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 14장 8-14절>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 제자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됩니다. 본문 8절입니다.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니까 빌립의 요청은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해 주십시요’ 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는 이 표현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우리가 지금 만족할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말씀들을 하셨던 것입니까? 1절 후반부를 보시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그리고 2절 전반부에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2) 계속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2) 마지막으로 3절을 보시면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 이러한 말씀들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 빌립이 "예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만 가지고는 저희들이 믿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한번 보여 주시옵소서’ 라고 빌립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빌립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9절입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지금 예수님은 빌립을 꾸짖고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처럼 ‘오라’ 라고 하는 주님이 말씀에 의지하여 갈릴리 호수에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빌립 집사처럼 성령의 말씀에 의지하여 유대 광야로 나가는 것입니다.
□ 세상의 사람들 : 하나님을 보여 주소서
그런데 제자 빌립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말씀을 듣고 믿기 보다는 보기를 더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것 보다는 체험을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 보다는 눈으로 기적을 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증명해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무신론자이었던 영국의 철학자였던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만일에 내가 죽고 난 이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왜 너는 살아생전에 나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할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굉장히 맞는 말같고 고상한 면도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철학자 러셀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간이 날때마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기 보다는 스포츠 경기나 드라마 그리고 인플레이션이나 금리 인상 소식같은 일상 생활과 관련된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라도 한다면 ’하나님을 내게 보여주십시오‘ "Show me God!“ 이렇게 대꾸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스코틀랜드의 출신인 데이빗 로벗슨(David Robertson) 목사님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들은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려고 한다. 그들은 증거가 없어서 불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찾을려고 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심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육신의 눈으로는 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의 눈은 물질적인 형체만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체가 없으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볼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영이신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창세기 21장 22절입니다. 22.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아브라함) 계시도다‘ 그리고 창세기 39장 3절입니다.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요셉) 하심을 보며‘ 여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방인 들이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고 요셉과 함께 계심을 보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이렇게 육신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약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영이신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과 모습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가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가?
그러면 누가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10절 전반부입니다.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11절 전반부입니다.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지금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심을 믿으라’ 라는 것은 그만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특별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바로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주님과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는 일에 열심을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가운데 사는 자가 이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야고보서 4장 8절 전반부입니다.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까? ‘그리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이라는 뜻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적인 관계도 서로 가까이 있어야 친밀해집니다. 가까이 있기 위해서는 서로간에 쉼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내어야 하고 자신의 물질도 사용할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해를 해야 하고 섬기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상대방과 가까이 지낼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 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살아갈수 있습니까?
첫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8절입니다. 18.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간구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기도란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가 왜 영적인 호흡입니까? 우리가 호흡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질식을 당하여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 집 뒤에 있는 가든 에는 오이와 열무 그리고 당근 과 비트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이나 열무에는 진딧물과 같은 병충해가 잘 생깁니다. 그래서 병충해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의 인체에 해롭지 않은 천연 살충제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천연 살충제 중에서 제가 식용유나 님(Neam) 오일 같은 오일 성분이 든 것을 사용할때가 있습니다. 진딧물이나 송충이 같은 해충들이 오일로 인해 호흡기관을 막혀버리기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해서 죽게 됩니다. 벌레이든 사람이든 호흡을 하지 못하면 죽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를 하지 못하면 영적인 호흡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영적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날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합니까?
본문 13절입니다.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너희가 내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4입니다.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내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직접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그러니까 기도를 하라는 말씀 이전에 믿음을 먼저 말씀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우리나라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이루어지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을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열심을 다해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붙잡고 그 나무가 뽑혀질때까지 흔들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응답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응답이 되지 않을때는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우리의 정성이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이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앞에 나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이제 막 교회에 온 젊은 청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구원이 기독교에게만 있습니까? 세상을 보면 다른 종교를 가지고도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도 구원받기를 사모하면서 자신이 속한 교리에 순종하여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갈텐데 그래도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진리가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갈수가 있다고 답변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젊은 청년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듣지도 배우지도 못하면서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텐데,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가르침은 너무 이기적이고 편협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이제 막 신앙 생활을 할려고 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그 사람들이 처한 환경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서 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확신있게 말할수 없겠다.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갈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방법이 구원받는 가장 확실한 길인데 왜 구태여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을까에 대해 내가 갈등을 하고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제가 한 이말에 그 청년은 수긍을 했는지 그이후 교회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청구자가 예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청구자가 예수님이신데 어떻게 청구자의 뜻에 맞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청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마음과 뜻에 맞게 기도를 할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지니신 뜻과 생각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후반부입니다. 13....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는’ 여기서 이는 그 앞에 나오는 내용을 받아서 하는 말이죠. 그앞에 어떤 내용이 있습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할것인데’ ‘이는’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왜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최종 목적은 응답을 받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최종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응답을 하실떼 그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며 살아갈수 있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여 나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을 쉽게 하지만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따르는 것은 속박이고 웬지 구속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계명이 속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도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을 부담이 아닌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시편 40편 8절입니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내 심중에 있나이다"(시40:8)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반드시 표현되고 증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타나게 되고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시기 몇시간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입니다. ‘11.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몇시간 앞두고서도 그분의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도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후반부입니다. 21.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타낸다'는 말은 ‘보여주다, 알게하다‘ 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역사하시고 친히 행하시는 것을 나와 내 주변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지금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출세와 성공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고, 주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고,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전에 나와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부활의 영광을 보이신 주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내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일을 주변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실 것 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날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주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아브라함이나 요셉처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모습을 주변사람들이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남은 평생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