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작하며 지켜라
<창세기 2장 15절>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십니다. 창세기 1장 27절입니다.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짐승들은 사람과는 달리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셨지만 사람만은 자신의 생기를 불어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자 사람이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으로 영적인 존재인 사람만이 영이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십니다. 창세기 2장 8절입니다.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거기에 두십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2장 15절에 나옵니다. 15절입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것을(에덴동산이죠) 에덴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경작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짓는 것’ 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각종 과일나무의 열매만 먹고 살아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고 짐승들을 돌보면서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계획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에덴동산에서의 낙원생활이라고 하면 일할 필요도 없고 빈둥빈둥 놀고 먹고 사는 세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불순종의 범죄를 하고 타락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작하며 지키는 일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에덴동산보다도 사람이 경작하며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에덴동산이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다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셨겠습니까? 어떠한 벌을 주셨다 할지라도 그들이 에덴 동산에는 거주할수 있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경작하며 지키는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경작하며 지키는 일을 할 때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 될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경작하며 지키는 일을 하며 살아갈 때 바로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순서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일은 바로 지금 저와 여러분이 있는 이 곳을 경작하며 지키는 일입니다. 그일이 바로 에덴을 회복하는 일이고 에덴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될수 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어떻게 경작을 하는 것이, 어떻게 일을 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까?
첫째, 주어진 일을 신성하게 여김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노동을 하는 것을 천하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 다닐때만해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문과에 들어갔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이과에 들어갔습니다. 문과 출신들은 대학교에 들어갈 때 법과나 경제 경영학과로 진출했으며 이과 출신들은 주로 공대에 진출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이 몸을 사용하는 직업이 머리를 사용하는 직업보다도 더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기독교 국가이었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을 하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부터 그들에게 땅을 경작하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일을 하는 것은 형벌이 아닙니다. 노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계획 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지금도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것은 존중하면서도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은 타락한 죄로 인하여 주어진 형벌이 아닙니다. 땀을 흘려 일하는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노동이 죄의 결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죄를 지으셨기 때문에 일을 하셨던 것이 되어집니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으셨기 때문에 이땅에 계시는 동안 일을 하셔야만 했습니까? 요한복음 5장 17절입니다.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렇게 죄가 없으신 하나님과 예수님도 일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이방 선교사역을 해나갔습니다. 그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이제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은 끝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단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 후반부입니다. 10.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내가 하는 그 일이 죄를 조장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어떤 직업도 귀천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 즉 다시말해 편하고 힘든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노동은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이 계획하신 신성한 것입니다.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이 곳을 경작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나의 이 육신의 건강이 회복하는 날까지 내게 주어진 터전을 열심히 경작함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경작을 하는 것이, 어떻게 일을 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까?
둘째, 즐거움으로 일하는 것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 땅을 경작하게 하셨을 때 불평과 원망과 온갖 짜증을 내면서 땅을 파고 씨를 심고 나무를 심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경작하는 그 일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땅을 경작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 자체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봄철이 되면 저는 저희집 뒷마당에는 여러 가지 채소를 심습니다. 그래서 5월 초부터 겨울 서리가 내릴때까지는 거의 매일 아침마다 제가 뒷마당에 나가서 물을 주기도 하고 잡초를 뽑는 일을 해옵니다. 그런데 제가 뒷마당에 나가서 채소를 관리하는 일을 할때마다 제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일을 하면서 원망과 짜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람과 기쁨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그일이 나의 생존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뒷마당에 나가 채소를 가꾸지만 그일을 하고 내가 수익을 얻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확이 작년보다 못하다 할지라도 내가 조금 덜 먹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덜 나누어주면 됩니다. 수확이 적다고 해서 집안 경제가 망해서 굶어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노동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자 노동의 목적이 생존의 수단으로 바뀌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7절 후반부입니다. 17.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리고 창세기 3장 19절 전반부입니다.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것을 먹으리니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이렇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노동의 목적이 생존의 수단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이후 우리 인간에게는 노동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도 이 저주대로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현실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우리 인간은 평생 수고하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아갈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건강이 허락하고 그리고 법적으로 은퇴하기 까지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타락한 우리 인간의 심성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전도서 3장 22절 전반부입니다. 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사람이 자기일에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것이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은 평생을 수고하고 얼굴에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먹고 생존하게 되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만 일을 하게 되면 그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고 고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일을 할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게다가 그일로 인해 먹고 살아갈수 있는 소득까지 생긴다면 덤으로 좋은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갈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은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 에덴 동산을 회복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하는 순서를 바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노동을 한다 라기 보다는 무너져 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을 하고 노동을 한다고 순서를 바꾸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 내가 경작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일을 행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먹고 살아갈수 있는 소득도 덤으로 따라오니 더욱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경작을 하는 것이, 어떻게 일을 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것.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아담을 그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거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경작하라! 입니다. 15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땅을 파고 갈아 그 땅에 씨를 뿌리고 채소와 나무를 심고 그래서 소출을 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농사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창세기 2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러니까 이때는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시기 이전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이후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로 하여금 땅을 갈고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얻게 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당시는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서의 사명으로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있어서 경작하는 일은 사명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의미 있고 거룩한 일이 되려면 그 일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만 행한다고 해서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일을 행하는 목적, 노동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입니다.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왜 우리가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물론 먹고 살기 위하여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아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이땅에 태어났습니까?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을 하고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나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목적을 뛰어넘어 더욱 궁극적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두가지 개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두가지 개념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으로 나누어 볼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 라는 표현도 있고, 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입니다.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 믿는 성도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높이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할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첫째로 무엇보다도 물론 예배라 할수 있습니다. 시편 29편 2절입니다. 2.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우리 믿는 성도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성도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의 선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실 요즘같이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세상에서 선하고 착한 행실로 살아갈려면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내 시간과 몸과 내가 가진 물질이 손해보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믿고 감사할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하고 착한 행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 자체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 인생중의 만나는 고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수 있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잘아시는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오라비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입니다.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죽을 병이 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몇 주전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보게 되는 내용을 가지고 은혜를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입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사람이 보지못하는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의 죄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제가 젊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읽고서는 당시 제 마음에 거북스러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비참하게 하셔도 되시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보이시기 위해 이렇게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하실수 있는가?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당시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제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맹인은 보지 못하는 까닭에 오랜 시간 동안을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맹인은 그동안 주님을 위해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맹인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해서 여기 저기 부딪혀 다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되었습니다. 남이 던져주는 동전 한닢에 감사하다고 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행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복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사는 것, 내가 힘들어 하는 것, 내가 아파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계산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치유되고 회복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맹인처럼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힘들고 어려운 삶도 하나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갈수가 있다면 큰 축복이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설사 이땅에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저 하늘나라에서라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넉넉하고 풍성한 환경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불행한일인지 축복인지는 알수 없지만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면 복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천국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처한 이 상황이 원망과 불평의 기회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십시오. 스데반 집사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최조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던진 돌맹이를 맞으며 죽어갔지만 하나님은 이 스데반 집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이후에 야고보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 도 순교자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결코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입니다.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무슨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환경이나 제도나 조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나와 내 주변환경이 변화가 됩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 되고 사회 복지 정책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회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 나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땅에 계시는 동안 낮고 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안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입니다.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세리가 죄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온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왜 세리와 죄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세리와 죄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하여 주님앞에 나왔습니다. 왜요? 마음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마음이 변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기뻐하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인 아들을 보며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아서 기뻐하는 한 여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기뻐하면서 선한 목자와 아버지와 그리고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립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있던 세리와 죄인들이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이 길을 잃어 버린 양이고 집을 나간 탕자이었으며 그리고 잃어버린 존재인 드라크마 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여인처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더욱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이렇게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남은 생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그래서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