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알고 확신하라

Author
kgmcc
Date
2022-11-06 01:51
Views
27
본문 : 디모데 후서 1장 12절

날짜 : 2022년 11월 6일

 

<디모데 후서 1장 12절>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부끄럽다 라고 하는 감정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라도 가졌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기 전에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끄러움 자체를 몰랐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입니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말라고 명령을 한 선악과를 먹은 후에 생겨난 것이 바로 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자신의 상태가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의 중요한 부분을 가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일어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일이 잘못되어서 볼 면목이 없거나 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을때 자연히 느끼게 되는 마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끄럽다 라고 하는 이러한 감정으로 인해 우리 인간사회가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사회학자들은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부끄러움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 할수 있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바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거리에서 내가 옷을 다 벗고 다니는 모습은 내가 상상만 해도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짐승은 자신이 벌거벗고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주인이 반려견에게 옷을 입히고 산책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만일 주인이 그 강아지에게 옷을 벗겨주면 그 강아지는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아할 것입니다. 주인이 옷을 입혀주고 좋아하니까 강아지가 불편해도 참는 것이지 부끄러워서 옷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마크 트레인은 ‘인간만이 얼굴이 붉어지는 동물’ 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부끄러운 일을 하고 나면 대개의 경우 얼굴이 붉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을 범하고도 도무지 부끄러워할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철면피’라고 부릅니다. 쇠 철 얼굴 면 가죽 피 인데 그 의미를 풀어보면 ‘쇠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얼굴 가죽을 가진 인간’ 이라는 의미입니다. 군인이 있는 전쟁터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민간 도심지를 향하여 폭격을 명령하는 러시아 푸틴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 그리고 계속 미사일을 동해상에 쏘아대는 북한의 김정은 이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또한 사람을 21명이나 죽인 우리나라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과 같은 인간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유영철이가 잡힌 이후에 자신의 국선변호인으로 어느 한 여성 변호사를 선임해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왜 그 변호사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유영철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이전에 구기동 지역에서 살인을 했을때 원래는 그 변호사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갈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그 집에 인부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다른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변호사가 피해자가 될 뻔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살게 되었으니까 나를 더 잘 변호해줄수 있을 것 같아 그사람이 나를 변호해주기를 요청한다 .이렇게 뻔뻔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21명이나 죽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부끄러운 감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당당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집안이 가난하고 자신이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빈둥빈둥 놀면서 지내다가 가난하게 살게 되었으면 어쩔수 없겠지만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해서 많이 배우지 못한 것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이 이러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2절 전반부입니다.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여기서 ‘이로 말미암아’ 는 앞절을 보시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말미암아 정말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고난이라고 하는 단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적당하게 힘들고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한 고난 입니다. 오늘 본문은 디모데 후서입니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기록한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동안 바울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고 그리고 곧 죽음에 이를수도 있는 심한 고난 중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이 당당하게 행동을 할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면 심한 고난을 중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할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고난중에 있다할지라도 부끄러움이 없이 그 고난을 이겨낼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누가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고난을 이겨낼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을 아는자입니다.

12절 전반부입니다.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바울은 지금 내가 고난을 받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원어로 보시면 미완료형태로 사용되어졌는데 이 미완료 형태는 영어의 현재완료형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시면 “because I know whom I have believed” 그러니까 ‘I have believed’ 입니다. ‘have + pp’ 는 현재완료형이죠.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내가 믿어오고 있는 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님을 믿어 오고 있었던 이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다고 하는 말은 단순한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세상에는 체험을 통해서만 알수 있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를 출산하는 해산의 고통은 자녀를 낳아본 어머니만이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자기 친구들을 통해 아무리 많은 말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 해산의 고통을 알수 없는 것입니다. 약 1년전에 결혼을 한 제 둘째딸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을 하게 되니까 예전보다도 더 자주 엄마에게 전화를 합니다. 왜냐하면 임신할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 둘째딸은 간호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리현상에 관한 이론과 지식은 자기 엄마보다도 훨씬 더 잘 알 것 입니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보니까 음식맛도 달라지게 되고, 그리고 순간순간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런 저런 의문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론은 많이 알고 있지만 실제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남자도 물론 마찬가지로 해산의 고통을 알수 없습니다. 이것은 경험해보아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부인이 아기를 출산할 때 의사가 같이 힘을 쓰면서 도우면 좋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자기 부인처럼 같이 힘을 쓰고 용을 쓰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죽을힘을 다해 용을 쓴다고 해서 해산의 고통을 알수 있겠습니까? 해산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자녀를 낳아본 사람 뿐입니다. 이런 것은 경험을 해봐야 알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너무나 잘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나온 세월동안 일어났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받아도 당당했고 재판을 받고 고문을 받아도 당당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입니다. “29.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말을 듣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도 내가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재판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재판하고 있는 왕과 총독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할수 있는 이유는 단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바울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축이 되어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살아갈때가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그 손님은 바로 사탄이죠. 이 사탄은 죄지은 사람을 찾아와서 비난하고 정죄를 합니다. ‘야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범죄를 할수 있니?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는 안산다.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신앙생활 하지 말고 그만 두라“ 이렇게 정죄하고 비난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렇게 살수 없지. 이렇게 죄를 짓고 살 바에는 차라리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롬 8장 33절입니다.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아니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나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네가 뭔데 나에게 그렇게 말하느냐. 무례하구나. 당장 나에게서 떠나가라 사탄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합리화 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지 사탄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말을 듣고 신앙을 떠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사탄의 비판과 정죄에서 이겨낼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입니다.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지식은 경험해서 알게 된 지식입니다. 체험을 해서 알게 된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망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제가 어려워서, 그리고 운이 없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진짜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애굽나라 바로왕의 마음이 왜 그렇게 강퍅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입니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왕은 강퍅하게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망하게 되어서 두손 두발을 다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떠나 보냈던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 정착을 하게 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이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계속 주변 나라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힘들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왜요?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 10절입니다.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인 사사시대때 이스라엘 후손들은 주변나라의 공격을 받을 만큼 나라가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지 못하니까 다음 세대 후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6장 3절입니다.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으면 얻게 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힘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기를 출산하면 누구나 다 부모가 될수 있지만 지혜로운 부모는 그 아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알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힘써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힘써서 하나님을 알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고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기적인 성경공부와 예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삶의 터전에서 순종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아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연회장과 손님들은 그사실을 몰랐지만 물을 떠온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 9절입니다.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기적은 하인들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순종을 한 사람은 주님이 하신 일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모두가 다 말씀에 순종을 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럼으로 상식적으로 맞지가 않고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할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고난을 이겨낼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을 확신하는 자입니다.

12절 후반부입니다. ‘12.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의탁한 것을 주님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의탁한 것은 무엇입니까? 신학자들마다 주장하는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것은 복음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신학자는 ’자신의 영혼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탁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주님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담대했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을 이겨낼수 있었습니다. 왜요?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에 빌립보 감옥에 있었을때도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서신서를 보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6절입니다.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요?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고난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경험 해왔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면 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지키시는 분이심을 경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확신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야망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롬 8장 38-39절입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확신하노니‘ 바울이 확신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망이나 고난속에 있다 할지라도, 나에게 어떠한 아픔이나 고통이 있다할지라도 이러한 것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지고 있던 확신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할지라도, 내가 비록 모진 고문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것이 곧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이 아닌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고백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가 아닙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고난이 오고 손해가 오고 환경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을 하지만 바울은 반대입니다. ”나에게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가 없다“ 라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잘될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지 않을 일이 생길때도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물 가운데서도 함께하시고 불 가운데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물과 불이 나를 덮친다할지라도 담대하게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떠나게 될때 바울과 같은 이런 고백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이 사망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가 없다고 이런 확신속에서 세상을 떠날수가 있다면 그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확률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신앙은 확률이 아닙니다. 여기를 보고 저기를 보고 잘되어지는 확률을 찾아가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사람들은 고난과 어려움이 오게 되면 또 다시 잘 되어지는 확률을 찾아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고난이 와도 이겨낼수 있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가난하게 살아도 당당할수 있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주변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도 위축되지 않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말씀에 순종할수 있고 확신이 있어야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우리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 주신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것을 확신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십시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남은생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며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힘든 가운데서도 소망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