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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한 사람

Author
kgmcc
Date
2020-03-15 17:09
Views
763
본문 : 민 33장 29절

날짜 : 2020년 3월 15일

 

<신명기 3329>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중에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여행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이런일 저런일을 해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이 우리 삶의 이유이고 행복이 우리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아는 아리스토 텔레스는 인간의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인생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바로 행복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파랑새를 잡을려고 몸부림을 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부리를 치고 노력을 한만큼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얼마전에 발표된적이 있습니다. oecd 국가 37개 나라가운데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32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거의 꼴지 수준인 것이죠. 갤럽에서 조사한 자료만 보아도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세계 148개 나라가운데 97위입니다. 거의 바닥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라가 넘어섰습니다. 국내 총생산량(GDP)은 세계 제 12위에 해당되는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it 산업은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는 막강한 대한민국이지만 그 행복지수는 거의 밑바닥수준입니다. 그래서인지 젊은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결혼 연령층도 35세 이상이 되어서야 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행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많아지게 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예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고 좋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카피 머쉰이 대중화 되었습니다. 그이전에는 시험때가 되면 성실하게 필기를 해온 친구의 노트를 빌려다가 밤새 베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카피머쉰이 생기게 되니까 베끼지 않고 카피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 좋은 세상이구나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필기도 하지 않고 카피도 하지 않고 선생이 칠판에 쓰면 학생들이 선생님 잠깐만요 하고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끝납니다. 그렇다고 지금 대학생들이 옛날 대학생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갑니까? 우리는 예전에 왕들도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왕들이 지금 우리들처럼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고 동영상을 볼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왕들이 겨울에 딸기나 수박을 먹고 히터의 따스한 온기속에서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볼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예전보다 더 많은 소유와 더 좋은 환경에 살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전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소득이 2천달라도 되지 못하는 부탄이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97퍼센트가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국민소득이 2천달라도 되지 못하는 부탄에서는 100명중의 97명이 나는 행복하다라고 하는데 국민소득이 3만 달라가 넘어선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불행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는 것입니다. 행복은 지식과 정보의 넉넉함에도 있지 않습니다. 부자중의 부자라고 할수 있는 재벌 100사람과 지식의 상아탑이라고 할수 잇는 박사의 학위를 가진 100사람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이 질문에 87퍼센트가 아니요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돈이 많은 재벌이 행복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지식인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누가 행복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행복의 조건을 반대적인 관점에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에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선 소크라테스 제자이기도 한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행복은 부족함에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플라톤이 주장한 행복의 조건을 보면 1.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소유 2.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약간 부족한 외모 3. 자신이 인정하는 것 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4.남과 겨루었을 때 한사람에게는 이기고 두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5.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정도만 박수를 보내는 말솜씨

자 여기 5가지 행복의 조건중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부족함입니다. 이렇게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부족함을 내세웠습니다.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넉넉함에서 찾았던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서 찾았습니다. 약간 부족함이 있어야 제대로 인생의 행복함을 느낄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과 경쟁에서 질때가 있어야 이겼을 때 행복을 느낄수 있고, 배고파보았어야 밥을먹을 때 행복을 느낄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어느정도 일리는 있지만 사실 우리의 부족함이 행복의 조건이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 부족함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갈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겟습니까?

또 하나 행복에 대한 착각은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좋고 나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안에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잔에 행복을 찾기도 하고 저녁에 잠들기전 와인 한잔에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한순간의 행복은 될수 있어도 영원한 행복은 될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반대로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잘 변합니까? 그러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래전에 행복전도사로 유명했던 최윤희씨가 자살을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사람이 초지일관 주장한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말하며 행복을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진작 본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요,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행복은 한순간의 행복일수는 있지만 영원한 행복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환경이나 소유의 넉넉함도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인간의 부족함도 행복의 기준은 될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불행한자로 이땅을 살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행복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9절 앞부분입니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누구보고 말씀합니까? 이스라엘이여 여기서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인 저와 여러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자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한 환경가운데 있었나요? 아니죠? 최악의 상태이었습니다. 40년동안 광야를 멤돌고 있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를 이끌어 왔던 지도자 모세와는 이제 곧 헤어져야 상황에 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고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쟁을 치룰만한 변변한 무기도 없습니다. 행복할수 있는 조건과 환경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여전히 문제속에 싸여있습니다. 내겐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건강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로움과 장래에 대한 불안한 환경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래서 이시간에는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합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1. 구원을 받았기 때문

29절 전반부 입니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과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나가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인기와 명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구원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구원이 행복의 조건이 될수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와 죽음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행복해질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이천년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죄값을 치루어야만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할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댓가인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죄의 댓가를 단계적으로 구분하면 부끄러움과 형벌과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전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뺨을 맞고 침뱉음을 당했습니다. 또한 발가벗긴채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댓가는 형벌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손가락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채찍에 의해 살점이 찢어나가고 가시 면류관에 찔림을 당하시고 한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흘리시면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목마름의 고통속에서 죽어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이루었다’ 외치셨습니다. 그말의 원래 의미는 죄값을 다 치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값을 치루어주시기 위해선 이런 고통과 형벌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럼으로 내가 지은죄를 대신해서 온갖 부끄러움과 수치와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으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우리도 부활의 첫열매의 뒤를 이어서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원받는 길은 너무너무 쉽고 단순합니다. 예수님 다 해놓으신 것을 내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원망 불평을 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보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아나리라 말해라. 그래서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오늘날 이 장대는 십자가를 상징하고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좋은예가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이지 않습니까? 그 강도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기직전에 한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믿고 바라본 것 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할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 이놈아 염치가 있거라. 평생동안 나쁜짓을 골라해놓고는 뭐 내가 갈려고 하는 천국에 가기를 소망하니‘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이 강도는 천국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쉽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유명한 부흥사 디엘 무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을 믿어보라 반드시 실망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친구를 믿어보라 반드시 헤어질때가 올것이다 명예나 돈을 믿어보라 반드시 잃어버릴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보라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래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해질 사람이 아니라 이미 행복하고 그래서 지금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2.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29절 중간입니다. 29.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이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의미 입니다. 방패와 칼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방패는 방어의 무기로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칼은 공격의 무기로서 나의 힘이 되어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28편 7절을 보시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방패이심을 경험하며 살았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힘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원수가 얼마나 많은지 시편을 보게 되면 원수라는 단어가 이흔 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그렇게 수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힘과 방패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그 원수들을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를 따라서 도우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인간의 배신과 조롱의 고통에서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과 자식이 반역하는 아픔에서도 이겨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고난을 면제해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더많은 고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주시고 칼이 되어주셔서 싸워주신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길을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3. 영적인 전쟁에 승리자가 되기 때문

29절 마지막입니다. 29.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너의 대적이 너에게 복종하고 너가 그들을 밟을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승리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부터 자기들이 죽을때까지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죽을때까지 영적인 전쟁을 치루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는 영적인 전쟁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영적인 전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영적인 전투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할 때 진정한 행복자로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여리고 성과 첫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여호수아앞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전쟁이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할때 하나님이 싸워주셔야만 승리를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셔야만 승리가 가능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그들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 군대 장관의 말에 신발을 벗었습니다. 항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명령에 우리가 항복을 하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항복에서 획 하나가 더하면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앞에 항복할 때 행복해질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은 싸우시는 용사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시편 24편 8절입니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그래요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할 때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영적인 전쟁이 시작되면 친히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셔서 전쟁에 참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용사이십니다. 방패가 되어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주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행복한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해결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칼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자로 살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여전히 문제가운데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가운데 있습니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래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칼이 되어주심을 믿고 살아간다면 또한 영적인 전투에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게 됨을 믿는 다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으십니까? 이세상에 우리들 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세상에 우리들 보다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