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채워야 하는 이유

Author
kgmcc
Date
2022-12-11 04:32
Views
76
본문 : 마태복음 12장 43-45절

날짜 : 2022년 12월 11일

◊ 강대상을 비추는 조명등의 위치 변경으로 인해 마이크 그림자가 설교자 얼굴 오른쪽에  비추어지게 되었음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은 흉가 라고 해서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여겨온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빈집에서 조금만 이상한 일이 생기면 귀신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 라고 하는 소문이 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 매년 여름철이 되면 더욱 인기가 있었던 ‘전설따라 삼천리’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소재로 삼아 1965년 5월 달부터 라디오로 방송되었는데 15년 동안이나 장수했던 인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면 그 줄거리 전개가 비슷 비슷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배경이 빈집인데다가 저마다 사연이 있는 귀신이 등장 합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하는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다가 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앞에 정말 크고 멋진 집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래서 그집 주인 여인과 딸로부터 대접을 잘 받고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 무너져가는 빈집이었다 라고 하는 뭐 이런 식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빈집들이 그지역 동네 불량배와 범죄자들의 소굴로 이용되고 있다는 내용이 종종 언론에 보도 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조직 폭력범들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이런 조직 폭력범들을 무서워하는 가 봅니다. 귀신들이 그들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까 말입니다.

오래전에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지존파 일당들도 빈집에 사람을 죽이는 시설을 갖추어 놓고 살인 잔치를 벌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러한 빈집들을 철거할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철거 할수가 없는 형편에 있다고 합니다. 빈집이라고 하지만 주인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인의 경우에는 이따금씩 와서 쉬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주인은 그 집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이 사시던 추억이 담긴 곳이기 때문에 손대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기도 한답니다. 또 어떤 주인들은 집값이 오를때까지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주인들이 팔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서 그 빈집들을 없애 버릴수도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빈집의 비유‘ 라고 불리어 지고 있습니다. 이 ’빈집의 비유‘ 에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집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잠시 설명하자면 어떤 집에 귀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귀신은 자기가 살았던 그 집을 떠납니다. 그런데 귀신이 그집을 떠나 물 없는 광야를 헤매다가 도무지 쉴만한 곳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이 비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있고 수리도 잘되어 있었습니다. 변하여진 집을 본 이 귀신은 이렇게 좋은 곳은 나 혼자 살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들을 일곱이나 데려다가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그 집의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었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는 ’빈집의 비유‘ 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해서 더욱 사악하게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을 살펴보면 러시아 푸틴이나 북한의 김정은 같은 악한 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서 점점 더욱 악해지는지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빈집의 비유가 주는 교훈

첫째로 집에는 참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집에는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주인이 있고 거짓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주인은 누구입니까? 주인이 떠난 빈집에 가끔씩 들어와 살아가는 주변의 불량배들이나 거지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집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집의 진짜 주인은 아닙니다. 그리고 참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그집이 어떻게 되어지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집이 썩어가고 무너져 내려가도 그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빈집은 그냥 그대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형편 없게 되어지게 됩니다. 그럼으로 집은 빈집으로 있어서는 안되고 그리고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도 반드시 진짜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도 주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주인 과 거짓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계시는 참주인은 누구입니까?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성령이 우리 마음에 참주인이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입니다.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의 성령을’ 여기서 그는 앞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의 심령에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의 마음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믿는 성도들에게는 참주인이 되십니다. 하지만 거짓 주인도 있습니다. 그 거짓 주인은 사탄 마귀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주인이 그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참주인인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거짓 주인인 사탄 마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나 사탄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내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믿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내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종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라는 이 말씀은 자기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속에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참다운 제자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입니다.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주인’ 이라는 단어 대신에 ‘어른’ 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집안에는 반드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집안에 아이들만 있다면 그 집 형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들이 급한일이 생겨서 아이들에게 집을 맡기고 며칠 떠나게 되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그 부모들의 마음은 굉장히 불안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집에 전화를 걸어서 집안에 아무일이 없느냐 라는 확인을 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부모에 이렇게 말하겠죠. ‘집에 아무일이 없으니까 아무 염려마시고 마음 편하게 지내다가 오세요’ 그런데 사실 집안이 제대로 정돈 되어 있겠습니까? 어수선하고 난장판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집을 떠나있는 순간부터 그 집안은 어수선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는 반드시 어른들이 있어야 아이들이 어른들의 보호와 도움속에서 집안이 온전하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우리 인생은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이렇게 방황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사십을 훨씬 넘고 오십을 지나. 육십이 되어도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철이 좀 들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겨서 일을 해볼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만하면 됐다. 이리 오너라’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행동을 해왔던 것을 보게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물론 이방인들이 살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동안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그것까지는 이해 한다고 하십시다. 하지만 자기 아내를 왜 다른 사람에게 보냅니까? 누가 자기한테 와서 ‘내가 너의 누이와 결혼하고 싶다. 결혼 지참금을 많이 줄테니까 너의 누이와 결혼하게 해다오’ 이렇게 말할 때 사실을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사실은 내 누이가 아니고 내 아내입니다” 라고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말을 못합니까? 그 사람은 아브라함이 자기 누이라고 했으니까 정당하게 지참금을 주고 데리고 살려고 했지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갈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 진실만 말하면 되는데도 그렇지 못했으니까 이 얼마나 철이 없는 아이와 같은 행동입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 장군의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우리는 한순간의 감정으로 실수했다고 이해를 해보십시다. 하지만 왜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는 왜 죽입니까? 우리야 장군은 정말 충성스러운 신하이었습니다. 물론 밧세바가 임신을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지 않고서도 문제 해결을 할려고 했습니다.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에서 데려와 부인과 같이 잠자리를 같이 하게 할 계획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야 장군은 동료들이 지금 전쟁터에서 고생을 하는데 내가 집에서 편안하게 있을수 없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신하입니까? 하지만 다윗이 세운 계획을 살펴보면 다윗은 자기가 밧세바와 같이 살아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충성스러운 우리야 장군을 죽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밧세바와 떨어져선 나는 못살겠다” 그랬다면 몰라도 그것도 아닌데 우리야 장군을 죽인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지 왜 죄없고 충성스러운 우리야를 죽입니까? 마태복음 1장 6절입니다.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합니다. 통상적인 족보를 기록하는 형식으로 하자면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 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다윗이 천국에서 이 성경 구절을 볼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물론 천국에서는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고 그대신에 그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만... 그런데 이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내마음에 합당한 자’라고 하는 칭찬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그랬다면 우리도 이런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철부지 아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는 참된 어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어른 없이 자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시편 53편 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53:1). ‘어리석은 자는 그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어리석다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집안에 어른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시고 어른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신다면 우리의 심령에는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내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어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빈집의 비유가 주는 교훈

둘째. 빈집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집이 비어 있다는 것은 집을 사랑하고 있는 주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집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집을 누가 가장 사랑합니까? 집주인 입니다. 그럼으로 그 집 주인이 없는 것은 그 집을 돌보고 가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마음의 집이 비어있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공허한 상태 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십니다. 내가 나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 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부모가 집을 사랑하고 관리하는 것 하고 아이들이 집을 사랑하고 관리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집세를 냅니까? 물세를 냅니까? 지붕을 고칩니까? 잔디를 깍습니까?. 이 모든 일들을 부모들이 다 감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없는 우리의 마음은 그 어떤 것이 들어와도 가시덤불과 잡초만 우거지는 메마른 심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우리 마음을 진지하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가꾸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모이지 속에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상한 것처럼 보여도 그 마음속을 들여다 보면 추악하고 형편 없이 관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집에서 쫓겨난 귀신이 사막과 광야를 헤매다가 다시 옛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을 떠나면 고생’ 이라는 말이 있지만 귀신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옛날에 살던 집으로 돌아와보니 그 집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청소를 해놓았고 수리도 되어 있었다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합니다. 본문 44절입니다.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그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여기서 '청소되고’ 라고 하는 표현은 긍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귀신이 보기에 자기가 들어와 살기에 적합하게 청소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집이 '수리되어 있었다‘ 는 말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귀신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하도록 꾸며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빈집이란 귀신들이 거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심령은 귀신이 들어오기 좋은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집을 비어 놓아서는 안됩니다. 귀신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장식해 놓아서는 안됩니다. 귀신들이 좋아하는 것은 시기와 질투. 게으름. 자기 자랑, 교만과 위선 등으로 장식된 마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귀신은 자기 혼자 있기에 아까워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처음 형편보다도 더욱 악화되어져 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당시 비유의 대상자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우상숭배라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내었습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에스라나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의 영적 각성 운동으로 인해 우상숭배라는 귀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이후 세월이 흘러가면서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이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율법주의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 이전보다 더 악하고 더러운 일곱 귀신에 들린 사람처럼 영적으로 더욱 비참한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욱 사악해 져서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백합화 향기는 모든 꽃향기 중에 으뜸이지만 일단 썩으면 다른 꽃 보다 더 심한 악취를 풍긴다고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타락한사람은 처음 예수를 믿기 전보다 더 사악해 져 버립니다. 전도관의 박태선이나 통일교의 문선명 그리고 구원파 권신찬과 그의 사위 유병언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더 대적하고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을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틴도 처음엔 신실한 러시아 정교 신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권력을 가지게 되자 저렇게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이면서도 상대방을 탓하는 이전보다도 더 사악해지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오랫동안 빈집으로 있게 되면 그 집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황폐하고 더러워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빈집의 비유가 주는 교훈

셋째는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입니다. 불교나 명상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이 채우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시면 여러군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진리로 채우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청소를 하고 수리하고 난후에 비워두지 말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를 받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 합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메말랐던 우리 마음이 청소되고, 수리되어집니다. 그리고 난후에 그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채우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45절입니다.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시작하십니까? 마태복음 12장 38절입니다.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중 몇사람이 말하되’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 빈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빈집의 비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비유인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율법에만 매달린 생명력을 상실한 종교였습니다. 이들이 강조하는 율법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하지 말라’는 율법이 마음을 비우게 할 수 있고,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운 곳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소극적인 삶을 살지 말고 ‘하라’ 라고 하는 긍정적인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손과 발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손과 발이 약해지게 될것입니다. 오랫시간동안 말을 하지 않으면 말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되고 허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허리가 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사용해야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게 됩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럽혀졌고 무너진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고 수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마음을 그냥 비워두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심령을 채워나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하라’ 라고 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기도로 채우고 섬김과 봉사로 채우는 생활에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내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목적은 빈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성전삼아 살아가게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내마음에 채우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 마음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사탄마귀가 얼씬도 하지 못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