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부르심과 약속

Author
kgmcc
Date
2022-10-16 02:14
Views
91
본문 : 창세기 12장 1-5절

날짜 : 2022년 10월 16일

 

<창세기 12장 1-5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공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정말 가치가 없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격을 매긴다면 누구나 가질수 없을만큼 너무나 비싼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누어 줄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공기와 물 그리고 햇빛과 같이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이러한 것들이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값으로 따질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들이지만 공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는 공짜가 없습니다. 공짜가 아닌데 공짜로 얻을려고 하다보니 사기를 당하고 속게 되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이발소 출입문에 ‘내일은 공짜로 이발을 해 드립니다’ 라는 내용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본 사람이 공짜 이발을 하기 위해 그다음날 찾아가서 이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발을 하고 나니까 이발을 한 비용 만원을 내라고 이발사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사람이 ‘오늘은 공짜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왜 돈을 받습니까?’ 라고 항의를 하니까 이발사가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손님, 내일은 공짜입니다 라고 써놓았지 오늘은 공짜’ 라고 쓰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사람이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럼 언제 오면 공짜가 됩니까?” 그러자 이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입니다. 오늘은 항상 돈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공짜 이발은 없다는 뜻 이지요. 이렇게 공짜를 좋아하다보면 사기를 당하거나 속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받게 된 이 구원도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가 죄 값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져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해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수 있게 된 것은 공짜가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귀한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 우리의 순종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부르심의 순종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우리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와 그리고 그 부르심의 은혜에 어떻게 하면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 부르심의 은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역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오늘 본문에 나온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하란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4절 후반부입니다. ‘4.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때에 칠십 오세였더라’ 그러니까 본문 1절에 기록된 말씀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이 다시한번 부르신 것으로 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전에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와 동일한 말씀을 주셨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브라함이 어떻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600마일(950km)이나 되는 하란까지 갈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아 살아가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르심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그를 불러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였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만 부르심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도 부르심을 받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르심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 후반부입니다. 15.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이렇게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인 것 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도 역시 부르심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살아가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하시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만이 부르심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베드로와 그리고 사도 바울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도 부르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약속해주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때마다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본문 2절입니다.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세가지 약속을 해주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입니다.

그때까지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자녀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민족을, 한 국가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야곱 때에 후손이 12명으로 불어납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나안땅에서 애굽으로 이주할 때에는 70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00년 후 출애굽할 때에는 장정만 60만 명으로 아이들과 여자를 합하면 약 200만 명에 이르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이 말씀을 영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까? 우상을 만들어 팔고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던 아브라함이 이런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의 약속은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입니다.

“2.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라는 말씀은 이름을 크게 떨치는 탁월한 존재가 되게 해 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얻을 수 없는 복된 이름들을 얻었습니다. 약 2장 23절입니다.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그는(아브라함)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 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7장 4절입니다. 4.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지금도 아브라함은 중동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조상으로 불리워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게 된 아브라함입니다.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라고 하는 영광스런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복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신 약속은 복의 통로가 되는 내용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이 약속은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아, 이제부터 너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축복의 통로로 세웠기 때문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을 하겠다 라고 하나님이 약속해주십니다. 본문 3절입니다.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온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았지만 아들 이삭도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 26장을 보면 이삭이 극심한 가뭄 때문에 블레셋 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복을 주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지역에 살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덮어버리면서 자기들의 영역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할수없이 그랄로 옮기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차고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지 않는데 이삭이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삭이 이렇게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삭을 괴롭히던 자들이 이삭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26장 28절 전반부입니다. 28.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이삭을 괴롭히지 않고 평화를 위한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뿐만 아니라 요셉도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이 가는 곳마다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됩니다.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감방에 갇힌 죄수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에는 그로 인하여 애굽이라는 한 나라가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복을 누리고 살아가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너는 복이 될지라” 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시고 이 세 가지 놀라운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 순종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영광스럽고 위대한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순종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까? 몰라서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은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합니까? 순종에는 반드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순종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있고 실제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으라고 하는 방주의 크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길이가 135m 폭이 23m 높이가 14m(5층)나 되고 무게가 대략 15,000톤이 되는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빌딩 5층 높이와 미식 축구장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규모가 되는 어마어마한 사이즈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오늘날처럼 건축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동원된 것도 아닙니다. 기계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노아와 그 가족들의 육신의 힘에 의지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완성하기 까지는 몇 달이나 몇 년이 아니라 12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 기나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갈 짐승들이 먹을 양식까지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하고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려고 할 때 제일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주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완전히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왕따라는 단어의 성경적인 의미는 왕을 따르는 사람의 준말이라고 설명하시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노아는 왕이신 하나님을 따르다가 보니 사람들의 눈에 왕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려고 하다보면 주변사람들이 일부러 드러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은근히 비웃고 조소하는 일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세가지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좀전에 살펴보았지만 그 세가지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너는 복이 될지라” 입니다. 이 세 가지 약속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대가를 치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 약속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대가는 무엇입니까? 본문 1절입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복의 근원이 될려면 먼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그당시에는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는 그당시에 문명이 발달된 도시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향만이 아니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은 과거라는 의미가 있는 대명사입니다. 과거와 추억이 담겨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과거가 생각이 나고 추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추억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려면 먼저 과거와 추억에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벗어나고 분리가 되어야 합니다.

중세기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처음 3일은 분리의 역사이고 나중의 3일은 장식의 역사이다” 처음 3일을 보면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서로 분리 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중 3일은 채우시고 장식하십니다. 땅에는 짐승들과 채소로 채우시고 하늘에는 새들로 채우십니다. 그리고 바다에는 물고기들로 채우십니다. 무엇이 먼저였습니까? 분리가 먼저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이 창조의 원리는 지금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에 살고 있던 우리를 세상과 분리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살았던 고향과 친척,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로부터 떠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추억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좋던 나쁘던 이전과는 분리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분리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채우시고 장식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또 다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라는 단어를 통해 아브라함은 그동안 기나긴 여행길을 걸어왔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하란과 가나안땅까지는 약 400마일(650킬로미터)입니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약 600마일(950킬로미터) 입니다. 그러니까 일천 마일이 넘는 거리를 여행 하였던 것입니다. 일천마일이면 약 1600킬로미터입니다. 서울과 부산까지 거리가 약 325킬로미터이니까 서울과 부산까지의 5배가 되는 거리입니다. 그냥 여행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하루하루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길을 아브라함은 식구들을 데리고 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순종에는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순종하지 않는 것보다도 더 행복하고 축복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순종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더 축복입니까?

첫째로 나의 순종은 주님이 행하신 순종에 비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셔야만 하는 대가를 지불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내가 받아야 할 지옥의 형벌과 고통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어떤 큰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순종하는 것이 왜 그렇지 않는 것 보다 더 축복입니까? 그것은 내가 지불한 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복을 받아 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면 내가 지불한 대가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더 큰 복을 받기 위해서 작은 복을 내 던지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삶을 살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한 큰 축복을 예비해놓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소망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순종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도다 더 축복인 이유는

불순종할때 치루어야 할 대가가 순종함으로 치루어야 할 대가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종에는 반드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순종에서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의 대가는 순종의 대가보다 훨씬 더 큽니다. 훨씬더 비참하고 비극적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었던 아담을 보십시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간을 보십시오. 아간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가나안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들과 함께 인생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 인생 말년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으로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불순종함으로 치루어야 할 대가가 순종함으로 치루어야 할 대가와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훨씬 더 비참하고 비극적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 우리는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고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순종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순종의 대가는 너무나 많은 은혜와 축복이 약속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는 순종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지금까지 이세상에서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과 같이 나의 과거가 있고 나의 추억이 있는 삶에서 벗어날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힘들고 어려운 기나긴 여정의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의 이 순종보다는 훨씬 더 크신 순종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순종의 대가보다 훨씬더 큰 축복을 약속해주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가 치루어야 할 대가가 순종할 때 치루어야 할 대가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더 비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순종함으로 주어진 약속의 축복을 누릴수가 있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아브라함이 누렸던 그 은혜와 축복을 누릴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