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보시고 우시며

Author
kgmcc
Date
2022-12-18 05:08
Views
24
본문 : 누가복음 19장 41-44절

날짜 : 2022년 12월 18일

 

<누가복음 19장  41-44절>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쁜일이 생기면 기쁘다고 눈물을 흘리고 슬픈일이 있으면 슬프다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 사람이 여자인 경우에는 감정적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주변사람들이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남자인 경우에는 마음이 연약하고 남자답지 못하다 라는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자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으로 더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정적이거나 정신력이 약하거나 마음이 여리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데 억지로 참는 사람보다는 그때마다 우는 사람이 오히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심리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여기서 정신력이 강하다는 말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줄 아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눈물로 표현할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람은 심령이 메말라지고 강퍅해지게되면 그에따라 눈물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눈물이 말랐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내가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이고 심령이 강퍅해져가고 있다는 징후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41절입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성을 보시고 우시며’ 어느 성을 말씀합니까? 예루살렘 성이죠. 오늘 본문 앞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환영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양탄자처럼 깔았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를 외치며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의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 지금 구원하소서 의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군중들을 보면서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환하게 웃으시고 손을 흔들면서 군중들에게 화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성에 가까이오자 눈물을 흘리십니다. 백성들은 이제 구원자 예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나라가 해방될 것을 바라보면서 흥분하고 있는데 주님은 우십니다. 그것도 조용히 감정을 삭이면서 우신 것이 아니라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여기에서 ‘우셨다’ 라는 헬라어 원어는 ‘에클라우센’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헬라어에는 ‘울다‘ 라고 하는 동사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에클라우센‘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에다크루센‘ 입니다. ’에다크루센’ 이라고 하는 단어는 요한복음 11장 35절에서 사용되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입니다. 이때 ‘에다크루센’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이 ‘에다크루센’ 의 눈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감정을 삭이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우리나라 여인들이 소리를 죽이며 울면서 속앓이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 에다크루센의 눈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용된 동사는 ’에클라우센‘ 입니다. 이것은 소리를 내어서 엉엉 우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소리를 내어서 엉엉 우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큰소리로 통곡하며 우셨습니까?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힘을 당하고 고통을 받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일이 두렵고 슬퍼서 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통곡하시면서 우신 이유는 세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통곡하시면서 우신 이유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통곡하시며 우신 첫 번째 이유는 그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46절입니다.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바로 앞절인 45절입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임재 하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강도의 소굴 이라는 의미는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당시 예루살렘의 성전은 장사꾼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성전 뜰에는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20세 이상 유대인 남자들은 성전세를 내어야합니다. 얼마를 내어야 합니까? 반 세겔을 내어야 합니다. 반 세겔은 노동자의 이틀치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이때는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는 명절이었기 때문에 해외에 흩어졌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돈을 가지고는 성전세를 낼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그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돈을 불의하고 더러운 돈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돈을 가지고는 성전세를 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화폐인 세겔로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집단인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이 고용한 우리나라로 따지면 국회의원들이 고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전을 했겠습니까? 그 환전으로 인한 차액이 보통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제 아내가 3년전에 한국을 2주동안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왔는데 한국의 돈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당시는 아마 1달러당 1200원 가까이 했던 것 같은데 제가 거래하고 있는 웰스파고 뱅크에서 한국돈을 달러 로 환전을 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돈을 가지고 있으면 뭘하냐 싶어서 환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1달러당 1140원 조금 넘게 환산해서 달러로 제 뱅크 어카운트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당시 거래 시세는 1200원 가까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1140원 정도 환산되어 제 은행 계장에 입금되었던 것입니다. 그 차액에 대한 이익은 웰스파고 뱅크에서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편하다고 거래하고 있는 뱅크에서 환산을 해버리는 큰 손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기가막히는 일은 그 은행 직원이 네가 다음에 한국에 갈때는 여기서 한국돈으로 환산해줄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은행에서 환산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자면 ‘강도의 소굴’에서 제가 왜 환산을 하겠습니까? 어쨌든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 환전차액으로 인하여 어마어마한 이익을 누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뜰에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제물을 파는 사람들도 역시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고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멀리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려면 소나 양이나 비둘기 같은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올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와서야 성전에 바칠 제물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 뜰에 환전상이 있었고 하나님께 바칠 번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문제 삼으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흠이없는 제물을 팔아야 하는데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팔았습니다. 이곳에서 파는 짐승들은 흠이 있던지 흠이 없던지 성전에 바쳐질 제물의 자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허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반 장사꾼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성전 뜰마당에서 장사를 할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이 돈을 받고 허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기도하는 집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에 대해 통곡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래요 우리도 울어야 한다면 거룩함을 잃어버린 이땅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오늘날 경찰들이 동원되어서 교회가 서로 싸우는 것을 말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 들어가 서로를 향해 욕하며 비난하면서 판사에게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판정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국가 라고 할수 있는 이 미국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헤치고 헌법을 무시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남침례교 지도자들이 지지를 했던 한 정치인이 추악하고 더러운 행동을 한 일을 보면서도 이렇게 오랜시간동안 침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통곡을 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는 기독교 정치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통곡하며 울어야 됩니다. 우리가 참다운 성도라고 한다면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통곡하면서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까지 하시면서 겸손하시고 낮아지셨는데 직분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대형 교회 담임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이 모든일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손에 돌을 쥐고 던질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의 심정을 품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한국과 미국 교회와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이 가지셨던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통곡하며 울어야 됩니다. 그들을 비난하고 비판하기 전에 돌을 들어 치기 전에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통곡하며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울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닙ㄴ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심정을 가질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울수가 있는 믿음을 가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통곡하며 우셨던 이유는 둘째로 유대인들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본문 42절입니다.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일을 알았더라면’ 예수님께서 우셨던 또 하나의 이유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헬라어로 ‘에이레네‘ 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물론 잘 아시는 ’샬롬’ 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지금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인해서 생겨나는 영적인 희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평화와 세상적인 평화는 그 의미가 다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여기서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이라는 구체적인 의미는 ’너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았더라면‘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가 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입니다.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여기서 ‘이 둘’ 그당시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세상의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기 전에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구원자로 이땅에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땅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과 자신이 메시야가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을 고치기 전에 먼저 ‘네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나님만이 가질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으심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믿고 받아들이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을 보고 정치적인 구원자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이 원하고 바랬던 것은 세상나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관심을 가진 것은 하나님 나라 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신분이 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것에 예수님은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그들이 외치는 환호가 며칠 후면 실망하고 분노로 바뀌어질 것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호산나 호산나‘ 를 외치며 자신을 환영하지만 며칠후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것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셨습니다. 세상나라를 너무 사랑하고 세상나라만 바라보는 나머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자신을 알지못하는 무지함 때문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오늘날 이세상의 불행과 비극은 이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도박을 하고 술 중독에 빠집니까? 왜 사람들이 사기치고 속이고 살아갑니까? 왜 사람들이 돈을 벌기위해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일을 행합니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우십니다. 세상나라와 세상의 것만을 가지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인생을 바라보시며 큰소리로 우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바라볼 때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좌충우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게이들이 레즈비언들이 결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목제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못하고 살아가는 심령을 보면서 울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속상해서 울고 내 자존심이 상해서 울고. 내 몸이 아파서 울고,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워서 운적은 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심령들을 바라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었습니까? 그럼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심령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흘리신 눈물을 흘리며 신앙생활을 할수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우셨던 세 번째 이유는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본문 43절 44절입니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날이 이를지라’ 어떤 날이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다음 문장을 계속해서 보시면 ‘이 날‘ 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여기서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라는 의미는 원수의 나라가 예루살렘 성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토둔 즉 언덕을 만들어 사방에서 공격을 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계속해서 보시면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모습이 구체척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하나도 돌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40년의 세월이 흐른후인 AD 70년에 로마 디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그당시 갈릴리 군대 장관의 신분이었던 요세푸스가 로마 군인과 전쟁을 했는데 이 전쟁에서 패하고 요세푸스와 병사 한명만이 포로의 신분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요세푸스는 로마군에 투항을 하게 되었고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능하였기 때문에 그당시 베스파니우스 로마군 사령관의 통역관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요세푸스는 자기가 경험을 했던 로마와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요세푸스는 그당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숫자는 약 백 십만명 이었고 9만 7천명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전쟁의 현실을 기록한 유대 전쟁사의 한 부분을 이시간에 소개해 드립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모든 출구가 막혀 성밖으로 도망칠수 있는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기근이 점점더 심해저 가족과 식구들이 죽어갔다. 옥상에는 못먹어서 완전히 탈진한 여자와 갓난아이들로 북적거렸고, 길에는 노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아이들과 어른 그리고 청년들은 못먹어서 부은 얼굴로 시장거리 를 유령처럼 돌아다녔으며, 여기 저기 쓰러져 죽어갔다.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오랫동안 못먹어서 결국 나머지 자신의 아들을 잡아 먹고는 남은 부분을 숨겨 두었다. 강도들이 그 여인집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는 음식을 달라고 협박했다. 나중에 사람의 고기라는 것을 알고는 강도들은 기겁을 하고는 그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다음 내용을 보시면 너무 처참한 내용들이 많이 나와서 여기까지만 소개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당할 진노와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십 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실 것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울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욕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받게 될 그들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울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세속적인 욕망과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이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보기가 힘들다고 하는 것이 이시대의 비극입니다.

왜 오늘 나에게 이런 눈물이 없는 것입니까? 결론은 한가지입니다. 오늘 나에게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오실 때 통곡하시면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는 것은 관심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가까이 오는 것 아닙니까? 바라보는 것도 관심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바라보시는 것 아닙니까? 통곡하며 우시는 것도 관심입니다. 이 관심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4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수 있습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마치 범죄를 해서 감옥에 들어가는 자식을 가까이 가서 보면서 ’이놈아 이놈아‘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통곡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을 돌로쳐 죽였습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품안에 안 듯이 그들을 품에 안을려고 했지만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두팔을 벌렸지만 그들은 그 품안에 안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울어버리셨던 것입니다. 눈물은 관심이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죽음 앞에서 우셨습니다, 왜요? 나사렛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삼백데나이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은 관심이요 눈물은 사랑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울어야만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위로의 말을 선포하고 누구보다도 평화를 선포하고 누구보다도 자유함을 선포하고 싶었지만 위로 대신에 심판을 평화대신에 전쟁을 자유함 대신에 포로됨을 선포해야 하는 말씀을 전하면서 울어야 했습니다. 가슴속에 사랑이 활활 타오는 사람만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닥까지 추락해본 사람은 눈물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메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입니다. 7.그는 육체에 계실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하나님이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렇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지난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저는 그당시 매번 예배를 드릴때마다 죄많은 나를 위해 피흘리시고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죄를 날마다 밥먹듯이 먹고 살아가던 나를 구원해주심에 감격했던 그따 그 첫사랑의 눈물을 회복하십시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순수하게 은혜를 받았을 때 흘렸던 그 눈물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눈물이 내가정이 살리고 내교회를 살리고 내 민족과 이세상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 신세, 내 처지만을 보면서 한탄하는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흘리신 것과 같은 눈물을 흘리며 신앙생활을 해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