될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주신 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갔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런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마음의 소원을 따라 마침내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을 품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볼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살았던 요셉을 보십시오. 얼마든지 형들을 원망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할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소원을 품고 그 마음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원망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 그자체가 원망과 불평은 넘어설 만큼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불평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오히려 힘들면 힘들수록 극복해나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안에서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행하십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그것만 생각하면 흥분이 되고 그것만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게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듯이 살아가다 보면 UP & DOWN 이 있습니다. 잘될때가 있고 곤두박질 칠때가 있습니다. 요셉이 종의 신분으로 애굽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충성되이 일을 하다가 보니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좀 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보디발 장군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옛날보다 더 비참한 신분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업 앱 다운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소원이 있어야 그 불은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기 때무에 귀하게 여기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원망과 시비가 없이 생활해나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그 어떠한 상황속에서라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