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요단강을 만날때

Author
kgmcc
Date
2023-01-15 04:54
Views
11
본문 : 여호수아 3장 1-6절

날짜 : 2023년 1월 15일

 

<여호수아 3장 1-6절>

1.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지난 주일 예배때 저와 여러분은 모세가 이제 곧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권면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가는 장면 입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인 34장을 보시면 모세는 가나안땅이 바로 보이는 느보산에 올라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명기 34장 4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죽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느보산 어느 한 지역에 모세 시체가 묻혀있을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그 시신을 데려가셨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튼 모세는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그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이 바로 눈앞에 있는 싯딤에서 진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싯딤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정탐꾼 두사람을 보내서 강건너 저쪽 가나안 지역에 있는 여리고 성안을 살펴보게 합니다. 그럴때 이 두명의 정탐꾼과 여리고 성안에 있는 기생 라합이 만나게 되는 사건이 생기게 되죠.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위해서 그 현장으로 한번 가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지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미국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 중동 지역으로 가실려면 대서양을 건너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유럽지역을 지나게 되면 중동지역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이 있고 동쪽에 요르단 서쪽에 이집트 북쪽에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란 터키 이렇게 여러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2중 3중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레바논에서부터 시작해서 헷족속이 살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 터키 지역이 바로 그당시 헷 족속이 살던 장소입니다.  오늘날에는 터키 대신에 튀르키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싯딤에서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서 진을 치게 됩니다. 여기 길갈과 여리고 사이의 길이는 약 2마일인데 킬로미터로 따지면 3km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차를 타고 가면 1, 2분안에 도달할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길갈과 여리고 성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 나오는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여기 느보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싯딤 길갈 여리고가 있죠. 그런데 성지순례를 하시게 되면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와야 하는데 여기 알렌비 다리(이스라엘에서는 이다리를 알렌비 브릿지 요르단에서는 king 후세인 브릿지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만) 어째튼 이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원래는 king 압둘라 브릿지가 있었는데 1968년도에 이스라엘이 이 다리 때문에 이스라엘 자기 나라 생존에 위협이 있다고 해서 공격해서 폭발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다리는 지금까지 손을 대지 않고 그냥 남아있습니다. 밑에는 지금 요단강입니다. 지금은 굉장이 폭이 좁아졌습니다마는 1960년대 까지만해도 요단강은 이렇게 넓었습니다. 다리 규모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960년도에 비해서 90퍼센트가 되는 강물의 양이 줄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큰 댐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 네나라가 엄청난 양의 물을 식수와 농업수와 공업 용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물이 이전보다 10퍼센트 밖에 흐르지 않는 답니다. 이 요단강은 여기 헬몬산에서 그 물줄기가 흘러나와서 갈릴리 호수까지 28km정도를 흘러 내려 옵니다. 우리는 갈릴리 호수 아래에 있는 요단강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갈릴리 호수 위 북쪽에도 요단강이 있는 것입니다. 상류 요단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 흐르는 요단강은 직선으로 약 100km(60마일)가 넘는 거리를 흘러 내려오는 팔레스틴에서는 제일 긴 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폭이 좁은 강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그당시에는 굉장히 넓고 수심이 깊은 강 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3장 15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강이 건널때는 곡식을 거두는 시기이었는데 요단강 수량이 많았던 장면을 이렇게 기록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입니다. “15.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물이 언덕에 넘칠만큼 그당시 요단 강물폭이 굉장히 넓었고 수심도 굉장히 깊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단강을 건넜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여정길에서 만났던 사건중에 최후 최대의 어려움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건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굉장히 힘든 시련을 상징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만난 이 요단강은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왜요? 나와 내 자손이 살아가야 할 가나안땅이 요단강 건너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요단강을 건널수 있는 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힘들고 어려운 요단강을 만나게 될때 성공적으로 건널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건널수가 있습니까?

1.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1.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입니다. 그리고 이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해서 강력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이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날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깨우게 하고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미 두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안에 보냈고 그 정탐꾼이 가져온 여리고 성에 대한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날 우리 믿는 성도들이 믿음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드물지만 십여년 전까지만해도 선교사들중에는 선교지에 대한 정보나 준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만을 가지고 선교지로 떠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현지인들에게까지 하지 않아도 생고생을 시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믿음은 믿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가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행동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노아는 믿음이 있었기에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일을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일천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여행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킬로미터로 따지면 약 1600킬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니까 서울과 부산까지 거리의 5배가 되는 먼 거리를 갈곳을 알지도 못한채 아브라함은 여행을 했습니다. 기생 라합을 보십시오. 라합은 믿음이 있었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두 정탐꾼을 숨겨주고 그들을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실상이고 믿음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실상과 증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무엇입니까? 눈으로 보여지고 손으로 만져질수 있는 것이 바로 실상이고 증거가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보이고 만져지는 실상과 증거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던 것입니다. 비록 그 요단 강물이 강 언덕에까지 넘쳐서 출렁거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있었기에 건널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그냥 무조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 여기서 부터는 제가 할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강물에 믿음으로 한발을 내디디는 것입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처럼 돌맹이 한 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질수 있을 만큼 돌맹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돌맹이 다섯 개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누구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최선을 다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는데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길로 가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올한해 지내는 동안 무슨일을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할 수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2.내 자신이 성결해야 합니다.

5절입니다.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기적이 요구되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기적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기인한 일, 즉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여호수아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성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성결하게 하였는가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두가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자신의 옷을 깨끗하게 빨았을 것이다 는 것 입니다. 출애굽기 19장 10절을 보시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오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9장 10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옷을 빨아서 성결하게 하는 의식을 했다고 해석을 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어쪄면 이러한 행동은 옛날 우리나라사람들이 어떤 큰일을 앞두고 목욕재계를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제가 어릴적에 해마다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를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갔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당시에는 일년에 한,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동네 목욕탕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낼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새옷을 입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입을 옷을 빨아서 성결하게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은 ‘기적을 맞이할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성결’ 이라는 단어는 “깨끗이 한다“ 라는 의미보다는 ”구별한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날과 구별 되게 행동 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인다면 그것이 새옷을 빨아서 입던지 아니면 요단강의 기적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던지간에 그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상시와는 달리 이날에는 특별히 구별된 마음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결 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고 깨끗하게 되어질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할 때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입니다. “14.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깨끗한 심령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에서 내 힘으로 건널수 없는 요단강이 내 앞길을 막고 있을때 우리는 나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려고 하다보면 나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주님이 알게 해 주십니다. 내 문제가 성결의 문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만일 성결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수님 보혈의 피를 의지하고 회개를 하시고 깨끗함을 입을수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3.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 그뒤를 따르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언약궤를 보고 따라간다” 라고 하는 것은 내 계획 내 방법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를 메고 가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올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언약궤와의 거리를 의미) 이천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이천규빗이면 약 900m 정도 거리입니다. 900미터 거리이면 상당한 거리를 두고 가는 것이죠. 또 그만큼 요단강폭이 넓다는 의미도 됩니다. 왜 그렇게 거리를 두고 가게 하는 것입니까? 그이유는 바로 언약궤와 백성들의 사이가 가까우면 이백만명이나 되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엉켜서 행진을 할 때 언약궤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서 따라가면 모든 백성들이 앞서 가고 있는 언약궤를 보면서 행진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내 신념으로 가는 길과 신앙으로 가는 길은 다릅니다. 신념의 근거는 나의 의지, 나의 결단, 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앙의 근거와 대상은 내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내 의지와 내 결단으로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널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따라갈때 요단강을 건널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볼때 우리는 요단강을 건널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한발짝 한발짝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과 불로 나타났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세 종류의 친구가 있는데 첫 번째 친구는 돈이고 두 번째 친구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 친구는 하나님이다. 첫 번째 친구인 돈은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함께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무덤까지 따라가서 추모해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친구인 하나님은 죽음 이후 무덤을 넘어 영원토록 함께해 주신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이땅에서 천국에 까지!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물론 충분한 돈과 내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돈과 사람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에 비해서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우리는 내 자신의 앞길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앞길을 아십니다. 왜요?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나보다 먼저 내 앞길을 가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앞길을 아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축복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중에서라도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욥기 23장 10절입니다.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우리는 내 앞길을 모르지만 나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은 내 앞길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앞서 가신 하나님은 내가 가야 할 길을 닦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서 멈버 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앞서서 가지 않으시면 우리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갈 수 있을 때 까지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이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화되고 성숙한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입니다.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러자 40년 광야 생활을 하던 동안 아침마나 공급이 된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사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던 축복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일할 능력이 있음을 하나님게서 인정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의 중단은 오히려 더 큰 축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열심히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땅을 갈고 농사를 짓고 목축들을 키우면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이른비 와 늦은비를 맞게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만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어린이와 같은 연약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사람이 할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심으로서 남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의 결실을 얻게 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나안땅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는 신앙이 성숙한 자들만이 들어갈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나가 그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는 곳이 가나안땅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가나안땅에서 살아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올 한해동안 아니 남은 생애동안 주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환경속에서라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