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원조 감사제의 교훈

Author
kgmcc
Date
2022-11-27 04:33
Views
21
본문 : 레위기 7장 11-15절

날짜 : 2022년 11월 27일

 

<레위기 7장 11절~15절>

11.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2.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13.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14.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지난 주에는 추수 감사절 주일을 맞이하여 추수 감사절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2가지 배경을 살펴보았는데 하나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배경은 청교도들에 의한 배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경적인 배경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추수감사절의 배경을 청교도들에 의한 배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경적인 배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적인 배경으로 초막절 제사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청교도들에 의한 배경이나 성경적인 배경보다도 더 근본적인 배경이 되는 감사제가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첫 번째가 되는 감사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조가 되는 감사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원조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식당 이름앞에 원조 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면 누구나 다 인정 해줍니다. 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대구의 중심지에 동성로 골목에 할매 수제비 식당이 있었습니다. 값이 싸고 맛이 있기로 이름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골목에는 여러개의 수제비 식당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수제비 식당이라면 할매 식당이 원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그 식당이 사라졌을 것 같지만 그당시에는 대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해서 한번씩은 찾아갔던 식당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원조식당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 원조식당만이 가지고 있는 오랜 역사와 그리고 다른 식당들이 모방하기가 어려운 깊이가 있는 그 특별한 맛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조라고 한다면 누구나가 다 특별하게 인정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최초의 감사제 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조 감사제 인 것 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이전에도 감사제사는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느낄때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감사의 제사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게 하신것은 바로 오늘 본문이 처음인 것 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감사를 할려거든 이렇게 해라” 라고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이 본문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조 감사제이요 최초의 감사제 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게 되면 그 원래의 취지가 희석이 되어지는 경우가 참 많아지게 되지 않습니까? 처음엔 좋은 의미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이상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참많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고 있는 총기사고가 그 좋은 예라 할수 있습니다. 왜 총기 소지하는 것이 이 미국땅에서 합법적이 되었습니까? 유럽에서 이민을 온 이민자들은 그당시 동물을 사냥해야 하고 그리고 미국 원주민들 하고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총기 소유가 법적으로 허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당시에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수 있다는 점에서 이 법은 필요했습니다. 처음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법이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오늘날에는 이 총기에 관한 법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의미가 점점 변하여 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감사가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가 바뀌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그냥 내가 기쁘고 즐거울 때 내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감정이 감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조가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에 일어나게 된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좀전에도 잠시 말씀 드렸지만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추수감사절은 옛날 청교도들이 지낸 감사의 축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의 축제가 원조 감사제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원조 감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00여년전 영국을 떠나 미국땅에 도착을 한 청교도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원조 감사제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미국땅에 도착을 했던 그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 반 이상이나 죽었던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감사제를 지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원조감사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이 원조 감사제가 주는 교훈을 기억하면서 환경을 넘어선 감사를 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원조 감사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는 화목제를 드린후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화목제를 드린후에 드리는 감사이니까 화목제가 먼저입니다.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11.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화목제이죠) 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제물과 함께 드리고“ 12절에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이 말씀 이전에 1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화목제를 먼저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를 먼저 드릴것을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이 화목제에 감사의 마음이 있어서 드리고 싶거든 이렇게 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화목제에서 감사제로 바뀌게 된 것이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보다 먼저 여러분 화목제가 무엇입니까? 화목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왜 화목, 화평을 구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면 내 인생에 아무리 많은 축복이 있고, 아무리 많은 좋은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감사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내가 죽게 되는데 지금 내 인생에 잠깐 좋은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감사할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무엇보다도 우선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 해보십시요. 내가 홍길동이라는 사람과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홍길동이와 내가 서로 화평을 하지 않고 그 어떤 일을 평안하게 해나갈수가 있겠습니까? 화평하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홍길동아, 지난일을 우리 서로 잊어버리자 나도 용서할 것이니까 너도 나를 용서해다오“. 이러한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감사를 해야 나도 기쁘고 그사람도 기쁜 것입니다.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홍길동이가 가지고 있는 기쁨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기쁜일이 일어나도 홍길동은 오히려 기분이 상하게 될 뿐입니다. 화목이 먼저 일어야 모든 것이 순리적으로 덕스럽게 일이 풀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화목제인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원조의 화목제는 우리 인간들이 희생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와 화목해주세요 이 제물을 받으셔서 나와 화평을 이루어 주세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관계가 불편해질 때마다 새롭게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을때마다 새롭게 희생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자 온전한 화목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화목제가 되셨던 것입니다. 요한 일서 4장 10절입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니 우리가 잘못했으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에게 화목을 청해야지 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화목을 하십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인간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 입니다. 그 사랑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화목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해서 생명을 드리고 운명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화목제가 되신 예수님을 내가 믿고 내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화목제가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죄를 짓을때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때 마다 화목제가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화목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화평을 먼저 이루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과 화목을 이루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만이 감사를 드릴수가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만이 참된 감사 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일을 하고 내가 감사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감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화목제로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감사할 때 그 감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조 감사제가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먼저 이룰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원조 감사제가 주는 두번째 교훈은

넉넉하고 정성이 있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본문 12절과 13절입니다. “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제물과 함께 드리고 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여기서 무교병은 파우다 즉 이스트를 넣지 않고 구운 떡이고 무교전병은 무교병 종류의 과자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이나 비둘기 같은 화목 제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고 난 이후에 한 단계 더 나아가 감사의 제사를 드리길 원한다면 무교병과 기름을 섞은 무교전병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제에 바칠 제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 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별을 해놓았습니다. 명확하게 정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방법대로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양이나 비둘기를 가져가서 그 번제물인 짐승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화목제사를 받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입니다. 2.그는(예수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한 뭐요? 화목 제물이니’ 그럼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목제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양이나 비둘기 같은 짐승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화목을 할때는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 화목 제물이신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보시고 우리의 화목제사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목제사에는 반드시 화목제물이 필요한데 감사의 제물을 드릴때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적게 드릴수도 있고 풍성하게 많이 드릴수도 있습니다. 방법도 좀 더 다양하게 드릴수도 있습니다. 무교병과 무교전병 그리고 또 무엇입니까? 고운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구운 과자입니다. 요즘에 그로서리에 가면 아주 곱게 빻아놓은 쌀가루나 밀가루를 돈 주고 쉽게 살 수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곡식을 일일이 절구통에 넣어가지고 빻아야 했습니다. 제가 어릴때 저희 아버님이 기차에 치인 사고로 인하여 허리를 크게 다치셔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한동안은 쌀죽을 만드셔서 아버님에게 드리셨습니다. 그당시에는 쌀을 절구통에 넣고는 절구 방망이로 빻아서 쌀가루를 만들었는데 어머니의 명령으로 제가 몇 번 쌀을 빻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나게 빻았지만 무쇠로 만들어진 절구 방망이가 너무 무거워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아주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억지로 쌀을 빻게 되면 쌀이 절구통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일도 생겨서 어머니에게 혼난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엿장수가 한번씩 저희 동네에 와서 가위질 할때마다 저 절구 방망이를 가져가서 엿으로 바꿔 먹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다 그리운 추억입니다. 이렇게 고운 가루를 만드는것에도 정성이 필요한데 거기에다가 이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과자를 만들려면 더욱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는 이런 정성이 담기 감사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나의 귀한 정성이 들어간 감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참다운 감사는 내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내마음에 우러나오는 정성이 담긴 감사입니다. 이곳 미국에 사는 교포들은 덜하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결혼 청첩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청첩장을 받게 되면 그사람은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결혼 축의금을 얼마를 내어야 하나?‘ 이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내가 그집에서 얼마를 받았는지를 기록한 장부책을 뒤져봅니다. 그래서 받은 액수만큼 그만큼의 액수를 축의금으로 그 집에 내는 것입니다. 5만원 받았으면 5만원 내고 10만원 받았으면 10만원을 냅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만나도 별일이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를 주셨으니까 나도 그만큼 드려야지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우리는 내가 가진것 전부를 다 드려도 택도없이 모자랍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요. 만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1, 2분만 공기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모두가 다 죽게 됩니다. 물이나 햇빛 같은 것 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계산해서 드릴려고 한다면 내게 있는것을 다 드리고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최고의 정성이 있어야 하고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 못해 드리는 것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기는 것은 나의 최고의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너희들이 감사를 할려거든 귀한 정성이 담긴 감사 하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감사를 함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번째 교훈은 이 감사제를 드리는 것은 우리를 위한 감사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 14, 15절입니다. “14.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4절을 보시면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기서 거제라는 단어는 ‘들 거 자 제사 제’ 자이니까 두 손으로 예물을 받들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손으로 받들어서 예물을 드리는 것이니까 최고로 공경을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시면 유교병까지 가져오도록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유교병’은 바로 누룩을 넣은, 파우다를 넣은 떡을 의미합니다. 파우다, 이스트를 넣었으니까 무교병보다는 훨씬 더 부드럽고 맛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할 마음이 있거든 이렇게 풍성하고 정성스럽게 가져오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가져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야 나 그것 다 안 받는다. 그 가져온 전체 예물들 중에 하나씩만 나에게 다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14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 전체의 예물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복숭아를 가져왔니 하나만 내 제단위에 놓아라. 배도 가져왔니? 하나만 올려라. 사과도 가져왔구나. 어이구 인절미도 가져왔네. 각각 하나씩만 다오. 밤과 대추도 가져왔구나 그래 하나씩만 올려봐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니신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생신이 되면 상이 부러지도록 풍성한 음식을 차려서 할아버지께 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할아버지는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을수 있어서 좋아하시는 것입니까? 상에 차려진 음식물 하나씩만 먹어도 이미 배부르신 할아버지이십니다. 나머지는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 먹습니다. 할아버지보다도 그들이 더 많이 먹습니다. 14절을 다시 보시면 ”14.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두 손으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이 말씀을 오늘날로 적용시켜본다면 예배를 집행하는 목회자에게 나누어 드려라’ 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5절입니다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것이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누가 먹습니까? 감사함으로 바친 사람이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식을 행한 제사장과 제물을 바친 사람들이 다같이 나눠 먹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치게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자마자 한 조각만 맛보시고는 이미 배가 부르시고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는 ‘자 너희들 나눠 먹으라’ 면서 되돌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우리에게 풍성함을 되 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는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날이 다 지나가기 전에, 이 밤이 다 지나가기 전에, 내 인생의 밤이 다 지나가기 이전에, 그리고 지금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고 성도님들을 보십시오. 감사에 인색한 성도님들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제 가족중에는 정말 풍성하게 감사하며 신앙생활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그래서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나누는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에게 풍성함을 되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풍성한 감사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2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만일’ 입니다. 만일 이라는 의미는 감사함으로 드릴수도 있고 감사함으로 드리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감사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화평을 하는 화목제는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멸망하기 때문에 반드시 화목제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감사제는 해도 되고 안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라 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게 되는 성격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감사를 드리지 않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많습니다. 감사제는 옵션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는 드릴 이유가 있어서 드리고 감사를 드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여유가 있어서 드리고 여유가 없어서 안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선택입니다. 내가 감사를 하지 않기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감사를 안 드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메릴렌드 주에 살고 있었을 때 어느 집사님 가정에 두 딸이 있었습니다. 국제 결혼을 하신 분이신데 이 집사님 미국분이 되시는 남편에게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혼자 뉴져지주에 사셨습니다. 그당시에 이 집사님 큰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주말에 시간이 날때마다 5시간씩을 운전해서 할머니를 돌봐주러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할머니의 연세가 더 많아지면서 널싱 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한달에 한번 정도 널싱 홈을 방문해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도 하지 않는 일을 이 큰 딸이 해왔던 것입니다. 그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 마침내 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자신의 전 재산을 자기의 큰 손녀에게 주겠다고 유언장에 쓴 것입니다. 그래서 손녀가 그 돈으로 집도 사고 못다한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마음에도 감사함이 있으면 이렇게 자신의 전 재산을 그 대상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되돌려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그래서 12절 전반부를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감사를 할 이유가 있어서 감사를 드릴려거든’ 이 아닙니다. 감사를 드리기로 결단하고 감사드리기로 선택을 하면 감사할 이유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내가 감사를 드리겠다고 선택을 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감사를 선택하기 이전에는 그 감사의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서는 보이는데 나에게는 안보입니다. 나에게 이만한 아내가 없고, 이만한 남편이 없고, 이만한 자식이 없고 그리고 이만한 부모가 없고 이만한 성도나 이만한 교회가 없는데 남의 것이 좋아보입니다. 남의 아내가 좋아보이고 남의 남편이 좋아보이고 남의 자식이 좋아보이고 남의 교회가 좋아보여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감사하기로 선택을 하고 결단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내 주변이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를 선택해서 드리면 내가 얼마나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감사를 선택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내 인생의 밤이 다 지나가기 전에 다 돌려주실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하고 감사하는 것만큼 축복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부자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화목제 예배를 드릴때 감사를 함께 드릴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넉넉하고 풍성한 인생을 살아 갈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